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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매니아가 철도 계획가로… “저는 성덕입니다”

내가 7살이던 1987년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어른들은 당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들을 많이 나눴다. “○○○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 동네에 도로도 깔아주고, 버스 돌아다니게 해준다더라.” 그리고 몇 년이 흘러 1995년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시기, 이제는 어른들의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만큼 머리가 굵어지자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가 당선되면 교통문제 해결해준다더라’. 내게 ‘교통’은 그렇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모두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누군가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

 

교통공학과의 운명적인 만남

 

중학생 시절 나는 ‘삼국지’라는 책과 게임에 빠져 있었다. 삼국지에서 내 ‘최애’ 캐릭터는 제갈공명이었다(제갈공명은 워낙 인기있는 캐릭터라, 당시에 삼국지를 좋아했던 친구들은 모두들 자신을 제갈공명에 이입하곤 했다). 이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전쟁의 전술과 전략을 잘 짜야 했다. 모두가 제갈공명이었던 나와 친구들은 게임을 공략할 때 군수물자 보급을 중요하게 살폈다. 우리들은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 산세가 험한 촉나라 지역에서는 더디고, 평원이 펼쳐진 중원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물자를 수송하는 경로가 다양해지면 산적의 약탈을 피하기 쉽다는 사실도 이용했다. 통신망이나 교통망이 잘 발달된 지정학적 요충지가 왜 중요한지를 몸소 깨달았달까.

 

시간이 흘러 남들처럼 대학에 가게 됐을 때 나는 건축도시조경학부를 선택했다. 솔직히 어떤 분야를 더 공부해야겠다는 대단한 포부는 없었다.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 중 부모님 곁을 떠날 수 있는 서울권의 국공립대학을 선택한 아주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곳에서 교통공학을 다시 만났다. 건축학건축공학도시공학조경학교통공학이 합쳐진 건축도시조경학부에서는 1학년 교과과정 중에 학부에 설치된 5개 학과 개론을 모두 체험할 기회가 있었다. 그중 교통공학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꾸만 떠오르게 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대한민국은 고속철도 사업을 한창 추진 중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여 만에 갈 수 있는 기차가 생긴다는 소식에 모두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당시 구독 중이던 과학동아에서도 이 뉴스를 다뤘다. 고속철도 차량을 도입할 때 독일의 이체(ICE)와 프랑스의 테제베(TGV) 가운데 무엇이 기술적으로 더 좋은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책에 실린 고속철도 사진은 어린 눈에도 정말 멋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한국의 철도 기술력이 이들 국가에 비하면 많이 뒤처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도 됐다. 시간이 지나 고속철도는 2004년 4월 1일에 개통됐다.

 

교통공학은 진정한 융합학문

 

교통공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던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세부 전공은 교통계획으로 정했다. 교통계획을 세울 때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교통 인프라는 토지 이용계획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토 이용이나 교통 체계에 대한 법과 제도를 알아야 한다. 또 신도시나 산업단지를 건설하는 등의 정부정책, 부동산 경기와 같은 최신 시장동향도 중요하다. 추가로 지역의 현실도 파악해야 한다. 지역에서 사람이나 물자가 이동하는 동선과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통행유발시설의 위치, 사람들의 주요 거주지 등도 교통을 계획할 때 알아야 하는 중요한 요소다.

 

대학원에선 이 모든 것을 고려해 사람이나 화물을 이동수송하려는 통행 수요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발생할지, 어떻게 도로와 철도, 공항과 항만 등의 교통 인프라를 적정한 수준으로 공급할 수 있을지 예측하는 연구를 했다.  현재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철도공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부분 철도는 국가재정으로 건설되므로 재정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도록 철도노선이 어디에, 어느 규모로 필요한지 진단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최근에는 친환경저탄소 이동수단인 철도 이용을 늘려 탄소중립에 기여하는 일도 중요해져서, 이를 위해선 철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도 고민하고 있다. 과학동아를 읽으며 고속철도를 막연히 상상하거나 PC게임에서 군수물자를 수송할 최적 경로를 찾던 내가 실제 우리 땅의 철도노선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가끔은 어릴적 꿈을 이룬 내가 그야말로 ‘성덕(성공한 덕후)’인가 싶을 때도 있다.

 

과학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과학동아 독자라면 한 번쯤은 장래희망을 ‘과학자’라고 적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현실의 직업과 장래희망으로 표현된 단어 간의 격차가 가장 큰 경우가 바로 과학자라고 생각한다. 과학자는 무슨 일을 하는지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처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데다, 공부를 계속 해야할 것만 같은 ‘학자(學者)’ 느낌이 섞여있다. 돈벌이가 되는 업(業)으로서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진 데는 과학동아도 한 몫(?) 했다. 어린 시절 과학동아에서 ‘빅뱅’ ‘암흑물질’ ‘상대성이론’ ‘쿼크’ ‘텔로미어’ 등을 자주 접하며 우주천문학, 물리학, 생명과학만 진정한 과학이라고 오해했다. 어린 시절의 기준으로 보면 교통공학은 과학보다는 사회학에 가깝다. 인간의 필요로 이동 시스템을 만들고, 이동 시스템이 다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더 좋은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모든 노력이 교통공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통공학은 교통계획뿐만 아니라 교통경제, 교통설계, 교통운영, 교통안전 등의 분야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교통 인프라를 최적 위치에 최적 규모로 공급하는 것이 교통계획이고, 이를 위해 국가재정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할지 고민하는 것이 교통경제다. 그 밖에 편리하고 안전한 교통 인프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교통설계가 필요하고, 건설 이후에는 교차로를 어떻게 설치하고 교통신호를 어떻게 내보낼 것인지 고민하는 교통운영이 시작된다. 교통안전 분야에서는 교통사고 건수나 사고의 심각도를 낮추기 위해서 표지판, 전광판 등의 정보를 어떻게 제공할지, 차선을 어떻게 분리할지 등을 연구하고 있다.

 

교통공학이 과학, 공학, 사회학, 어느 것에 가깝든 중요한 건 교통공학 분야도 여느 다른 과학 분야처럼 합리적인 사고가 항상 밑바탕이 된다는 점이다. 도로의 선형이, 철도노선이나 철도역의 위치가, 또는 공항의 위치가 때로는 정쟁의 대상처럼 비춰질 때도 있다. 하지만 교통 인프라와 관련한 의사결정 과정에는 교통계획가의 효율적인 공간 분석과 교통경제학자의 합리적인 비용편익 계산이 모두 녹아있음을 독자 여러분들이 기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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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현승 국가철도공단 미래전략연구원 차장
  • 에디터

    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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