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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재료가 바꾼 인간의 감정들

과학동아 에디터와 함께 읽는 이달의 책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

아이니사 라미레즈 지음│김명주 옮김

김영사│464쪽│2만 2000

 

 

이 책은 목차가 특별하다. 재료와 물질의 과학사를 이야기할 것처럼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목차에 나열되는 표제어는 모두 명사가 아닌 동사다. ‘교류하다’ ‘연결하다’ ‘전달하다’ ‘포착하다’물질 그 자체보다는 물질을 사용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책은 여러 재료가 인간의 행위들을 바꿔간 과정을 섬세하게 서술한다. 재료가 빚어낸 행위 방식의 변화가 인류에게 반드시 긍정적 영향만 준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부정적 효과도 가져왔다고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3장 ‘전달하다’에서 다루는 소재는 통신방법 중 하나인 전신(모스 부호 등 전기 신호를 이용한 통신)이다. 미국인 새뮤얼 모스가 19세기 중반에 개발한 전신은 장거리 통신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비약적으로 단축시켰다.

 

이와 동시에 짧고 건조한 영어 문체가 확산되고, 전신을 받은 사람이 정서적 불안감을 느끼는 등 예상치 못한 변화들도 따라왔다. 당시 전신을 보내는 거리와, 전신에 담은 단어 수에 따라 요금을 부과했던 까닭에 사람들이 가능한 짧은 문장으로 전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신의 기본 요금이 당시 노동자들 주급의 10%에 달해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급한 일이 아니면 편지를 보냈다. 전신을 보낼 만큼 ‘급한 일’이란 많은 경우 나쁜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보는 공포를 상징하기에 이르렀다. 소식을 전하는 행위를 바꾼 전신이 더 나아가 그 소식, 전신을 받는 사람들의 정서까지도 바꾼 것이다.

 

전신은 미국인들의 표현 행위를 크게 바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자 수가 곧 비용으로 계산됐던 전신은 공감의 표현을 배제하도록 유도했다. 전신이 요구한 경제적이며 간결한 영어는, 전신이 개발된 지 70년 가까이 지난 후인 1917년에 기자로 저술 활동을 시작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이르러 문학의 언어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당시 전신은 신문사에서 취재와 보도의 필수 도구였다. 헤밍웨이는 신문이 요구하는 문체를 흡수해 짧고 힘있는 자신만의 문체를 이뤘다. 그리고 거기에 매혹된 독자들에 의해 수식이 없고 친근한 표현이 주를 이루는 ‘미국식’ 영어가 확산됐다.

 

전신이라는 물질이 문학이라는 행위 자체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문학의 스타일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정서까지도 변화시켰음을 이 책은 흥미롭게 서술해냈다. 인간이 물질을 만드는 과정이 하나의 결과를 향한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었듯, 물질이 인간을 만든 과정도 발전과 진보의 연속이 아니었다.

 

물질들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행위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쪽으로 끌고가기도 했다. 인간과 기술, 물질이 영향을 주고받은 흥미진진한 복선들을 이 책에서 만나보자.

 

‘LIVEWIRED’.  ‘생후배선’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저자가 뇌 가소성(Brain Plasticity)의 의미에 한계를 느껴서 새롭게 만든 용어다. 전구에 불이 켜지려면 전기 배선이 서로 연결돼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뇌는 미완성인 상태로 태어나 상황에 알맞게 스스로 모습을 바꾸고 연결되며 성장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앨리스는 뇌의 우반구가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왼손을 섬세하게 쓰지 못하는 것 외에는 시력이 정상이고 다른 이상도 없었다. 보통 두 반구에 걸쳐 분포되는 신경회로가 어떻게 연결됐는지 알아보니, 왼쪽과 오른쪽에서 뻗은 섬유들이 모두 좌반구에 연결돼 있었다. 생후배선이라는 놀라운 능력 덕분에 절반의 뇌로도 모든 기능을 처리한 것이다. 스마트폰에서 전자장치의 반을 자르면 작동하지 않겠지만, 인간의 뇌는 절반의 뇌가 회로를 재편해서 부족한 기능을 스스로 보충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발전하고 변화하는 뇌’의 특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인간의 변화무쌍한 가능성의 세계를 계속해 증명해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뇌의 반쪽을 잘라낸 아이가 어떻게 다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지, 어린 시절의 적절한 사회화와 상호작용이 왜 중요한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왜 청각이 발달했는지 등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아마추어의 뇌는 바삐 돌아가지만 전문가의 뇌는 놀라울 정도로 잠잠한 이유도 바로 뇌의 최적화와 관련돼있다. 전문가의 뇌는 이미 특화된 신경회로를 갖추어서 많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마추어의 뇌는 가소성이 매우 큰 반면 최적화돼 있지 않고, 전문가는 유연성을 잃는 대신 특정한 일에 통달하게 된다. 적응력과 효율 간에 거래가 이뤄지는 셈이다.

 

한 가지 일을 잘하려면 다른 일로 통하는 문은 닫아야 한다. 갈 길을 택하는 과정은 동시에 가지 않을 길을 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자의 뇌는 어떤 길을 간 결과인 동시에, 다른 길을 가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각자의 세계를 이룬다.

2023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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