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4700개. 여성이 초경 후, 매달 7일씩 하루 5개, 평균 35년 동안 사용하는 생리대 개수다. 인류 절반의 생활을 책임지는 필수품이지만 기술적 발전은 크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 공학도 네 명이 모여 인체에 무해한 생리대 ‘이너시아’를 개발했다. 이너시아는 국내에서 ‘펨테크(female+tech)’가 주목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기업이다. 창업 이야기를 듣기 위해 9월 28일 서울 역삼동 팁스(TIPS)타운에서 김효이 이너시아 대표를 비롯해 이너시아 창립 멤버 고은비 최고전략책임자(CSO), 박지혜 최고운영책임자(COO), 이승민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만났다.
“30년 전 엄마가 쓰던 생리대와 지금 제가 쓰는 것이 별다르지 않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바꾸길 기다리기보단, 우리가 직접 나서기로 했죠.”
스스로를 민감한 소비자라 말하는 김효이 이너시아 대표가 생리대를 창업 아이템으로 꼽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생리통이 유독 심했던 김효이 대표는 늘 시중에서 좋다는 생리대만 골라 썼다. 그러나 생리통은 여전했다. 답답함을 느낀 그는 직접 생리대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생리대 소재, 물질 등과 관련된 논문과 문헌을 찾아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기존에 알던 것과 달라 충격을 받기도 했다.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도 실제 흡수력에는 차이가 없었죠. 피부에 닿는 면의 굴곡을 없애 마찰을 줄이는 게 오히려 피부에 덜 자극적이었어요. 보풀이 안 나는 제품이 있죠? 보풀 잡기 위해 그만큼 화약제품을 많이 쓰기도 해요. 오히려 보풀이 생기는 게 피부에 자극을 덜 준다는 이야기죠.”
생리대에는 미세 플라스틱 흡수체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미세 플라스틱이 피나 물을 머금으면 땡땡 불어 단단해진다. 여성 생식기 표면에 묻어 생리통을 유발할 수 있다. 이너시아는 미세 플라스틱 흡수체를 셀룰로오스 계열의 생분해 물질로 대체했다. 고은비 CSO는 “독성 화학물질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지혈할 때 쓰는 건데, 이를 물리적으로 가공해서 생리대에서도 쓰일 수 있게 만들었죠. 사용 방식에 따라 재질, 가공 모양, 분자 구조 등이 달라야 하기 때문에 가공 작업에 공을 들였습니다. 이런 시도 자체가 그간 생리대 업계에서는 거의 없었고, 설사 하더라도 가격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양자공학도와 생명과학도의 만남이 일으킨 시너지
ENTJ, ISTJ, ESFP, INFP. 넷의 MBTI다. 완전히 다른 성격과 성향을 가진 네 사람. 이들은 모두 대학원에 몸담았었는데, 넷이 속한 랩실도 모두 달랐다.
물리학을 좋아해 양자공학과에 진학했던 고은비 CSO는 의료 방사선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CT 영상 하드웨어를 만드는 연구실에 들어갔다. 김효이 대표는 이런 하드웨어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랩실에 있었다. 의료 인공지능(AI) 개발 등의 연구를 했다.
이승민 CTO는 생명화학공학과 출신이다. 생체 적합 플랫폼을 만드는 등 고분자를 이용해 물성을 변화시키는 연구를 진행했다. 박지혜 COO는 고온, 고압 등 특수 환경에서 나오는 에어로졸이 인체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연구했다. 이들은 KAIST 홍보대사 ‘카이누리’에서 만나 7년째 함께 해오고 있다. “일을 함께할수록 가치관과 지향점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며 서로의 공통점을 “뭐든 다 열심히 하는 것”으로 꼽았다.
연구에도 열정이 넘쳤던 이들이었으나, 모두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김효이 대표는 “반응속도 0.1초 줄이는 것이 학술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긴 한데, 우리에겐 크게 흥미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우리가 배운 기술로 우리에게 도움되는 걸 해보자’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네 사람이 차를 타고 이동하던 어느 날, 김효이 대표의 입에서 “창업하자”는 말이 나왔고, 이너시아의 항해가 시작됐다.
대학원생의 ‘짬바’는 창업의 양분이 돼
배운 기술을 어느 정도는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실 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예를 들어 연구실에서 그램(g) 단위로 필요했던 시료가 상품 실용화를 위해서는 톤(t) 단위로 필요했다. 시행착오와 생각의 전환이 끊임없이 이뤄졌다. 김효이 대표는 “실험실에서 쓰던 고급장비가 대량 생산 과정에서는 무용지물이 된 경우가 허다했어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돌파구를 찾았어요. 때로는 재료를 빻는 데 고급장비보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주방도구가 유용했죠.”
속된말로 대학원생의 ‘짬바’는 큰 자양분이 됐다. 일단 새로운 과학 논문을 찾고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물질별 안전성 구분은 자료를 찾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던 지식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밤새워서 작업하기 일쑤였는데, 이 또한 이공계 대학원생들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다. 박지혜 COO의 이야기다. “KAIST에 창업지원센터가 있는데, 한 번은 어떤 교수님이 새벽 4시부터 기계 돌리는 이상한 애들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바로 저희였죠.”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교수님께 도움을 청했다. 젊은 제자들의 도움을 거절할 스승은 없을 터. 김효이 대표는 “KAIST는 특히 창업한 교수님도 많고, 학교에서 창업을 권하는 분위기예요. 총장님도 창업하면 무기한 휴학도 가능하다고 말하셨죠. 그래서인지 교수님들도 창업한다면 응원해주시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죠.”
먼저 관심을 보내 준 교수님도 있다. 이승민 CTO는 “생분해 흡수체를 보고 생분해를 연구하는 교수님이 다음 스텝 개발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주셨다”며 “좋은 기술을 삶에 적용한다는 가치에 공감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용품’보다는 ‘여성의 일상’을 책임지고파
이런 신념 속에서 이너시아는 기술력과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두 건의 투자를 유치하며 2022년 제품을 출시했다. 4월에는 스위스 로잔연방공대가 주관하는 펨테크 육성 프로그램에도 선정됐다. 6월 진행한 와디즈 펀딩은 반응이 뜨거워 목표했던 금액의 202배를 모았다. 제품 런칭을 위해 1년 동안 하루 3시간씩 쪽잠을 자며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네 사람은 여전히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김효이 대표는 “흔히 펨테크 기업이라 하면 생리, 난임 등에만 집중한다”며 “우리는 여성의 일상 전체가 펨테크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먹고, 일하고, 자는 일련의 과정 모두가 기술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라고 본 것이다.
“단순히 생리대로 시작한 사업이니, 생리 주기 앱 등 생리와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잘까, 뭘 먹어야 건강할까, 피부에 바르는 화학물질은 안전할까 등에 질문을 던지며 넓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생리대 상품 개발도 꾸준히 진행하면서요.”
김효이 대표는 “건강 관리와 관련된 다양한 브랜드를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SNS에서 효소, 다이어트 약품 등을 많이 파는데 단기적 효과를 위해 유해한 약품을 넣거나, 효과를 과장해 홍보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유사과학 영역에 있는 소비재도 과학으로 채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