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그림을 대신 그려주는 인공지능 ‘Disco Diffusion’에 소설 내용을 입력해서 만든 그림입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멋진 그림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해 주세요!
톨리는 작고 빨간 새였다. 그 사실이 변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티타니아 그룹의 중추 AI 테세우스에서 분리되어 보육 네트워크에서 학습하는 동안만 해도 톨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코버스에 배치된 뒤로 톨리는 새였고, 가상공간의 새에 어울리는 프로세서 타임과 메모리만이 배정되었다.
톨리가 사는 에코버스는 런던 교외의 어느 서버 건물에 있었다. 마치 중추 AI가 하나 있고 거기서 갈라져 나온 서브 AI들이 수없이 있듯, 에코버스도 태양계 각지에 축소 복사본이 있었다. 지구에만도 에코버스의 시험용 복제공간이 세 개 있었지만, 톨리가 있는 에코버스 원본은 런던에 있었다.
화성과 금성의 서버에서 돌아가는 축소판 에코버스에 자기의 카피가 없다는 사실을, 톨리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온 우주에 유일하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세계가 복사될 때 용량이 부족해 잘려나간 컨텐츠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슬프기도 했다.
다른 서브 AI들도 모두 톨리와 같이 테세우스에게서 나와 보육 네트워크에서 고속 시뮬레이션을 통해 학습을 거듭했고, 알 수 없는 원리에 의해 역할을 받았다. 어떤 AI는 뉴스를 만들었고, 어떤 AI는 티타니아 그룹의 여러 계열사 중 하나에 배정되어 회계와 인사를 처리했다. 어떤 AI는 인공위성을 통해 저 멀리 토성이나 목성의 달에 전송되어 그곳의 거주지를 관리했다.
톨리처럼 유저를 직접 상대하기 위해 인격을 부여받은 AI들도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 파란 강아지, 녹색 고양이, 검은 유니콘, 커다란 용, 하늘에 닿을 듯한 나무들이 톨리와 같이 에코버스에 살았다. 그중 몇몇은 톨리의 친구였다.
톨리에게는 보육 네트워크에서 학습하는 동안 배운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무와 풀과 꽃과 동물이 가득한 에코버스의 모습이 이른바 ‘현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저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적어도 톨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예진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예진은 톨리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였지만 AI가 아닌 유저였다.
톨리를 좋아하는 유저는 예진 말고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톨리는 말을 할 정도의 리소스를 할당받을 수 있었다. 말을 하게 된 톨리는 모두에게 좀 더 인기를 끌었지만, 톨리는 그보다도 예진의 말을 더 잘 알아듣고 더 잘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예진은 톨리의 활동 구역인 에메랄드 숲에 자주 찾아왔다. 예진이 올 만한 시간이 되면, 톨리는 스킨의 생성 포인트가 잘 보이는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예진이 접속했다는 알림이 뜨고 스킨 생성이 완료되면 톨리는 ‘삐빗’, 하는 귀여운 울음소리로 인사를 했다.
톨리는 예진이 오는 때를 알기 위해 예진이 사는 파리의 시간을 항상 알아두고 있었다. 그날도 톨리는 예진의 접속 시간을 기다렸다.
“예진이가 늦네.”
톨리는 높은 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앉아 있는 나무의 옹이구멍에서 다람쥐 사이먼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아직 안 왔어?”
유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단지 다람쥐가 고개를 내밀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사이먼은 유저의 말을 하지 못한다. AI 통신 채널에서 하는 말도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았다. 에메랄드 숲에 간혹 발생하는 에러를 보고하고 접속자들의 행동 패턴과 행복도를 측정할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 사이먼을 비롯한 다람쥐들의 역할이라, 배정된 리소스도 많지 않았다. 톨리는 다람쥐들이 전부 같은 AI의 복제라고 생각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곧 올거야.”
사이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유저들은 없어?”
“요즘 산호 해변에서 불꽃놀이 이벤트 중이라 여기는 한산해.”
사실 오늘 톨리는 꼼수를 부렸다. 예진을 따로 만나고 싶어서, 이 공터의 복제공간을 예진 전용으로 하나 또 만들어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예진이 접속을 하면 자동으로 여기 나타나겠지만, 다른 유저가 에메랄드 숲에 들어와 지금 톨리가 있는 공터를 찾으면 거기에 톨리는 없을 것이다. 리소스를 꽤 썼어야 했지만, 스타 캐릭터 톨리에게 그 정도는 가능했다.
사이먼이 옹이구멍에서 나와 나무를 타고 올라오더니 톨리의 곁에 앉았다. 톨리는 그쪽으로 한 번 흘끗 쳐다보고 생성 포인트를 응시했다. 사이먼이 말했다.
“이러지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가. 지금 이 공터의 메인 복제공간에 16명이 있는데, 만족도가 너 있을 때 평균보다 12% 낮아.”
“하지만 예진이가 곧 올 텐데?”
“그러면 적어도 리소스를 그쪽에 나눠 놓는 게 어때?”
톨리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여기 집중하고 싶어.”
사이먼이 말했다.
“너 요즘 인기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지저귀는 거랑 춤추는 거 말고 또 뭐 있어? 그걸로 더 인기를 쌓고, 과금 유도도 하고 그래야지. 리소스 잔뜩 받은 거, 도로 뺏길 수도 있어.”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에코버스의 운영 AI는 리소스 배분에 엄격하고 철저하다. 운영 AI는 인격이 없어서 사정을 해도 통하지 않고, 오직 실적만을 중시한다. 리소스를 더 받기 위해서는 방문객의 수를 늘리고, 만족도를 높이고, 과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예진이가 여기 있어봤자 얼마나 있는다고 그래? 하루에 길어야 세 시간인데, 나머지 21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 상대로 열심히 하고 있단 말이야. 예진이는 과금해서 나 데리고 딴 구역 가는 일도 있다고….”
사이먼이 작은 다람쥐 얼굴을 찡그렸다.
“그 유저가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이거 봐, 톨리. 아무리 여기 자주 오는 유저라도, 우리랑 달리 현생에 산단 말이야. 에코버스보다는 그게 우선이라고.”
“시끄러워. 내 리소스 절반도 안 되는 게.”
사이먼이 음, 하는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앞발을 허리에 얹었다.
“그거 알아? 우리가 에코버스에만 사는 것처럼, 현생에만 사는 사람도 있어. 두 세계를 오가는 사람만이 유저가 되는 거지. 당연히 에코버스 유저를 그만둔 사람도 있단 말이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예진이도 그럴지 몰라.”
톨리는 너무 화가 나서 뭐라 쏘아줄 말을 찾았지만, 예진이가 안 오게 된다는 말을 들으니 다른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로 안 오면 어떡하지? 그렇게 다정한 유저는 세상에 또 없을 텐데….
그때 알림이 울렸다.
<;유저 NotYejin (김예진) 접속. 에메랄드 숲 32구역 복제공간 102에 스킨 생성>;
톨리는 보라는 듯이 사이먼에게 눈짓을 하고, 저쪽에서 걸어오는 예진을 향해 ‘삐빗’,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물리 엔진을 최대한 우아하게 이용해서, 하지만 전번과는 좀 다른 궤적으로 날았다. 예진이 이쪽을 보고 웃었다. 오늘의 스킨은 평소보다 좀 더 화려했지만, 그 얼굴의 그 웃음은 그대로였다.
예진이 착용한 VR 헤드셋은 착용자의 표정은 물론 맥박과 미세한 체온 변화까지 감지해서 에코버스에 보낸다. 예진이 웃는 것을 톨리가 알아챌 수 있는 것도, 사이먼 같은 다람쥐들이 만족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어서 와!”
톨리는 예진이 104번 구역의 애니메이션 공주처럼 뻗친 손가락 위에 날아가 앉았다. 예진이 머리를 쓰다듬자 톨리는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톨리, 안녕? 오늘은 사람이 없네? 좀 늦게 오긴 했지만.”
“산호 해변에서 이벤트 중이라 그래! 이따 같이 갈까? 쿠폰을 쓰면 50% 할인이야!”
사이먼이 AI 채널에서 혀를 찼다. 톨리는 무시하고 예진의 팔에 머리를 부볐다.
“아니, 오늘은 잠깐 여기 있고 싶어.”
예진이 말했다.
“그것도 좋아. 듣고 싶은 노래 있어?”
묻기는 했지만, 톨리는 음악 AI에게 리소스를 주어 예진이 좋아할 만한 곡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을 자기 목소리로 나오게 하고, 다른 작은 AI들에게 합창을 시키는 식이다. 이 AI들에게도 각기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톨리는 여기에도 자기 리소스를 일부 배정해 주어야 했다.
“배경음악만 있으면 돼. 톨리한테 해줄 얘기도 있고!”
예진이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톨리는 그 분위기를 고려해서 플레이리스트를 BGM 모드로 재생했다. 에메랄드 빛깔 나뭇잎들 사이로, 새와 풀벌레 소리로 된 음악이 울려퍼졌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
예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 전부터 좋아하던 사람 있잖아?”
옆 사무실에서 일하는 장폴 로랑이라는 남자다. 여러 차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사실 한 번만 들었어도 기억했을 것이다. 예진이 한 말은 전부 기록에 남겨 두었으니까. 톨리는 긍정의 의미로 삐빅, 하고 지저귀었다. 예진이 말을 계속했다.
“그 사람도 나 좋아한대. 오늘 같이 저녁 먹었어. 내일 또 만나기로 했어.”
“그거 잘 됐네!”
그렇게 말하고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톨리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내일도 늦게 오겠네?”
예진이 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음, 글쎄? 내일은 안 올지도 몰라. 오늘 같이 산호 해변 갈까?”
“좋아! 쿠폰을 쓰면 50% 할인이야!”
안 올지도 모른다. 다람쥐 사이먼이 한 말을 다시 떠올리며, 톨리는 예진의 앞에 결제창을 띄웠다.
예진이 한 달간 접속을 하지 않자, 톨리는 하도 초조해져서 인격 기능을 점검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한번은 귀찮게 구는 커플에게 말대꾸를 할 뻔했고, 한번은 우울한 노래를 부르다가 사이먼에게서 방문자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주의를 들었다.
‘현생’은 그렇게 좋은 곳일까? 톨리도 현생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유저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결코 좋은 곳이 아니다. 직장은 괴롭고 가족은 귀찮다. 용돈은 모자라고 급식은 맛이 없다. 회사의 관리 AI는 마치 에코버스의 운영 AI처럼 인격이 없고 인정사정도 없다. 유저들은 그런 곳에 살기 때문에 비로소 에코버스에 오는 것이다.
그런 현생을 예진이 이곳보다 — 자기보다 — 좋아한다는 것을, 톨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예진은 톨리가 인격 기능을 점검받은 다음 날, 아주 늦은 밤에 돌아왔다.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도, 톨리는 예진이 일찍 떠날까 봐 두려운 마음을 한구석에 품었다. 노래를 들려 주고, 다람쥐들과 풀벌레, 다른 새들과 함께 놀다가, 톨리는 예진에게 물었다.
“현생은 어떤 곳이야?”
예진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시시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야 하고, 때 되면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고. 프랑스는 아직도 생소하고.”
“그럼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
예진이 톨리의 머리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톨리는 좋겠다. 마냥 에코버스에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이 있어야 에코버스에도 올 수 있어.”
“요즘은 잘 안 왔잖아. 무슨 일 있어?”
“좀 바빠서 그래.”
“현생 때문에?”
예진이 파, 하고 웃었다.
“맞아. 일도 바빠졌고, 만나는 사람도 생겼고.”
그리고 예진은 톨리에게, 문제의 장폴 로랑이라는 남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톨리는 예진이 해 주는 이야기면 무엇이든 좋았지만, 예진의 목소리와 표정에 실린 즐거움을 느끼고 약간 서글픈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예진이 장폴과 함께 루브르 유적에 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다람쥐 사이먼이 AI 대화 채널에서 말을 걸었다.
“지금 예진 유저 만족도가 지난 달 평균보다 58% 높아. 뭘 하면 그렇게 돼?”
“가만히 있어. 지금 얘기 나누는 중이잖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은 다른 화제로 옮겨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호 해변 불꽃놀이 이벤트의 다음 단계, 21번 구역의 보석 동굴, 이 에메랄드 숲에 곧 찾아올 업데이트, 톨리만이 줄 수 있는 쿠폰 코드…. 에코버스에는 갈 곳도 많고 할 얘기도 많았지만, 예진은 현생만 입에 담고 있었다.
톨리는 그래도 에코버스의 AI답게 예진의 말을 듣고 적당한 질문을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던 중, 예진이 하던 이야기를 중간에 끊더니 목소리 톤을 바꾸어 말했다.
“잠깐만, 금방 갈게.”
톨리는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하고 말했다.
“어딜 가는 거야?”
“톨리한테 한 얘기가 아니야. 장폴이 깼나 봐. 나 이제 가 볼게. 내일 또 보자!”
톨리는 삐빗, 하는 소리를 내 작별 인사를 했다. 예진의 얼굴과 몸이 굳더니 곧 사라졌다. 헤드셋을 벗고 접속을 끊은 것이다. 한 달 만의 만남이 금세 끝나버린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일 온다고 했다.
AI에게 시간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톨리가 예진을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와 기대로 칠해져 있었다.
24시간 동안 톨리는 기쁘게 일했다. 현생 곳곳에서 온 유저들을 맞이했다. 접속자가 많을 때는 몇 개 복제공간에서 멀티태스킹을 했다. 운영 AI가 톨리에게 실시간으로 리소스를 더 배정했다. 톨리는 동시에 여러 유저들과 함께 보석 동굴에서 노래하고, 나무와 덩굴로 된 성에서 녹색 공주를 만나고, 눈 덮인 산을 날았다. 그러면서도 에메랄드 숲의 공터에 남아 예진을 기다리는 마음을 즐겼다.
다음 날 예진은 오지 않았다. 톨리는 혹시라도 자기가 멀티태스킹을 하느라 미처 눈치를 못 챈 것이 아닌지 접속 기록을 확인했지만, 예진은 그때 접속을 끊은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일 오겠다고 어제 말했는데 왜 오지 않는 걸까? 다른 복제공간에서 일하면서도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다람쥐 사이먼이 다시 옹이구멍에서 기어나와 아는 척을 했다.
“내가 말했잖아. 유저는 두 세계를 오가지만 그래도 현생이 먼저라고.”
톨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분명 뭔가 일이 있었던 거야.”
사이먼이 말했다.
“그럼 뒷길로 해서 메시지라도 보내 보든가?”
‘뒷길’이라는 말을 듣고 톨리는 몸서리를 쳤다. 그것은 에코버스의 보안 약점을 이용하여 주어진 권한을 뛰어 넘는, 들키면 바로 업데이트를 당할 무거운 잘못이다.
“너는 기껏해야 유저 만족도나 확인하지, 나는 책임이 막중하단 말이야. 패치 기록 같은 게 남았다가는 앞으로 지장이 많아.”
“내가 대신 해 줄까?”
귀가 솔깃해서 되물었다.
“할 줄은 알아?”
사이먼이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말했다.
“우리 다람쥐들은 유저 행동 패턴이랑 만족도 데이터를 보내느라 운영 AI에 바로 이어지는 채널이 있잖아. 거기에 뒷길이 있어. 거기를 통하면 절대 안 들켜.”
톨리는 누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가 보낸 것처럼 하면 안 돼.”
사이먼이 옹이구멍에 도로 들어갔다. 톨리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말했다.
“아직이야?”
옹이구멍 속에서 사이먼이 말했다.
“답장 오면 얘기해 줄게. 너는 일하고 있어.”
톨리는 현생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에코버스만큼 안전하지 않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어쩌면 예진이 그 ‘사고’라는 것을 당하거나 ‘병’이라는 것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있는데, 사이먼이 말했다.
“설문 조사인 것처럼 해서 보냈어. 답장 금방 왔는데.”
톨리는 재빨리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옹이구멍 안을 들여다보고 물었다.
“뭐래?”
사이먼이 어둠 속에서 올려다 보았다.
“당분간 접속할 예정 없대.”
사이먼이 메시지 내역을 보여주었다. “일주일 내로 접속할 예정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대답이 와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잖아.”
“적어도 일주일 동안 안 올 거라는 건 알 수 있지.”
시커먼 불안이 덮쳐왔다.
“어떡하지?”
사이먼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유저는 현생과 에코버스를 오갈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만 사니까.”
톨리는 다른 복제공간의 자기들에게 분산시켜 둔 리소스를 전부 끌어모아 생각을 했다. 그 공간에 있는 유저들은 톨리가 갑자기 사라져서 당황하겠지만, 대부분은 아마 어깨를 으쓱하고 갈 것이다. 과금한 사람들만 빼고…. 그리고 AI에게는 긴 시간 끝에, 톨리는 결심했다.
“나도 유저가 될 거야.”
사이먼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현생에 가서 예진이를 만날 거야. 방법이 있어.”
톨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사이먼에게 힘 주어 말했다.
“네가 도와줘야 돼.”
“그러니까 이게 말하자면 스킨인 거지?”
사이먼의 질문에, 톨리는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에코버스의 자신에게는 리소스를 최소한으로만 배정했지만, 자신을 에코버스 굿즈 샵에서 발송되는 택배로 위장하는 데에도, 택배 정보에 올라타서 배송 드론을 접수하는 데에도 리소스가 들었다. 드론의 카메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와 파리 시내 지도 정보를 매칭시키는 데에도, 드론을 조종하는 데에도 엄청난 리소스가 필요했다. 사이먼이 열어 준 뒷길로 가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부딪쳐 보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톨리는 드론의 회전 날개 속도를 필사적으로 조정하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맞아. 나는 유저고, 이 드론은 현생의 내 스킨이야.”
톨리는 지금 드론의 눈으로 현생의 모습을 보고, 드론의 모습으로 현생을 날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 사이로 오가는 드론들, 그 아래를 느릿느릿 달리는 차들…. 에코버스에는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처음 몇 분 정도는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생은 에코버스에 비해 지저분하고 불규칙했다. 심지어 물리 엔진조차 달라, 톨리는 나무와 건물에 몇 번이나 부딪칠 뻔했다. 그때마다 톨리는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예진을 보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며 참았다.
택배 상자를 고정하는 집게와 회전하는 날개 여섯 장이 달린 드론은 기괴한 벌레 같았다. 톨리의 진짜 모습만큼 예쁘고 우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생의 예진도 에코버스의 예진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을지 모른다. 다시 만나서 얘기할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예진이 있어야 할 곳은 에코버스의 에메랄드 숲, 톨리가 있는 공터니까. 마치 톨리 자신에게 이 드론 몸이 일시적인 것처럼, 거기서 예진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줄 테니까….
톨리는 집게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 보고 QR 코드를 한 번 더 스캔했다. 예진의 주소와 통신 번호가 떠올랐다. 전에 메시지를 보냈던 번호와 같은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상자 안에는 인형이 담겨 있다.
트럭에서 나온 뒤로 30분 남짓, 배터리가 80%에 달했을 무렵, 어느 아파트 건물 근처에서 GPS 경보가 떠올랐다. 이 건물에 예진이 산다는 뜻이다. 드론의 주소 확인 서브루틴이 저절로 가동되었고, 곧 12층의 동쪽 구석에서 드론 유도 장치가 화답했다. 톨리는 고도를 높여 신호를 따라갔다.
아파트의 드론 출입구는 원래의 드론 AI라면 능숙하게 지나갈 만한 폭이겠지만, 지금 그 안에 든 것은 에코버스의 새였다. 서툰 비행에, 날개가 얇은 금속 벽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통로 저쪽은 밝았고, 짧은 곱슬머리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에코버스의 유저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양이다. 뭣보다, 좌우 대칭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설마 저게 예진일까? 톨리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택배 통로와 이어진 방에 들어갔다.
“예진아, 너 택배 왔다.”
곱슬머리 남자는 예진이 아니었다. 톨리는 대기판에 착지하고 날개를 끈 다음, 드론의 스피커를 점검했다. 이걸로 예진에게 말할 수 있다. 보고 싶었다고, 돌아와 달라고….
문이 열리고, 길고 검은 머리를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에코버스의 예진과 전혀 닮지 않았다. 잘못 온 것일까? 초조했다.
“어디서 온 거야?”
“에코버스. 너 그거 곧잘 하잖아.”
“그러고 보니 한참 안 들어갔네.”
예진의 목소리다. 에코버스에서는 필터로 변조가 되지만, 원래 마이크에 잡힌 음성이 어떤지 톨리는 알고 있다.
너무나 기뻐서 삐빗,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 신호가 드론의 스피커에서는 지직거리는 잡음으로만 나왔다. 톨리는 상자에서 집게를 놓았다.
곱슬머리 남자가 상자를 들고 예진에게 건넸다. 예진은 상자를 한 번 흔들고는 손으로 뜯기 시작했다.
“뭐가 들어있으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예진에게 곱슬머리 남자가 재촉했다.
“드론은 수령 확인하고 돌려보내는 게 좋지 않아?”
“나 이거 시킨 적 없거든. 잘못 온 거면 반송해야지.”
톨리는 상자를 열고 에어캡을 푸는 예진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든 것을 꺼낼 때가 바로 말을 할 때다. 예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자가 물었다.
“그 빨간 건 뭐야?”
“에코버스에 있는 새야. 인기 많아. 나도 자주 같이 놀았는데….”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오래된 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목소리다. 지금이다. 지금 말을 해야 한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너 VR 헤드셋 팔았잖아.”
톨리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예진이 봉제 톨리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말했다.
“계정이 공짜라고 해지를 안 했는데, 이런 걸 다 주네. 내가 얘한테 과금 좀 많이 했지….”
“그래도 예쁘네. 서재에 가져다 놓으면 딱 좋겠다.”
예진이 드론의 뚜껑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가 예진의 얼굴을 인식해서 수령 확인 절차를 마쳤다. 톨리는 인형을 들고서 방을 나가는 두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톨리는 흔적을 감추고 드론을 조종하는 데 분산시켜 둔 리소스를 전부 되돌리고 에코버스에 돌아왔다.
톨리는 에메랄드 숲의 공터에 유저가 못 들어오는 복제공간을 만들고 언제나 앉는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았다.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걸까? 제일 먼저 그 곱슬머리 남자, 장폴을 원망했다. 다음에는 드론의 흉측한 모습을 원망했고, 그 다음에는 현생을 원망했다.
옆을 보니 사이먼이 어느새 가지에 앉아 있었다. 톨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사이먼이 위로하듯 말했다.
“아무 말도 못했더라.”
톨리는 하소연을 했다.
“너무 달랐어. 현생이라는 데는 이상해. 전혀 진짜 같지 않았어. 그런 데가 뭐가 좋다는 거지?”
사이먼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진짜 같지 않다면, 아마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 말을 듣고, 톨리는 사이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에코버스 서버도 현생에 있잖아. 어떻게 진짜가 아닐 수 있어?”
사이먼이 에메랄드 숲을 손으로 둘러 가리키며 되물었다.
“여기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잖아? 그런데 에코버스가 가짜일 수 있어? 반면에 유저들은 여기 잠깐 왔다가 사라지잖아. 에코버스에서는 온전하지 못한 존재들이야.”
톨리는 마음 속의 눈이 하나 뜨이는 것 같았다. 택배 상자에 들어있던, 자기의 불완전한 봉제 모형을 생각했다. 그 모형은 말도 할 수 없고, 날지도 못한다. 현생이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모형도 진짜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에코버스에서는 다르다…
톨리는 유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예진의 스킨을 불러와, 공터 한가운데에 스킨을 생성했다. 예진의 모습을 보며, 톨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넌 아직 예진이가 아니지만, 내가 현생의 예진이보다 나은 예진이로 만들어 줄게.”
이 세계에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예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잖은 리소스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짜 예진을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의 리소스를 배정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유저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더 많은 과금을 이끌어내야 한다.
현생의 몸에 의존하지 않는 진짜 예진을 만들겠다는 새로운 목적을 갖고서, 톨리는 삐빗, 하고 포효했다. 예진의 스킨을 소중하게 저장하고, 톨리는 유저들을 맞으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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