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白雪)에 흩뿌린 붉은 꽃잎
한겨울 내륙 지방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에 꽁꽁 얼어붙지만 다도해의 섬들은 제법 따뜻하다. 남쪽의 섬에는 우묵사스레피나무, 까마귀쪽나무, 검팽나무, 생달나무, 광나무, 비파나무, 얼룩식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같은 다소 생소한 이름의 수종들이 모여 싱싱한 상록활엽수림을 이룬다. 그 가운데 동백나무는 남해안과 다도해상의 섬에 폭넓게 분포한다.
4월초에 꽃이 피는 선운산 동백나무처럼 지역에 따라 동백의 개화 시기는 다르지만 대체로 겨울을 전후해 탐스러운 꽃망울을 터뜨린다. 해남, 강진, 여수, 거제도 등 남해안 일대에서는 2~3월, 거문도와 울릉도, 제주도에서는 1~2월이면 동백꽃이 한창이다. 그래서 조상들은 추운 겨울에도 정답게 만날 수 있는 친구라는 뜻에서 동백을 ‘세한지우’(歲寒之友)라고 불렀나 보다.
작은 동박새와 절정을 나누다
윤이 나는 녹색의 두꺼운 잎들 사이로 보일 듯 말듯 드문드문 피어 있을 때가 동백꽃의 절정이다. 향기는 별로 없지만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붉은 꽃이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다도해의 상록수림은 먹을거리가 풍부해 흑비둘기, 박새, 직박구리, 곤줄박이, 동박새처럼 많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하다. 동박새는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고 사는 텃새로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이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11cm 정도의 길이에 몸무게가 10g 내외인 동박새는 꿀을 빨기 적당한 부리를 갖고 있다. 눈동자 주위에는 원형의 흰색 테두리가 그려져 있고 턱밑의 화사한 노란 솜털은 연둣빛 깃털과 어우러져 경쾌하다.
달콤한 꿀을 건네고 사랑을 얻는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대부분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의 활동시기와 맞물려 있지만 유일하게 동백은 곤충이 활동하지 못하는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운다. 동백나무는 꿀이 듬뿍 담긴 화려한 꽃을 피워 동박새를 유혹하고, 동박새는 동백나무 숲을 부지런히 누비며 나뭇잎사이의 동백꽃을 잘도 찾아낸다. 실제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백꽃을 유심히 보면 꿀물이 밖으로 흘러나와 꽃잎과 나뭇잎까지 흥건히 젖어 있다.
동박새가 동백꽃에 들어있는 꿀을 빨아 먹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꽃가루받이가 이뤄진다. 동백꽃의 입장에서 보면 꿀을 주고 사랑을 얻는 셈인데 꿀과 사랑 모두 달콤하기 이를 데 없으니 누가 이익이고 누가 손해인지 따지기 힘들다. 그저 동백나무가 겨울에도 줏대 있게 꽃을 피울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조력자가 동박새라는 것밖에. 수분이 끝나고 난 동백꽃은 얼마 못가서 꽃잎을 떨구지만 또 다른 나뭇가지들이 싱싱한 꽃망울을 쉼없이 터뜨린다.
포근한 숨결 덮고 겨울을 나다
동박새는 암수 한쌍이 가족을 이루거나 수십마리가 무리지어 산다. 동박새들은 가끔씩 동백꽃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부리를 서로 맞대고 수직으로 오르내리면서 한판 승부를 벌이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동박새는 박각시나방이나 아메리카대륙의 벌새처럼 완벽한 정지비행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꿀을 빨기 위해 정지비행을 시도하거나 영역다툼을 할 때 수직으로 나는 모습에서 동박새가 다른 새들보다 체공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겨울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동백꽃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아한 미를 뽐낸다. 동백나무숲을 바삐 누비며 차디찬 동백꽃을 살갑게 어루만지는 동박새의 품은 포근하기만 하다. 동백나무와 동박새의 따뜻한 우정은 찬 겨울을 녹이고 다가올 봄을 재촉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