1999년 미국의 시사지 <;타임>;은 20세기의 인물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했다.
상대성 이론으로 20세기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키고 E=mc²이라는 공식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가능하게 한 아인슈타인. 그를 둘러싼 여러 소문의 진실을 알아보자.
의혹 1 상대성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1922년, 아인슈타인은 그 전해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기적의 해’로 불리는 1905년, 특수 상대성 이론,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의 삼부작 논문을 발표한 지 17년 만의 수상이다. 아인슈타인 하면 상대성 이론이니 이 노벨상도 당연히 상대성 이론에 준 것이라 믿어 왔는데, 실상 1921년 노벨상은 삼부작 중 광전효과에 준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인슈타인의 노벨물리학상은 상대성 이론에 준 것이 아니라는 주장, 진실일까?
노벨상 선정위원회에서 발표한 짧은 수상 이유를 보면 이 말은 진실처럼 보인다. 위원회에서는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헌과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을 수상 이유로 제시했다. 여기에 상대성 이론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법. 그해 시상식에서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스웨덴의 저명한 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아인슈타인의 공헌을 길게 발표했다. 그 발표의 첫머리를 채운 것은 상대성 이론이었다. 현존하는 과학자 중에 가장 유명한 아인슈타인, 그의 이론 중에서 가장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이라는 말로 아레니우스는 상대성 이론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상대성 이론을 전면에 부각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혔다. 당시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일반 상대론의 시간관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노벨상 선정위원회로서는 베르그송을 무시하면서까지 상대성 이론에 노벨상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선정 이유에서 상대성 이론을 “이론물리학에 대한 공헌”으로 뭉뚱그린 반면, 광전효과는 또렷이 부각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금속에 빛을 쏘이면 금속에서 전자가 튀어나와 광전류가 흐르는데 이를 광전효과라고 한다. 이 현상은 1887년 독일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가 처음 발견한 후, 다른 물리학자들이 여러 차례 실험으로 그 현상을 확인했지만 빛의 파동론으로는 설명이 힘들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빛을 입자로 가정하는 광양자 개념을 도입해 광전효과를 제대로 설명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는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제안한 양자 개념을 최초로 응용한 것이었으며 1913년 보어의 새로운 원자 개념이 나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광전효과는 플랑크-아인슈타인-보어로 이어지는 양자 개념의 확장에서 빠질 수 없는 연결고리였던 셈이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개념은 미국 물리학자 밀리컨의 실험을 통해 그 이론적 정확성이 검증되기까지 했다. 실험으로 현상이 확인되고 그 정확성이 검증됐기에 노벨위원회도 안심하고 노벨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의혹 2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 명뿐?
1915년에 발표된 일반 상대성 이론이 너무 어려워서 발표 당시에 이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얼마 안 됐다는 이야기는 도시 전설처럼 퍼져 있다. 이해했다는 사람의 수도 출처에 따라 두 명, 세 명, 때로는 열 명으로 제각각이다. 이것은 진실일까?
이 이야기의 기원은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입증했다는 발표를 했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에딩턴은 개기일식 때 태양 주변을 지나는 빛이 휘는 것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발표장에 있던 자칭 상대성 이론 전문가 루드빅 실버스타인은 에딩턴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당신은 (아인슈타인과 나에 이어) 이 세상에서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 세 번째 사람이 되었군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딩턴이 “(아인슈타인과 나 빼고) 그 세 번째 사람은 누구지요?”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잘난 척하는 실버스타인을 제외해버린 것이다.
실버스타인을 비꼬았던 에딩턴의 위트 넘치는 대응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돼 전해졌다. 상대론을 이해한 사람은 아인슈타인과 자신밖에 없다고 뽐내며 말했다는 ‘오만한 에딩턴 버전’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상대론이 너무 낯설고 어려운 이론이라서 처음에는 과학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과학혁명 버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에딩턴의 발표를 전한 ‘뉴욕 타임즈’는 기사의 부제를 “12명의 현자를 위한 책”이라고 달아 ‘12인 버전’으로 그 수를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에딩턴의 발표장에서 이뤄진 논쟁을 보면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다. 에딩턴이 발표한 증거를 두고 이뤄진 논쟁에서, 과학자들은 빛의 휘어짐을 보여주는 증거가 일반 상대론을 입증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증거와 가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따지는 이 논쟁 자체가 과학자들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그 세부적인 사항까지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를 보여줬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 명밖에 없다’는 도시 전설은 과학의 매우 중요한 진실을 가린다. 과학은 천재 한 명이 이룰 수 없는 집단적 협력의 성과라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에딩턴의 관측이 입증했다는 역사적 사건이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료 과학자들도 이해하기 힘든 논문을 낸다는 것은 이 협력의 네트워크에 속하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점에서 시작부터 실패를 선택하는 길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당연히 오늘날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의혹 3 아인슈타인이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E=mc²으로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전후 일본의 한 기자는 아인슈타인에게 왜 파괴적인 폭탄 개발에 참여했냐고 비난조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원자폭탄을 만든 아인슈타인, 이것은 진실일까?
아인슈타인이 원자폭탄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다. E=mc²이라는 수식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것으로, ‘질량-에너지 등가’라고도 불린다. 고전역학에서 물질의 고유한 양으로 이해되던 질량이 사실은 광속의 제곱을 곱한 만큼 거대한 에너지로도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수식은 핵분열 과정에서 사라지는 질량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길을 닦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아인슈타인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미국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에서 아인슈타인의 역할은 여기까지가 끝!
미국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돼 최초의 원폭으로 이어졌지만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참여한 적이 없다. 그는 미국 연방수사국 FBI가 감시하던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아인슈타인을 FBI는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에게는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에 필요한 비밀취급권을 내주지 않았다.
설령 비밀취급권을 받았더라도,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원폭 개발 전에 패망할 줄 알았다면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1955년 아인슈타인은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통해 핵무기 폐기와 과학 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촉구했다.
아인슈타인이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는 것은 거짓에 가깝다. 누구보다 이 거짓말에 슬퍼할 사람은 아인슈타인 자신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원폭 개발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지만 누구보다 원폭 사용을 반대했으니 말이다.
박민아
과학사 연구자. 과학사의 컨텐츠를 대중화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 책도 쓰고 학생들과 보드게임을 만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