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망으로 된 전시장 앞을 하염없이 서성이는 늑대와 너구리, 덩실거리며 춤을 추듯 몸을 앞뒤로 흔드는 코끼리, 돌로 된 벽을 끊임없이 핥는 기린, 신체부위 중 한 곳만 집중적으로 털고르기를 하는 원숭이. 상식적으로 봐도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다.
동물이라면 야생에서 먹이를 찾고, 포식자를 피해 몸을 숨기고, 배우자를 얻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하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하지만 동물원의 동물은 포식자의 위협 없이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먹이를 먹고 무료하게 하루를 보낸다. 이런 날이 계속되면 동물은 남는 에너지를 소비하기 위해 아무런 목적과 기능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이런 행동을 ‘정형(stereotype)행동’이라고 한다. 좁은 우리에 사는 동물은 야생에서 얻을 수 있는 육체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 정형행동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특히 코끼리나 침팬지 같은 고등동물일수록 정형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동물을 사육하고 관리할 때 이들의 불만을 이해하고 해결해주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행동풍부화를 들 수 있다. 행동풍부화는 동물의 불만을 해소하고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동물관리방식 중 하나다.
행동풍부화는 동물들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머리를 써서 먹이를 얻게 하고 개체끼리 경쟁을 유발시키는 경우가 그 예다. 행동풍부화에 정해진 방식은 없다. 동물의 종류나 개체마다 다르게 적용한다. 각각의 동물에 대한 맞춤형 야생 체험 프로그램이라고 할까.
로프는 OK! 철사는 NO!
행동풍부화라는 개념은 100년 전 미국 하버드대 행동심리학자 로버트 여키스 박사가 영장류 동물의 무료함을 달래고자 환경을 바꿔주는 작업을 시도하며 등장했다. 그리고 50년 전 스위스 취리히동물원이 최초로 행동풍부화를 도입했고, 4년 전 국내에 들어왔다. 우리나라는 외국 동물원에 비해 행동풍부화를 연구한 기간은 짧지만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연구해왔다.
서울대공원 어린이동물원에 전시된 다람쥐원숭이는 사회성이 높아 무리 속에서 다양한 놀이 행동을 보인다. 워낙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물체에 대한 반응이 빠르고 지속 시간도 길다. 다람쥐원숭이에게 단조로운 인공 바위섬으로 된 곳에 마닐라로프를 설치해 다양한 동선을 만드는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다람쥐원숭이는 로프를 모두 설치하기도 전에 새 로프로 건너가 이리저리 건너뛰며 장난을 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람쥐원숭이는 다양한 동작을 선보이며 사육장 안을 활발하게 돌아다녔다.그리고 이를 남기는 일도 줄었다.
하지만 모든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이 성공하지는 않는다. 행동풍부화는 동물의 습성이나 지능을 고려해야한다. 다람쥐원숭이가 머리를 써서 먹이를 먹도록 방울토마토를 굵은 철사에 꼬치처럼 꽂아 나무에 매달아준 적이 있었다.
철사 끝 부분의 방울토마토부터 하나씩 빼먹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다람쥐원숭이는 그냥 방울토마토를 뜯어먹었다. 다람쥐원숭이의 지능이 주어진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을 소화할 만큼 높지 않았던 까닭이다.
국내보다 도입이 앞선 외국은 더욱 체계적으로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헨리둘리 동물원에서는 호르몬을 분석해 동물의 스트레스를 예측한다.
고릴라나 곰처럼 큰 동물은 채혈할 때마다 마취를 해야하기 때문에 피검사를 하기 힘들다. 그래서 배설물에 포함된 코르티솔 호르몬 수치를 측정한다. 실제로 오마하 헨리둘리 동물원의 고릴라는 행동풍부화 프로그램 덕분에 스트레스가 줄었다.
서울대공원과 자매결연을 맺은 대만 타이베이 동물원은 동물의 행동풍부화를 고려해 설계했다. 먹이를 여기저기 숨겨놓을 수 있도록 인공 나무의 틈에 먹이통을 마련하고, 도구를 이용해 먹이를 먹도록 개미집을 형상화한 구조물도 설치했다. 큰 나무를 닮은 인공 구조물 안에는 추운 겨울에도 몸을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난방기를 달았다.
애완동물도 야성은 있다
행동풍부화는 동물원의 동물에게만 필요할까. 애완동물로 눈을 돌려보자. 매일 똑같은 식단과 장난감.애완동물의 일상도 단조롭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비만, 당뇨병 같은 성인병을 앓을지도 모른다.
애완동물을 위한 행동풍부화는 쉽고 간단하다.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는 매일 똑같은 산책로를 피하고, 먹이는 여러 곳에 나눠 주거나 구석에 숨겨두면 먹이를 찾는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고양이는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사물에 강하게 집착한다. 그래서 낚시줄에 장난감을 묶어 눈앞에 흔들어주면 고양이를 활발히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 종이상자에 먹이와 신문지 더미를 함께 섞어주면 먹이를 탐색하는 본능을, 다양한 높이의 수직 공간을 제공하면 신나게 뛰어오르는 본능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
최근에는 행동풍부화를 행동치료의 개념으로 확대하기도 한다. 행동에 문제가 있는 동물을 우선적으로 선정해 평소 행동 중 문제 행동의 빈도를 분석하고 맞춤형 치료 프로그램을 적용한다. 하지만 주의해야할 사항은 단 하나의 반짝이는 프로그램으로 동물들의 문제 행동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꾸준히 적용해야 치료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특히 한번 시작된 동물의 정형행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와 빈도가 높아진다.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은 이 강도와 빈도를 낮출 뿐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은 치료 프로그램이 아닌 예방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동물이 정형행동을 보이기 전에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듯이 동물에게도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먹이를 주고 잠잘 곳을 제공한다고 동물의 권리를 지켜줄 수는 없다. 오랜 세월 동물이 살아온 곳은 자연이다. 유전자에 남아있는 야생의 본능을 발휘할 수 있는 동물원. 이런 곳이야말로 동물에게 진정 ‘살맛 나는’ 동물원이 아닐까.
서울대공원 포유류큐레이터의 일기
침팬지
침팬지는 야생에서 먹이를 찾아 먹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래서 동물원의 침팬지에게도 야생에서처럼 먹이를 얻는데 시간이 걸리도록 복잡한 먹이통을 제공했다.
2005년 4월 20일
생수통에 과일과 야채를 넣어줬다. 침팬지는 먹이를 얻기 위해 생수통을 이리저리 굴렸다. 입구를 통해 음식이 나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얼마 뒤 무심코 흔든 생수통에서 과일이 몇 개 쏟아졌다. 침팬지는 먹이를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2005년 5월 20일
더 이상 생수통을 이용한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은 효력이 없었다. 침팬지가 생수통에서 먹이를 얻는데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침팬지가 아쉬워하는 듯 보였지만 생수통 프로그램을 오늘로 중지했다.
2006년 7월 9일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물에 토마토를 넣고 얼린 커다란 얼음을 로프에 매달아줬다. 평소 토마토를 즐겨먹지 않는 침팬지에게 이런 방식으로 토마토를 주자 서로 먹으려고 경쟁했다.
2006년 7월 12일
침팬지가 남기는 음식의 양이 크게 줄었다. 편식도 사라졌다. 침팬지는 짜여진 식단대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했고, 무리에서 경쟁을 하며 활발하게 운동했다. 영양학적으로 긍정적인 효과였다.
유럽 불곰
유럽불곰은 육지에 사는 동물 중 가장 크고, 먹이 사슬에서 호랑이와 더불어 최상위를 차지한다. 체중 때문에 나무에 오르는데 한계가 있지만 앞발을 세워 나무를 붙잡고 몸을 길게 펴거나, 먹이 사냥을 위해 날카로운 발톱을 유지하려고 지속적으로 나무껍질을 긁는 습성이 있다.
2005년 5월 20일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잠만 자고 있는 유럽불곰. 곰에게 어떤 방법으로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좋을까. 사육사와 상의한 끝에 큰 나무를 넣어주기로 했다. 좁은 사육사 문으로 큰 나무를 넣을 수 없어 대형 크레인으로 전시장 밖에서 넣기로 했다.
2005년 6월 16일
뿌리가 흙으로 뒤덮인 지름이 2m가 넘는 나무를 넣어줬다. 유럽불곰은 처음에는 나무에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어미 곰이 먼저 나무에 다가가자 새끼 곰도 주저하는 걸음으로 나무에 다가갔다. 곰은 나무의 냄새를 맡고 앞발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2005년 6월 17일
새끼 곰은 흙이 그대로 묻어있는 뿌리를 좋아했다. 뿌리를 잡고 두 발로 일어서보기도 하고 흙파기 놀이도 했다. 어미 곰과 나무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곰은 어제보다 나무에 익숙해져 몸을 비비기도 하고 나무껍질을 벗겨보기도 했다.
2005년 6월 18일
고사목 뿌리 쪽의 흙은 한참 패여 있었고 곰이 꺾을 수 있는 나뭇가지는 모두 꺾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유럽불곰은 밤새 나무와 한바탕한 모양이다. 새 나무를 또 어디서 구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