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부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세계 최고의 핵물리학자 이휘소 교수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이휘소는 이에 협력하다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휘소 하면 떠오르는 이 이야기는 진짜일까?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말 노벨상을 탔을까?
핵물리학자 이휘소 교수가 실제로 남긴 업적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의혹 1 이휘소는 한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다?
이휘소가 박정희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을 돕다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아무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확실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이휘소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입자물리학자였다. 둘째, 그는 한창 촉망받던 40대 초반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셋째, 이휘소의 때 이른 죽음을 국내외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반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실히 밝혀진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휘소가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동조해 한국에 설계도를 전해주려 했다(그는 유신 독재에 비판적이어서 예정된 한국 방문을 취소한 일도 있으며, 독재자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핵무기는 막아야 한다는 신념을 주변에 자주 설파했다). 둘째, 이휘소가 목숨을 걸고 협력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원자폭탄 만들기에 도전할 수 없었다(원자폭탄은 이미 1945년에 개발된 기술로 1970년대 입자물리학의 첨단 지식을 몰라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국제사회의 감시를 피해 핵연료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셋째, 박정희 대통령이 이휘소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이는 소설가들이 극적 재미를 위해 창작한 것으로, 그들도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음모론은 확실한 사실과 확실한 거짓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사람들의 의심을 양분 삼아 자라난다. 음모론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결정타는 300만 부가 넘게 팔린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였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도 아니다. 이휘소의 사망 소식이 국내에 전해진 직후부터 비슷한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1977년 6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한 신민당 국회의원은 이휘소의 사망에 “어떤 흑막이 개입하지 않았는지” 질문하기도 했다. 사망한 지 불과 2주만에 한국에서 입에서 입으로 음모론이 퍼진 것이다.
1975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패망한 후 두려움에 사로잡힌 박정희 정부는 독재 체제를 강화했고, 미국과의 관계는 점점 나빠졌다. 불안한 시민들 사이에서 유신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론물리학자가 요절했다는 소식은 이런 불안감과 결합해 음모론의 씨앗이 됐다. 이휘소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점도 ‘미국 정보기관이 꾸민 암살’이라는 억측을 부채질했다.
이후 이휘소의 가족, 동료, 제자 등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이런 음모론은 근거 없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도 이휘소는 ‘핵무기 개발 음모론의 주인공이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천재 과학자’라는, 어정쩡한 소개 밖에는 떠올리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진짜 이휘소는 어떤 과학자였으며, 과학의 역사에서 그의 자리는 어디인가?
의혹 2 이휘소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핵무기’라는 키워드 다음으로 이휘소라는 이름을 따라 다니는 키워드는 ‘노벨상’이다. 그러면 이휘소의 이미지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기회가 오지 않은 과학자’ 정도로 조금은 구체화된다.
이휘소가 노벨상에 근접한 과학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연구주제였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당대 세계 이론물리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으며, 그는 독창적인 모델로 혁신적 성과를 거뒀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양자장론을 보완하기 위한 수학적 장치다. 양자장론이란 양자역학의 여러 입자들을 장(field)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설명하는 관점이다. 전기와 자기 현상을 입자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전기장과 자기장의 변화로 설명할 수도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양자장론을 적용하면 입자물리학의 여러 현상을 편리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장이 존재하는 수학적 조건들을 명확히 해줘야 한다. ‘게이지 이론’은 이 조건들을 맞춘 양자장론의 한 갈래이며, ‘재규격화’란 게이지 이론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다듬어 주는 수학적 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만 요약하자면, 이휘소의 연구는 양자장론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주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하는 수학적 기반을 닦은 것이다. 즉 20세기 초 탄생한 양자역학이 특수상대성이론과 결합해 1960~1970년대 양자장론이라는 더 높은 수준의 이론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필수적인 이정표가 이휘소의 연구 성과였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휘소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휘소 사망 2년 뒤인 1979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셸던 리 글래쇼, 무함마드 압두스 살람, 스티븐 와인버그 등 세 명에게 돌아갔는데, 이들의 모형을 수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바로 이휘소의 논문들이었다. 그리고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헤라르뒤스 엇호프트와 마르티뉘스 펠트만도 이휘소의 연구에 힘입어 자신들의 수학적 모형이 옳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살람과 엇호프트는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를 언급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휘소가 살아있었다면 인사가 아닌 상을 받는 기쁨을 나눴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역사에서 ‘만약’을 이야기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이휘소가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여성이나 비서구권 과학자들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서구 백인 남성 과학자들에 비해 박한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휘소의 노벨상 수상 여부도 ‘1979년과 1999년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라는 정도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결론 이휘소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일까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휘소가 살아있었다면…’ 하고 아쉬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이 아니지만) 이휘소가 한국을 위해 원자폭탄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노벨상에, 그것도 물리학상에 근접했기 때문에?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이휘소의 가족들은 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퍼지는 것을 걱정했고, 소설의 판매를 멈춰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한국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는데, 그 이유가 다소 황당하다. 이휘소를 모델로 한 소설의 등장인물인 ‘이용후’가 “우리나라 독자들로 하여금 위 이휘소에 대하여 존경과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것이어서, 우리 사회에서 위 이휘소의 명예가 더욱 높아졌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해당 소설 때문에 이휘소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거짓 이유로 존경을 받게 됐는데 명예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씁쓸한 에피소드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라는 틀에 이휘소를 끼워맞추려고 할 때 무엇을 우리가 놓칠 수 있는지 보여준 생생한 사례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휘소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과학자 이휘소의 업적이 궁금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가 필요해서인지,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물어볼 필요도 있다. 이휘소의 업적은 조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실용적 업적도 아니었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휘소가 이러한 업적을 냈다고 해서 세계 이론물리학계가 한국 과학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 또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이휘소의 업적은 세계 과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업적에 그 자체로 관심을 갖고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할 때, 우리는 과학자 이휘소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고, 그를 제대로 존경하고 흠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서울대에서 한국 과학기술사를 전공했다. 역동의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려면 과학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통일벼, 한글타자기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오답이라는 해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