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정말 빅뱅(big bang대폭발)으로 시작했을까? 최근 빅뱅 이전에 급팽창 (인플레이션)이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38억 년 전 하나의 특이점에서 시작된 우주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급팽창한 뒤, 우주 나이 38만 년 즈음 빅뱅의 순간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 빅뱅을 ‘뜨거운(hot)’ 빅뱅이라 구분지어 부른다. 과연 뜨거운 빅뱅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힉스가 중요한 단서다.
전통적인 빅뱅 우주론은 우주가 매우 뜨겁고 밀도가 높은 상태에서 진화를 시작했다고 본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니 과거에 우주는 더 작았으며, 밀도와 온도가 높았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한 가정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 대한 추론까지 가능해진다. 빅뱅 뒤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우주의 온도가 원자의 결합에너지와 유사한 정도로 떨어진다. 그러자 플라스마 상태이던 원자핵과 전자가 결합해 중성인 원자가 생성된다. 그리고 플라스마 속에 갇혀 있던 빛은 자유롭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 빛은 오늘날 우주배경복사에 남아 있다.
우리에겐 급팽창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공적인 이론의 이면에는 큰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이른바 ‘지평선 문제’다. 우주배경복사를 보면 우주의 어느 방향이든 온도가 동일하다. 입자 분포도 우주 전역에 균질하다. 이는 우주배경복사가 만들어질 당시 서로 빛으로도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던 지역들이 똑같은 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마치 한 번도 소통한 적 없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이 우연히 똑같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물을 지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우주 초기에 원자가 생성되기 시작한 시점 이전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입자들이 이상하리만큼 관측이 안 된다. 자기홀극(magnetic monopole)이 대표적이다. 자기홀극은 자기의 S극 또는 N극이 홀로 존재하는 자기의 ‘전하’로, 초기 우주가 차갑게 식으면서 물질들의 대칭성이 깨져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고심하던 물리학자들은 원자가 생성되기 시작한 뜨거운 빅뱅(우주 나이 38만 년) 이전에 급팽창이 있었을 것이라는 답을 내놨다. 우주배경복사 상에선 우주의 끝과 끝에 해당하는 지점이 급팽창 이전에는 인접해 있었고, 급팽창을 겪으며 밀도가 형편없이 낮아져 자기홀극과 같은 입자들을 실험실에서 발견할 수 없게 됐다는 설명이다.
급팽창을 일으키는 원인도 생각해냈다. 시공간이 팽창하는 속도는 시공간의 에너지 밀도가 결정한다. 에너지 밀도가 높으면 빠르게 팽창한다. 급팽창이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팽창이 일어나는 중에도 시공간의 밀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물리학자들은 시공간에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는 ‘인플라톤(inflaton)’ 장이 스며들어 있다고 추론했다.
힉스가 과연 인플라톤일까
2012년 7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 강입자 충돌기(LHC)에서 힉스가 발견됐을 때 필자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힉스가 인플라톤 역할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우리는 힉스의 질량이 125 GeV(기가전자볼트)임을 실험적으로 측정해냈다. 우리는 이것과 기존에 알려져 있는, 진공에서 힉스 장이 갖는 기대값(246 GeV)을 고려해 힉스 입자들끼리 상호작용할 때 결합세기를 계산했다. 힉스끼리의 결합세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결합세기에 힉스가 중력이 얼마나 상호작용하는지(표준모형을 이용해 계산한다!)를 합치면 힉스 장의 에너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아낸 힉스 장의 에너지는 놀랍게도 거의 일정했다. 힉스 입자가 가진 에너지에 따라 힉스 장의 에너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래프로 그려보니, 힉스 입자의 에너지가 매우 큰 상황 즉 초기 우주 상황에서 평평한 모양을 보였다. 시공간의 변화에 관계없이 일정한 에너지 값을 갖는 인플라톤 장의 특성이다. 실제로 우주 초기 힉스 장이 작용했다고 가정하고 우주의 팽창률을 계산했을 때, 우주는 급팽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것만으로 힉스가 인플라톤임을 100% 확신할 수는 없다. 힉스끼리의 결합세기를 이론적으로 계산했을 뿐, 아직 정확히 측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측정하려면 힉스를 잔뜩 만들어서 서로 충돌시켜야 한다. 일본의 국제선형가속기 (ILC,International Linear Collider), 중국의 원형전자반전자충돌기 (CEP, Circular Electron Positron Collider), 유럽의 미래원형충돌장치 (FCC, Future Circular Collider) 등의 미래형 입자가속기를 건설하려는 첫번째 목표가 바로 이것, 힉스의 결합세기를 직접 측정하기 위해서다. 한편 힉스 장의 에너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힉스와 가장 강하게 결합하는 소립자인 톱쿼크의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실험도 중요하다.
암흑물질의 기원도 어쩌면 힉스
초기 우주의 양자요동은 급팽창을 거치며 거시적으로 커졌다. 이것은 별, 은하, 은하단 등 우주의 모든 종류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씨앗이 됐다. 힉스가 인플라톤이라면, 힉스 장의 양자요동이 증폭돼 지금과 같은 우주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힉스 장의 양자요동이 증폭되면 중력파를 방출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관측한 중력파는 모두 블랙홀끼리 합쳐지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특정 블랙홀이 위치한 지점에서 관측됐다. 하지만 우주 초기 급팽창 시기에 힉스의 양자요동이 증폭돼 중력파가 만들어졌다면, 이것은 마치 우주배경복사를 보듯이 우주 전체에 퍼져 있을 것이다. 이런 중력파가 존재한다면 힉스 장이 우주 초기 급팽창의 원인이라는 간접 증거가 된다.
최근에는 힉스 장의 양자요동 크기가 충분히 커지면 원시 블랙홀로 진화할 수 있다는 연구도 나왔다. 흔히 블랙홀은 무거운 별이 수명이 다하고 중력수축하면서 만들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영역에 에너지가 많이 축적되면 중력장이 세지고 빛이 더 이상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만약 힉스 장이 급팽창 시기에 원시 블랙홀을 만들었다면, 역시나 우주배경복사처럼 원시 블랙홀 입자들이 우주 전공간에 퍼져 있을 것이다. 우주에 퍼진 무겁고 안정적이며 빛을 내지 않는 입자. 바로 암흑물질의 특성이다. 힉스 연구가 더 이뤄지면 암흑물질의 강력한 후보인 원시 블랙홀의 미스터리도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을까.
우리는 우주론과 입자가속기 물리학을 동시에 고려해야만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 들었다. 아니, 둘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게 됐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20세기에 뿌린 씨앗이 21세기 우주의 최초 모습을 연구하는 토대가 된 것처럼, 이 토대에서 발전한 물리학이 새로운 발견의 전기가 될지 모른다. 모르는 영역에 들어가는 것만큼 지적으로 흥분되는 일은 없다. 힉스 입자가 그 길을 열어주고 있다.
※필자소개.
박성찬.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여분차원의 물리현상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코넬대, 일본 도쿄대 우주물리수학연구소(IPMU)에서 연구했으며 2010년 일본 소립자물리학회가 수여하는 젊은 이론입자 물리학자 상을 받았다. 우주선과 암흑물질, 초기 우주의 힉스 인플레이션을 연구하며, 궁극의 물리학 이론을 찾고 있다. sc.park@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