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힘껏 꼬리로 헤엄친 정자는 어둡고 축축한 자궁 안을 지나 난자에 도달한다. 정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한 번 더 쥐어짜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막을 뚫는다. 교과에서 배우는 우리 모두의 역사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과거는 이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 최근 새롭게 알려진 사실도, 그간 잘못 알려진 오해도 있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 관한 최신 연구를 주요 장면별로 모아봤다.
Scene#1정자의 경주
2억~3억 개 정자가 남성의 생식기 밖으로 배출됐다. 목표는 하나. 난자까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이다. 여성의 자궁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몸 전체를 비틀며 물가를 헤엄치는 수달과 비슷하다.
●꼬리를 한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정자
1677년 네덜란드 과학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자신의 정자를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는 정자의 꼬리 운동이 ‘채찍질(lashing)’과 비슷하다고 묘사했다. 정자는 올챙이처럼 좌우 대칭으로 꼬리를 흔들며 전진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실제 정자의 움직임이 레인우엔훅이 묘사한 모습과 다르다는 연구가 속속 나오고 있다. 2015년 데이비드 신턴 캐나다 토론토대 기계 및 산업공학부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도 그중 하나다. 연구팀은 형광현미경으로 용기에 담긴 용액에서 정자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용액 속에서 정자는 꼬리를 한쪽으로 회전하며 움직였다. 전진하는 정자와 마주한 채로 움직임을 보면 꼬리는 동그란 원을 그리며 다가온다. 다만 용기 표면 근처에서는 정자의 움직임이 레인우엔훅이 묘사한 채찍질과 비슷해졌다. 표면과 1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 이내로 떨어진 위치에서 운동할 때는 회전 움직임이 줄고 꼬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3차원이었던 움직임이 2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헤엄치는 유체의 점성이 20mPa·s(밀리파스칼세컨드) 이상으로 높아져도 회전 운동이 줄어들었다. doi: 10.1038/ncomms9703
영국 브리스톨대와 멕시코국립자치대 공동 연구팀도 올해 7월 정자의 운동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건강한 성인 남성으로부터 사정된 지 48시간이 넘지 않은 신선한 정자를 초당 8000번 촬영할 수 있는 3차원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정자는 꼬리를 한쪽으로만 회전하며 움직였다.
해당 연구에서는 정자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해석했는데, 이 과정에서 머리의 움직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2015년 토론토대의 연구는 정자가 좌우로 머리를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로 꼬리의 나선형 운동이 일으키는 비대칭을 감쇄하기 위해 정자의 머리가 꼬리운동의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doi: 10.1126/sciadv.aba5168
이번 연구는 앞으로 남성의 불임 치료에도 활용될 수 있다. 계명찬 한양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정자의 운동성 저하는 남성 불임의 원인 중 하나”라며 “이번에 밝혀진 정자의 운동을 토대로 운동성이 떨어진 정자를 분석하면 정자의 운동성을 떨어뜨리는 원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cene#2 난자를 향해 가는 중
정자가 난자까지 이동해야 하는 거리는 약 15cm. 머리에는 에너지 공급원을 장착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지친 정자는 자궁 내벽의 구덩이에 잠시 몸을 누이고 에너지를 보충한 뒤 내벽을 따라 기어간다.
● 방향 전환 시 벽을 기어가는 정자
정자의 여정은 험난하다. 첫 문턱인 질은 산성 환경이고 이를 넘어서도 자궁 경부의 점액을 뚫어야 한다. 자궁 경부에 들어서면 곳곳에 백혈구가 기다리고 있다. 백혈구는 외부에서 들어온 정자를 항원으로 인식하고 잡아먹는다.
정자는 머리 부분에 있는 미토콘드리아가 생산하는 생체 에너지인 ATP(아데노신삼인산)를 에너지원으로 운동한다. 이 과정에서 정자는 에너지를 일정하게 만들어내지 않는다. 수정 시 필요한 에너지를 남겨두기 위해 때로는 자궁 내벽에서 휴식하기도 한다. doi.: 10.1111/j.1365-2605.2011.01218.x
계 교수는 “정자가 쉼 없이 난자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흔한 오해”라며 “험난한 여정에 지친 정자는 이동을 멈추고 자궁 내벽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찾아 잠깐 휴식을 취히기도 한다”고 말했다. 휴식을 취하는 정자는 난관에서 분비되는 난관액으로부터 포도당, 젖산, 단백질 및 다당류를 공급받는다. 이는 정자가 에너지를 생성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
정자가 구불구불한 자궁 내벽에서는 기어간다는 연구도 있다. 영국 버밍엄대와 워릭대 공동 연구팀은 정자를 머리카락처럼 얇은 관에 두고 움직임을 관찰했다. 곡선으로 구불구불한 관, 직각 모퉁이가 있는 관, 원형 관 등 방향이 바뀌는 여러 관을 준비해 정자가 어떻게 통과하는지 분석했다.
방향이 바뀌는 구간에서 정자는 관 중앙부가 아닌 관 벽을 따라 이동했다. 곡률반지름(곡률의 역수)이 150μm 이하인 급격히 구부러지는 부분에서는 정자가 관 벽을 이탈했으며, 반대편 벽에 부딪힐 때까지 직진했다. doi: 10.1073/pnas.1202934109
연구의 제1저자인 페트르 데니센코 워릭대 교수는 “정자들이 우사인 볼트처럼 최단 코스로 빠르게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충돌을 거듭하고 벽을 따라 기어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며 “자궁 내벽의 구불구불한 모양은 뛰어난 정자를 걸러내는 트랙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Scene#3정자와 난자의 조우
여성은 약 500만 개의 난자를 지니고 태어난다. 한 달에 한 개씩 난소에서 탈출한 난자는 주변을 서성대는 정자 중 건강한 아이를 탄생시킬 수 있는 정자를 꼼꼼히 고른다. 정자가 난자의 투명대를 뚫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정자를 꼼꼼하게 고르는 난자
수정 과정은 보통 ‘정자의 험난한 여정’을 중심으로 설명돼 왔다.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난자의 투명대를 뚫어낸 단 하나의 정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레이스처럼 말이다. 마치 난자는 수동적 존재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난자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정자가 자궁에 도착했을 때부터 난자 가까이 올 때까지 가장 건강한 정자를 꼼꼼하게 고른다.
올해 8월 주카 케켈레이넨 핀란드 이스턴핀란드대 환경 및 생명과학부 교수팀은 여성의 생식 분비물이 정자의 생존 능력을 결정한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여성 9명에게서 얻은 자궁 경부의 점액과 남성 8명의 정자를 결합했다. 그리고 각 여성과 남성의 인간백혈구항원(HLA) 유전자를 분석했다. HLA는 모든 세포의 표면에 위치해 인체가 자신과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비자기 물질)을 구별하는 분자 집단이다.
연구결과 자궁 경부 점액과 정자의 HLA 유전자형 차이가 클수록 정자의 생존 확률이 높았다. 또한 운동성과 생존 확률을 종합해 정자의 성능을 평가한 결과, 여성의 자궁 경부 점액은 정자의 성능을 최소 8.5%에서 최대 32.3%까지 좌우했다.
케켈레이넨 교수는 “(정자와 난자의 만남이) HLA의 다양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진화한 이유는 자손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서일 것”이라며 “여성의 자궁 경부 점액이 일부 수컷의 정자의 생존 확률을 높이거나 낮춰 수정 과정에 개입한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doi: 10.1098/rspb.2020.1682
난자가 수정 과정에서 특정 정자를 선택한다는 연구는 6월에도 발표됐다. 존 피츠페트릭 스웨덴 스톡홀름대 교수팀은 정자가 난포액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난포액은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과립세포가 분비하는 액체로, 정자를 끌어들이는 화학 물질을 내뿜는다. 연구팀은 각기 다른 난포액을 두고, 어느 난포액에 정자들이 모이는지 관찰했다. 이중에는 실제 커플의 난포액과 정자도 있었다.
관찰 결과, 난포액마다 끌어들이는 정자가 달랐다. 그리고 한 남성의 정자가 두 가지 난포액에 동시에 모이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선택은 여성과 남성의 파트너 선택과는 무관했다. 실제 관계와는 무관하게 난자가 선호하는 정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doi: 10.1098/rspb.2020.0805
피츠페트릭 교수는 “이번 연구는 여성의 파트너 선택이 수정 단계에서도 계속된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난자와 정자의 상호작용 연구는 수정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아 차의과대 의생명과학과 교수는 “난포액은 난자를 성장시키고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포들과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스톡홀름대의 연구로 추측해 보면 난포액에 난자가 정자를 선택하는 데 필요한 정보도 다수 담겨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