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늦은 밤. 두 아이의 엄마인 K씨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최신형 전동자동차 장난감을 구입했다. 그녀가 결제를 마치자 모니터에는 ‘프린터에 폴리머 카트리지 c2000을 넣으시오’라는 메시지가 떴다. 카트리지를 교체한 후 모니터에는 ‘인쇄’ 창이 떴다. 그녀가 [인쇄] 버튼을 클릭하자 최근 구입한 3차원 프린터 3DP-2013r이 조용하게 전동자동차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지나자 화면에서 보았던 장난감이 실물로 완성돼 나왔다. 그녀는 최신 3차원 인쇄기술이 찍어낸 장난감이 공장생산품 못지않다며 만족해 했고 낮에 북적대는 백화점을 안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전동자동차를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숨겨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2013년의 평범한 가정의 생활 모습을 상상해보았는데 신기하면서도 어딘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곳곳에 있다. 우선 ‘폴리머 카트리지’와 ‘3차원 프린터’라는 제품명이 생소하다. 그리고 장난감이 종이 위 사진으로 인쇄되는 것이 아니라 실물로 인쇄되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결제하고 나서 장난감이 배달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결제 후 인쇄 작업으로 넘어간다는 말은 기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허무맹란한 얘기가 아니다.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기술이 이같은 미래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3차원 입체 인쇄 기술’이 바로 그것.
사막에서 고장난 차량 부품 인쇄
눈앞에서 자신이 원하던 제품이, 상상했던 물건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마우스 클릭 한번하고 스위치를 켠 후 카트리지를 넣어주면 주문한 제품이 무엇이라도 언제 어디서든 여러분의 눈앞에서 단 몇분만에 만들어진다. 이렇게 재미있고 기묘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마술과 같은 장치를 개발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장난감, 꽃병, 안경은 물론 전자장치인 라디오, 리모콘, TV 부품까지 이 모두가 하나의 마술 장치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이 마술 같은 재주를 가진 만능 재주꾼이 바로 ‘3차원 입체 프린터’다. 일반 프린터는 종이 위에 잉크를 뿌려 2차원 사진을 인쇄하지만, 3차원 프린터는 다양한 재료를 뿜어내면서 3차원 실물을 인쇄할 수 있다. 인쇄의 차원을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올림으로써 실제 3차원 입체 제품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3차원 입체 인쇄 기술은 일반인들에게는 낯설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3차원 프린터는 이미 기술자들에게는 히트 제품이 되고 있다. 어떤 기술자는 자신이 고안한 공간 절약형 엔진 부품의 플라스틱 견본 몇가지를 3차원 프린터로 재빨리 만들어서 예상대로 잘 맞는지 즉시 확인하고 있다. 미 육군은 트럭에 설치된 3차원 프린터로 차량 부품을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이 기술은 부품 고장으로 오도가도 못하는 운전자가 현장에서 3차원 프린터로 부품을 만들어 수리할 수 있게 해준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우주 공간에서 3차원 인쇄 시험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무중력 상태에서 3차원 인쇄 시험이 성공했고, 이제 3차원 프린터는 우주비행선 발사만을 기다리고 있다. 3차원 프린터가 우주 공간에서도 제대로 작동을 한다면 우주비행선에서 필요한 부품을 직접 우주 공간에서 제조할 수 있게 된다. 지상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부품을 조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3차원 인쇄 기술은 전자제품과 생체물질을 만들어내는데도 활용될 전망이다. 미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은 압력을 가하면 전기가 만들어지고 전기를 가하면 압축되거나 구부러지는 특수 폴리머를 사용해 전기가 가해지면 구부러지는 로봇용 인조근육을 만드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올해 초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의대 블라디미르 미로노프 박사는 3차원 프린터로 생체물질을 뿜어내 혈관과 같은 3차원 튜브조직을 합성했다.
3차원 구조를 만들기 위해 생체물질과 함께 특수 겔을 층층이 교대로 인쇄했다. 생체물질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융합한다. 특수 겔은 20℃ 이하에서 액체, 32℃ 이상에서 고체가 되는 특성이 있다. 생체물질은 고온에서 고체 겔의 틀 안에서 융합한 후 다시 온도를 낮춰주면 겔이 액체로 빠져나가 3차원 생체조직만 남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 방법을 이용해 동맥, 정맥, 모세혈관뿐만 아니라 콩팥과 같은 큰 생체조직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이처럼 3차원 인쇄 기술은 시제품에서부터 전자, 생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되기 위해 연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조만간 일반인도 3차원 인쇄 기술의 스릴을 체험할 수 있는 날이 올 전망이다. 자신만의 상품을 온라인 쇼핑몰에서 디자인을 내려받아 직접 완성한다거나 할머니가 인터넷에서 안경을 고른 후 몇가지 주문사항을 입력하기만 하면 거실에 있는 3차원 프린터로 새 안경을 만들어서 바로 쓰고 다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3차원 인쇄는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3차원 인쇄 과정은 먼저 ‘3차원 제품 지도’에서 시작한다. 이 지도는 제품 디자이너가 컴퓨터설계(CAD) 프로그램을 사용해 그리거나 3차원 스캐너를 이용해 디지털 정보로 제작된다. 이 지도는 응용 프로그램의 분할 알고리즘에 의해 여러 층의 평면 지도로 나뉘어 각 층의 지도 정보를 3차원 프린터에 보낸다.
3차원 정보를 평면으로 분할
3차원 인쇄 기술은 미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3D시스템즈사의 사장인 찰스 홀이 1984년 최초로 발명했다. 그는 이 기술에 ‘입체 인쇄술’(stereolighography)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기술은 자외선을 쪼이면 딱딱하게 굳는 특수 액체 폴리머를 사용한다. 통에 담긴 액체 폴리머 표면을 레이저 광으로 스캔해 제품 성형을 위한 기층을 만든다. 이 층을 액체 폴리머 속으로 적당한 깊이로 가라앉힌 후 레이저 광을 쪼여 다음 층을 만든다. 이 과정은 제품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된다.
다른 3차원 인쇄 방법은 액체가 아니라 분말을 단단한 고체로 만드는 소결과정이 포함돼 있다. 먼저 금속, 세라믹, 나일론 등의 분말로 된 얇은 층을 만든다. 제품 지도에 그려진 위치에 레이저 광을 쪼여주면 그 위치의 분말이 녹아서 고체가 된다. 그러면 찰스 홀의 입체 인쇄술과 마찬가지로 기판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진다. 이 위에 또다른 분말 층을 쌓고 롤러로 평평하게 편 다음 레이저를 쏘아주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제품이 완성될 때까지 반복한 후 녹지 않은 분말들을 제거하면 완성된 제품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들 기술보다 전자제품 가게에 첫선을 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3차원 인쇄 기술은 잉크젯 프린터를 응용한 경우다. 2차원 잉크젯 프린터가 잉크를 뿌리는데 반해, 3차원 잉크젯 프린터는 뜨거운 액체 플라스틱 방울들을 뿜어낸다. 이 액체 플라스틱이 식으면서 딱딱하게 굳어져서 한층 한층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간다.
실제로 1989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팀은 기존의 3차원 인쇄 기술인 소결, 접착과 함께 액체방울 기술을 결합해 3차원 잉크젯 기술을 개발했다. 미세한 접착제 방울들을 분말층 위 정해진 위치에 정확하게 뿌려서 분말끼리 붙인다. 이 위에 분말을 얇게 뿌린 후 롤러로 펴서 또다른 분말층(여기서 분말층은 다른 분말층을 지지하는 역할도 한다)을 만들고 접착제를 뿌린다. 모든 층의 작업이 완료된 후 접착제를 뿌리지 않아 붙지 않은 분말을 불어내면 완성된 제품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개된 3차원 인쇄 기술들은 한가지 재료로만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어 흑백 프린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Z코퍼레이션은 세계 최초로 3차원 컬러 프린터를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MIT의 잉크젯 기술을 기반으로 컬러 잉크를 접착제 방울에 추가한 것이다. 컬러 접착제는 분말 낟알들 사이의 미세한 공기 틈으로 스며들어 완제품에 다채로운 색깔을 입힌다. 특히 이 3차원 컬러 인쇄 기술은 3차원 다중재료 인쇄 기술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 3차원 인쇄 기술은 건축, 자동차, 항공우주, 의료, 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제품 제작에 활용되고 있다. Z코퍼레이션의 경우 모토롤라, 소니, 포드, 보잉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을 고객으로 하고 있다.
3차원 다중재료 인쇄 기술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제품 디자인을 부피 픽셀인 수많은 복셀(voxel)들로 나눈 후 디자인의 각 위치에 3차원 프린터가 어떤 재료를 뿌릴지 정확하게 지정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도전을 극복해야 한다. 첫번째 도전은 엄청난 정보의 양이다. 3차원 모형의 각 복셀에 대해서 선택해야 할 색깔은 수백만 가지가 넘고 지정해야 할 재료는 50종 이상이다. 이 경우 디자인 파일의 크기는 놀랄 만큼 커지는데 이것도 단지 첫번째 층만 말한 것이다. 3차원 인쇄는 층층이 물건을 만들기 때문에 최종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천개의 파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험난한 도전의 시작일 뿐이다. 고체 안에 여러가지 재료를 넣으려고 하면 각 재료가 어디에 놓일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문제를 초래한다. 게다가 문제는 데이터 양에서 끝나지 않는다.
두번째 도전은 재료의 성질인 물성의 차이이다. 모든 인쇄 공정에는 가열과 냉각이 포함된다. 유사하지 않은 재료들은 열팽창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냉각과정에서 금이 가거나 쪼개질 수 있다. 이 기술의 개발자들은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세라믹과 금속들을 조합해보면서 재료 결합의 기본 성질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물성을 갖는 재료끼리 결합하는 것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또는 예전엔 전혀 몰랐던 물성을 지닌 신물질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이 일을 하는데는 이 물성을 지닌 재료를, 저 일을 하는데는 저 물성을 지닌 재료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 러트거스대의 스테판 댄포드 박사 연구팀이 택한 접근법이다.
그들은 조성에 따라 절연체, 반도체 또는 완전한 도체가 될 수 있는 세라믹 재료를 갖고 3차원 인쇄 기술로 전자 부품들을 만들어왔다. 이것은 전자 시스템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컴퓨터의 새 주기판을 인쇄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제품과 필요한 선택사항을 고른 후 새 주기판을 맞춤 설계하고 온라인으로 대금 결제를 한 후 디자인을 내려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결과에 만족하면 인쇄 버튼을 눌러 최신 세라믹 전자제품을 눈앞에서 받아본다. 이는 제품이 집으로 배달되는 시간보다 훨씬 짧다.
댄포드의 연구팀은 센서와 엑츄에이터 같은 전기기계 부품들을 3차원 인쇄하기 위해 세라믹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0.2mm 크기의 해상도로 인쇄할 수 있다. 이들은 콘덴서, 저항체, 도체 그리고 심지어 배터리 재료로 기능할 수 있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제품배달은 초고속 인터넷망이 담당
이러한 신기술은 지금의 제조산업을 확 바꿔놓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구입하는 대신 CAD 프로그램으로 설계해서 곧바로 프린터에 보내면 인쇄돼서 책상 옆에서 나오거나 지구 반대편 사무실의 고객이 즉시 받아볼 것이다.
이렇게 3차원 인쇄 기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제품을 즉각 만들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품 지도에 포함된 최적화된 설계를 통해 제품의 미소구조가 세심하게 제작되기 때문에 현재의 주형 제품들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가벼워진다. 이 최적 설계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구조일 수도 있지만, 3차원 인쇄 기술을 사용하면 이러한 한계는 사라진다. 제품의 내외부의 모양만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기적, 기계적, 열적 성질까지 고려해 설계할 수 있다. 또한 재료를 있어야 할 곳에 꼭 필요한 양만큼 사용함으로써 제품의 무게를 최소화할 수 있다.
3차원 인쇄 기술은 소비자들의 제품 구매 과정에서 제조 업체와 배달 업체를 모두 필요없게 된다. 공장의 조립라인과 작업 노동자의 역할을 3차원 프린터가 대신하고,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와 배달 업체 직원의 역할을 초고속 인터넷망이 대신함으로써 제조 혁명과 유통 혁명이 일어난다. 이는 단순직 노동자의 수요를 급격히 떨어뜨리는 대신 예술이나 과학기술로 무장한 지식 노동자의 전문 지식과 창의력을 더욱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3차원 인쇄 기술과 3차원 프린터는 일반인들의 생활로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모두가 3차원 프린터를 갖고 싶어하고 모든 집에 3차원 프린터가 있을지도 모른다. TV 광고에는 최신 휴대전화를 수분만에 제작할 수 있는 첨단 3차원 프린터가 나오고 저녁 뉴스에는 첨단 생체조직 프린터로 만든 콩팥을 돼지에 이식하는 연구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미래에는 지금의 잉크젯 프린터처럼 3차원 프린터가 흔해서 당장은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2013년의 한 가정의 생활 모습’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