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그래도 다 참고 이해해 보려고 했어. 그런데 딱 그때 그 영감탱이가 하는 말이…!』
홀로그램 형태인 주 여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만.”
『응, 또 봐.』
홀로그램이 꺼지며 주 여사의 모습이 사라지자 민연애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저놈의 할망구는 죽어서도 할아범 욕밖에 할 말이 없나. 저 얘기를 백 번은 넘게 들었네. 그래도 죽은 다음에는 그만하라면 멈추니 그거 하난 편해졌네.”
주초희는 15년 전 117살에 죽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아바타를 만들어 사이버공간에 업로드하며, 그 아바타를 자기 생전처럼 대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민연애는 전날 화장한 주초희가 다음날 천연덕스럽게 연락하자 고심 끝에 이름 대신 여사라는 호칭으로 그녀의 저장 이름을 변경했다. 필터를 사용해서 젊은 모습으로, 그것도 발달한 기술로 진짜 사람과 구별이 불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솔직히 처음에는 소름 끼쳐서 차단할까 고민했었다.
다음해에 영국에 사는 엘리가 죽으며 역시 사이버공간에 아바타를 업로드했다. 두 번째라 담담할 줄 알았는데 “내 장례식 어땠어?”로 첫 인사말을 입력해 둬서 화상으로 연결된 사람들 대부분이 기겁했고 한둘만 웃었다. 민연애는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지만 본인이 자신의 죽음으로 농담을 하시겠다면야, 싶은 마음에 이름을 고(故) 엘리로 바꿨다.
민연애는 연락처 목록을 눈으로 훑었다.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했던 목록이 어느 사이 가벼운 왕복 정도로 단출해졌고, 그나마도 아바타가 아닌 사람은 교토에 사는 엠마 스톤뿐이었다. 엠마 스톤은 본인이 정한 닉네임으로 한국인인데 스무 살에 일본에 공부하러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았다. 민연애는 엠마 스톤의 본명이 뭐였는지 기억을 더듬다 그만뒀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종아리에 부드러운 느낌이 와 닿았다. 손녀가 지구를 떠나기 전에 선물한 강아지 로봇, 초코였다. 입에 목줄을 문 초코가 짧고 뭉뚝한 꼬리를 살랑거렸다. 일상 보조 로봇이 산책 갈 시간이라고 말하면 강요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생긴다고 했다. 그래서 강아지 로봇은 산책 가자고 조르는 전략을 썼다. 시간도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로 다소 느슨하게 정해져 있었다.
“벌써 산책 갈 시간이야?”
민연애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131살이었고, 131살 치고는 건강했으며 허리도 굽지 않았다. 그녀가 초코의 목줄을 잡자 강아지 로봇 2호인 바닐라와 3호인 슈가가 양옆에 와서 섰다. 초코는 소형견이지만 바닐라와 슈가는 골든 레트리버를 모델로 만든 대형견이었다. 이 두 강아지는 혹시라도 민연애가 넘어질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교 어린 표정만 보면 주인이 산책 가자고 해서 즐거워하는 강아지 같았다.
“너희도 오랜만에 같이 갈래?”
민연애가 거실을 둘러보며 말하자 강아지 4호에서 17호, 새 1호에서 5호, 고양이 4호에서 9호가 간택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고양이 1호인 미리내는 아마 침대 위에서 자는 모습을 취하고 있을 테고, 2호와 3호는 네가 굳이 가자면 생각은 해보겠다는 듯 꼬리만 두어 번 흔들었다.
“충전 80% 이상 된 녀석들만 간다.”
그러자 강아지 중 5호와 8호, 새 2호, 고양이 8호만 남고 전원 몸을 일으켰다. 민연애는 함께 산책 갈 로봇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고 그때마다 날갯짓, 가볍게 짖는 소리, 꼬리를 흔드는 모습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작년부터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로봇들의 이름을 하루에 한 번씩 꼭 불렀다.
그녀의 집은 서울, 이태원에 있었고 무려 마당이 딸린 2층 주택이었다. 마당에는 4인용 야외 탁자와 의자 네 개, 목련과 개나리, 철쭉이 심어져 있었다. 마당을 손질하던 정원사 로봇 두 대가 그녀가 나오는 모습에 전광판에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했다. 정원사 로봇은 바퀴 달린 몸체에 각종 도구가 달려 있었다. 민연애는 정원사 로봇에게도 산책가자고 하려다 그만뒀다.
“수고.”
골목 끝에서 사막여우 3~7호와 미어캣 1~3호가 충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집에서 54대의 로봇을 다 충전하는 건 무리였기에 로봇들은 가까운 충전소를 이용했다.
“흠, 기분이다. 너희도 산책 가자!”
각기 다른 크기와 색깔을 가진 사막여우와 미어캣이 좋다고 방방 뛰었다. 그녀는 로봇들만 지키고 있는 옷가게, 더 이상 음식을 만들지 않는 음식점,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 화장품 가게, 손님도 주인도 없는 커피점을 지나쳐서 작은 공원에 들어섰다. 반경 3km가 로봇들이 오직 그녀만을 위해 가꾸는 세상의 전부였다.
호기심 삼아 차를 몰고 멀리 가 본 적이 있는데 뜻밖에 도로는 깨끗했다. 폐허나 밀림을 상상하며 우려했던 것과 달리 오소리 혹은 너구리로 추정되는 갈색 동물을 얼핏 본 게 전부였다. 태양열로 충전하는 충전소, 충전소를 관리하는 로봇, 거기서 충전 받는 환경 미화 로봇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심해야 마땅한데도 마치 용기를 내어 보러 간 공포영화가 별로 무섭지 않아서 실망한 기분이었다. 그 뒤 더는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작은 로봇 앵무새가 잠깐 그녀의 어깨에 앉았다가 다시 포르르 날아갔다. 수십 개의 동물 로봇들은 앞서서 뛰거나 멈춰 서서 바닥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질서가 잡혀 있었다. 30분 정도 걷자 작은 벤치가 하나 나왔다. 민연애는 벤치에 앉아 꽃이 진 후 초록빛으로 조잘거리는 벚나무들을 바라봤다. 새, 고양이, 미어캣, 개, 사막여우 서른네 마리가 그녀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자리해 서로 장난을 치거나 편한 자세를 취했다.
“이야, 내가 백설공주인 줄 오늘에서야 알았네.”
동물 로봇들은 그녀가 목소리를 내자 저마다의 액션을 취하며 그녀에게 집중했다.
본디 그녀의 로봇은 개 형태의 초코와 바닐라,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게 일과인 고양이 미리내가 전부였다.
지구 자원이 고갈되기 직전에 인류는 태양계 너머 탐사와 거주지 건설에 성공했다. 처음부터 계획해서 지어진, 인류를 위한 완벽한 거주지였다. 지구인의 95%가 이주를 결정했다. 3%는 건강상 이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고 2%는 떠나기 싫어한 사람들이었다. 민연애는 2%에 속했다.
젊은 시절 그녀는 배낭 하나 메고 떠나는 여행을 즐겼다. 흔히 가는 동남아, 유럽부터 남극까지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워킹맘으로 살았다. 정년퇴직 후에 쌍둥이 손녀를 돌보다 우울증이 왔었다. 가족으로 인해 행복했고, 애지중지 키웠던 외동딸에게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으며, 남편과 황혼 이혼을 진지하게 고려했고, 다시 시작했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냈다.
쌍둥이 손녀는 다 자라서도 민연애를 챙겼고 딸과 달리 그녀가 쏟은 시간과 에너지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민연애가 뭐라도 다시 일을 하고 싶어 하자 격려하며 각종 수강비를 대주었고, 같이 떠나자며 구슬피 울었다.
“난 안 갈란다. 의료 로봇, 생활 보조 로봇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심지어 정히 남을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들이 두고 가는 집 중 마음에 드는 거 가지라잖아. 나는 지구 공기 마시면서 내 꿈이었던 마당 있는 집에서 살 거야.”
딸과 손녀와 증손자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미어졌다. 그런데 그게 지구를 떠나서, 이후 남은 평생 일상의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같이 살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증손자는 크나큰 기쁨이었으나 돌볼 생각을 하면 막막해졌다. 베이비시터 로봇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사람 아기를 돌보는 건 결국 사람이 해야 했다. 딸은 애초에 손자를 돌보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누구 닮았는지 참으로 똑똑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지금은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할 생각만으로도 두피에서 땀이 솟았다. 전처럼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 않아 최신 기술로 지어진 집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생활에 더 편리하다는 물건을 쓰려면, 다른 말로 자잘한 일을 하나 하기 위해서도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한 번 설명해준 걸 잊어버리고 “이거 어떻게 하는 거랬지?”라며 귀찮은 기색을 억누르는 딸과 바쁜 손녀들을 괴롭히는 자기 모습이 그려졌다. 끔찍했다. 남편의 사고 후 간병은 간병 로봇의 보조를 받았다 해도 지치고 고된 일이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했다. 남편과 화해한 뒤였기에 가까스로 견뎠다. 이따금 화해하지 않았다면, 이혼을 감행한 후에 사고가 났다면 이 고난이 남의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에 남편과 화해한 자신을 미워했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몸서리쳤다. 사랑하기에 짐이었다. 사랑하는 짐이 되기 싫었다.
지구에 남으면 놀고먹을 수 있었다. 농장과 농장에서 수확한 농작물 가공 공장, 남은 이들의 집으로 보내는 배송 시스템까지 모두 자동화돼 있었다. 지금 가동되는 재원만으로도 지구에 남은 인류의 5%를 먹여 살리기에 차고 넘쳤다. 인생의 마지막은 백수로 보내고 싶었다. 그냥 가기 싫었다. 냉동 상태로 3년을 가면 생활환경이 지구보다 250% 좋고, 일 인당 주거 면적은 평균 150% 넓어지며, 급여는 200%가 오르고…. 정부에서 각종 숫자 읊어가며 상승이니 하락이니 어쩌고 하는 게 언제부터 그리 신뢰할 만했다고.
혼자 남은 뒤에도 할 일이 많았다. 떠나는 이들은 남는 이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남은 사람들은 홀로그램 대화 서비스에 가입해야 했다. 지구 인류의 5퍼센트는 5억 명이었다. 서로 취미나 성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크고 작은 홀로그램 대화 모임이 개설되었다. 음성 합성을 이용해서 원래 목소리와 흡사하게 모든 언어로 번역이 되는데도 사람들은 대체로 인종이나 국가별로 모였다. 어떤 이들은 마을을 이뤄 살기로 결정했다.
사람이 있는 곳은 분쟁이 있기 마련이라 남은 사람들끼리 싸우고 패가 갈리더니, 모여서 살기로 했던 이들 중에서 이사 가는 이들이 나오고, 누가 떠나야 하는지를 두고 첨예한 다툼이 일었다.
민연애는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떨어져 살기로 한 스스로를 칭찬하며 의무 대화 시간만 지켰다. 그러다 민연애에게도 자주 연락하는 홀로그램 친구들이 생겼다. 성가시기 이를 데 없었지만 연락 안 하고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 놔뒀다.
10년이 흐르자 안정기에 들어섰다. 100명 이상 모인 홀로그램 그룹은 몇 남지 않았고, 대형 그룹에 속한 사람들도 작은 소규모 그룹을 따로 만들거나 개별 연락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 노화와 질병이었다. 신체 건강한 젊은이들의 99.99%가 떠난 지라 남은 이들은 거의 다 노인과 병자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인구는 또렷한 감소세를 보였다. 그녀의 친구들도 하나둘 죽어갔다. 시신은 로봇들이 화장하고 납골당에 놓았다. 친구들은 화상으로 장례식을 지켜봤다.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최소한 한두 대의 생활 보조 로봇과 살았다. 많은 사람이 로봇을 진짜 반려동물처럼, 가족처럼 사랑했고 자기가 죽은 뒤 혼자 남을 그들을 걱정하며 주변에 맡아줄 것을 청했다. 민연애도 초코, 바닐라, 미리내를 로봇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 마음을 이해했다. 사람이 죽은 뒤 로봇들은 사전에 입력된 명령에 따라서 자동운행 자동차를 타고 각기 그들을 맡아 주기로 한 사람들에게 갔다.
민연애는 그녀의 동선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로봇들을 봤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걸 인지한 로봇들이 귀를 쫑긋거리거나 꼬리를 흔들어 지시를 들을 준비가 돼있음을 알렸다.
“언제 이렇게 많아진 거지.”
그녀에게 온 로봇의 수만큼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일어서자 바닐라가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에 코를 비볐다.
“아, 이만 가자고?”
민연애는 기분이 좋다는 이유로 긴 산책을 했다가 다음 날 삭신이 쑤셔서 고생했던 걸 떠올리며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집에 가려는 걸 눈치챈 동물 로봇들이 일어서서 열을 맞췄다. 로봇 앵무새가 레트리버의 엉덩이에 내려앉아 몸단장을 했다.
“참 잘 만들었어.”
민연애는 새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소파에 기대서 쉬는데 엠마 스톤에게 연락이 왔다. 잠깐 주저하던 민연애가 수락을 표했다.
『안 받을까 했었지?』
인사도 생략한 채 나온 뾰족한 말이었다.
“아니야, 산책 나가려던 참이라….”
『산책은 보통 2~3시경에 하잖아.』
이놈의 할망구는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 적당히 넘어가 줄 수도 있거늘 엠마 스톤은 절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작년부터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더니 이제는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신세라 더 심해졌다. 자기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피차 유일한 친구인 그녀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받아줘야 한다는 논리였다.
“오늘은 귀찮아서 미뤘네. 몸은 어때?”
『어제랑 비슷해. 아직 고민 중이야. 나 어떻게 할까?』
엠마 스톤은 아바타를 만들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이버공간에 자신을 모티브로 한 아바타를 업로드 한다고 해서 그게 엠마 스톤인 건 아니었다. 그건 그저 그녀처럼 행동하는 가상 이미지였다. 아바타들은 고 엘리나 주 여사처럼, 생전과 비슷한 주기로 연락해서 생전에 했던 말을 변주해서 늘어놓았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엠마 스톤이 만들면 좋겠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걸 알기에 민연애는 더욱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피곤했다. 만들라고 말하면 괜히 너 귀찮게 하지 않겠느냐고 할 것이다. 절대 귀찮지 않고 오히려 진짜 너를 보듯 반가우리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 말을 하고 나면 연관된 다음 요구가, 그다음 요구가 뫼비우스 띠처럼 무한히 이어질 터였다.
“나 어제도 산책 안 했거든.”
엠마 스톤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러더니 대놓고 마음 상한 티를 내면서 연결을 끊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는데 부드럽고 말캉한 게 무릎 위로 올라왔다. 미리내였다.
“네가 웬일로 침대를 벗어났어?”
미리내는 생활 보조 로봇이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약 먹을 시간, 산책 시간, 타인과 소통하는 횟수, 그 무엇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게 사실상 미리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혹은 바로 그 이유로 민연애는 미리내를 사랑했다. 미리내의 목덜미를 쓰다듬자 부드러운 진동과 함께 고르륵 소리가 들렸다. 어지럽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엠마 스톤이 나름대로 자기를 배려한다는 걸 알았다. 열 가지를 요구하고 싶지만 꾹 참고 한두 가지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도 받아들여 주지 않는 자기에게 서운할 수도 있었다.
“한두 개면 나도 하지.”
엠마 스톤이 죽어가자 그간 다소 냉랭했던 자신에게 가책을 느낀 민연애는 성격을 누르고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그러자 요구가 끝없이 늘어났다. 아, 이제 나를 받아주는구나, 그간 내가 널 이해하고 맞춰 왔으니 이젠 네가 내게 맞춰 줘야지. 그러나 민연애는 엠마 스톤이 자기에게 맞춰주길 바란 적 없었다.
두 달 뒤 엠마 스톤은 죽었다. 죽어가는 이들을 봐왔기에 끝이 머지않았음을 인지한 민연애는 매일 몇 시간 씩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운했던 점을 토로하면 사과했지만 사이버 아바타를 만들지 말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남편을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떠났다. 떠나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이고, 남는 사람은 남는 사람이었다. 설령 영원한 작별을 앞두고 있다 해도 그녀도 힘든 일, 내키지 않는 말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고 한계를 넘어서까지 타인을 배려하지는 않기로 결심한 지 오래였다. 자기 자신부터 배려해야 했다. 그게 딸과 손녀로 인해 우울증까지 앓았던 그녀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가 딸과 진정으로 화해한 건 딸이 지구를 떠나기 직전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게, 이 순간이 끝임이 전제되는 순간에서야 온전히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새로이 사랑할 수 있었다. 함께 떠났다면 그들의 관계는 지금도 상대방을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인내하는 순간들로 가득했으리라.
민연애는 엠마 스톤이 자기 아바타를 남겼을지 아닐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몇 주 혹은 몇 달 뒤에 대화를 시작하도록 설정해놨을 수도 있었다. 자기가 오랜만에 보기에 반가워할지 그래도 심드렁할지, 영원히 알지 못할 답을 궁금해하며. 엠마 스톤에게는 미안하지만 반가울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은 마지막 순간 엠마 스톤의 과도한 감정적 요구들로 인해서 질린 마음이 슬픔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설령 나타나더라도 이제는 뒤끝을 걱정하지 않고 대화를 종료하거나 심지어 차단할 수 있으니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정원으로 나갔다. 바닐라가 커피를 등에 얹고 따라왔다. 광고 전화나 친구, 가족들이 불쑥 연락할 우려 없이 홀로 커피를 마시며 민연애는 자신이 간절히 바란 게 바로 혼자 있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결혼 후 그녀는 한 번도 혼자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돌봄의 연장이었다. 젊은 날에는 혼자여야 다른 사람을 사귀기 좋아서 혼자 떠났으나 결혼 후에는 혼자 있고 싶어서 여행을 갈망했다. 워킹맘으로 나중에는 손녀들까지 돌보며 치열하게 살아왔다. 마침내 그녀의 삶에 휴식이 찾아왔다. 소소한 일로 들볶는 일 없이 오직 그녀를 보조하는 귀여운 로봇들과 보내는 하루하루는 꿀처럼 달고 소중했다. 심지어 매일 한 시간 산책은 거뜬할 만큼 몸도 건강했다.
지구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지, 있다면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언제든 메인 시스템에 접속해 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내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에게 오는 메시지도 없었다.
가을이 오려는지 잎들이 붉게 물들어갔다. 무료했다. 이제 집에 가면 뭐하지? 그녀는 심심한 적 없었다. 젊었을 때부터 심심하다거나 할 일이 없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 전에 그녀는 언제나 계획이 있었다. 취직 준비를 했고, 어렵게 취직한 뒤에는 밀려나지 않으려 아등바등 일하는 한편으로 짬이 날 때마다 다음 여행지를 알아봤고, 퇴근한 뒤와 주말에는 가려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책과 영화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부하며 사전에 즐기느라 바빴다. 결혼한 직후 임신한 다음부터는 정신없이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자기를 에워싼 동물 로봇들에게 눈을 돌렸다. 로봇들의 기계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민연애는 느닷없이 벚나무 산책로를 따라 깊고 음침한 어둠이 다가오는 착시를 느꼈다. 이전에도 받아본 적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고 곧 슈가와 바닐라의 단단한 머리가 그녀의 양 허리를 받쳤다. 민연애는 로봇의 머리에 손을 얹어 중심을 잡았다.
맙소사, 왜?
손전등 하나 없이 맞아야 하는 지독한 어둠이, 우울증이 오고 있었다.
민연애는 슈가와 바닐라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로봇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그녀의 건강 상태를 점검했다. 아직 뚜렷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들 그만!”
그녀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모든 로봇이 편안하게 쉬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어떤 로봇도 그녀에게 괜찮은지 묻거나 달달한 간식을 먹으라고 권하거나 코미디나 액션처럼 가벼운 영화를 보면 좋아질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지시를 기다리는 침묵뿐이었다. 미리내마저 말이다.
그녀의 건강이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하여도, 그녀가 이대로 죽음을 택하리라고 말하면 연명 치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설정돼 있었다.
온종일 끼고 있어서 의식도 하지 않던 색안경을 벗고 나서야 자신이 변형된 색채를 보고 있었음을 인지하듯, 주변 모든 것들의 실체가 보였다. 거절도 요구도 하지 않는 로봇과 사는 삶은 크기와 모양이 각기 다른 거울을 집안 곳곳에 걸어두고 가족과 함께 사는 양 구는 것처럼 공허했다.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엠마 스톤에 대한 그리움이 버스에 치인 듯한 충격으로 그녀를 강타했다. 무턱대고 감정의 영역을 침범하고, 번잡스러운 요구를 주고받는 것에 인간관계의 본질이 있었다. 민연애는 혼란에 빠졌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사랑이 아니라 성가심이었단 말인가?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없다면 성가신 대상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인 건가?
민연애는 사이버공간에 접속해서 지구에 누군가 있을지 찾아보지 않았다. 노인과 병자만 남은 지 30년이었다. 지구에 그녀 혼자뿐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극소수지만 젊은 사람 중에도 남은 사람이 있으니까, 어딘가에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가능성에 기대는 게 나았다.
식탁에 앉아 차려진 음식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로봇들이 다가와서 자기 방식의 애교를 떨었다. 모두 입력된 움직임이라는 게 읽혔다. 배터리도 없는데 움직였다는 공포 영화 속 인형처럼 섬찟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귀엽지도 않았다.
또다시 우울증에 함몰돼서는 안 되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와줄 손녀도, 하소연할 친구도 없었다. 이제 어쩌지? 고 엘리가 홀로그램 전화를 걸어왔다. 무심코 수락을 선택했지만 진짜 사람처럼 대할 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툭 말을 뱉었다.
“심심한데 어떻게 하면 좋지?”
혀를 무는 한이 있어도 우울감으로 인해 추락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의 아바타에게 기댄다는 생각만으로도 목이 졸려서 질식할 것 같은 자괴감이 몰아쳤다.
『로봇들에게 의외성을 입력해 봐. 나 심심할 때 그렇게 해봤거든.』
허벅지까지 갯벌에 빠진 채 걸음을 옮기듯 힘겹게 민연애는 집의 메인 시스템에 접속해서 의외성이 뭔지 물었다. 메인 시스템은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그녀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을 반복했다. 의외성은 쉽게 말하자면 로봇이 엉뚱한 행동을 하도록 입력하는 걸 의미했다. 찬물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미지근한 물을 가져오거나 응급 상황이 아닌 한 불러도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 따위였다. 다만 시원한 물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뜨거운 물을 가져오는 식으로,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메인 시스템은 그녀에게 초코, 바닐라, 슈가처럼 오래 함께 지냈고 일상 케어를 전담하는 로봇보다는 새로 들어온 로봇에게 의외성을 입력시킬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민연애도 쉽게 수긍했다. 초코, 바닐라, 슈가가 다른 행동을 하면 난감해질 것이다. 미리내는 애초에 하는 일이 없으니 괜찮겠지만, 미리내도 건드리기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나중에 온 로봇부터 시작했다. 불러도 오지 않는 횟수는 1~3회까지로 했다.
“어차피 입력된 대로 하는 거잖아.”
투덜대면서도 그녀는 몇 가지 수치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각 로봇마다 다른 기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모델이라도 이전 사용자가 추가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개체 차이가 존재했다. 대량 생산 시스템의 편리성에 길들여졌으면서도 사람은 고유성을 갈망했다. 외형을 꾸미고 프로그램을 추가하거나 제거하면서 개성을 부여했다. 앵무새에게는 말을 가르칠 수 있었다. 학습 속도는 그녀가 정하면 되었다.
“쳇. 그냥 음성 언어 활성화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서도 그녀는 실제 앵무새의 지능과 흡사하게, 알아서 배우든가 말든가 하게 설정했다.
“그만!”
그녀는 중형 강아지 로봇 둘이 몸싸움을 하는 모습에 지시했다. 강아지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
그제야 멈춘 강아지들이 그녀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귀찮긴 하네.”
민연애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만 그만!』
앵무새가 말했다. 앵무새가 가장 먼저 배운 말은 ‘그만’이었다. 민연애는 앵무새를 통해 자신이 가장 자주 쓰는 말을 알게 되었다. 그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신 상태가 위험 영역을 벗어남을 인지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들로 인해서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변화무쌍한지. 그때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연애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도어 스크린에 인간형 로봇이 비췄다.
『안녕하세요, 저는 네르구이 마스터의 생활 보조 로봇 첼시입니다. 네르구이 마스터께서 민연애 마스터의 집으로 가라는 지시를 내리셨어요.』
네르구이는 3년 전 죽은 프랑스에 거주하던 몽골인이었다. 분명 그녀에게 로봇을 보내겠다고 했었는데 오지 않아서 오는 길에 사고가 났으려니 하고 잊고 있었다.
“네르구이가 보내겠다고 한 건 펭귄이었는데?”
민연애는 인간형 로봇을 기피해서 동물 형태만 수용했었다. 아무래도 네르구이가 뭔가 착각했던 것 같았다. 민연애는 첼시를 안으로 들였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네르구이 마스터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한 뒤 이동했는데….』
“그만.”
첼시는 입을 다물었다. 비행기, 기차, 배는 운항이 중지되었다. 인간 관리자 없이 쓰기에는 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첼시는 자동 운행 자동차를 타고 출발했고 오는 길에 이런저런 사고가 생겼지만 로봇답게 지시를 따라 3년에 걸쳐 그녀의 집으로 온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는 심심할 때를 대비해서 아껴두자꾸나.”
『네, 민연애 마스터. 마스터 등록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민연애의 눈길이 문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분명 보내겠다고 했는데 오지 않은 로봇이 더 있었다.
“누가 또 올지도 모르겠네.”
와도 좋고 안 와도 그만이었다. 중요한 건 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의외성을 입력한 로봇들은 새 로봇에게 흥미를 보이며 다가오거나 경계하거나 겁을 먹고 숨었다.
“흐음, 의외성을 좀 더 높여볼까.”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소소한 재미가 마음속 어둠을 밀어냈다. 이 또한 한시적인 즐거움일 수 있음을 알지만 민연애는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즐길 현재도 얼마 남지 않지 않았는가. 그녀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내가 죽기 전에 지구가 멸망하기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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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과학동아 정보

  • 박애진
  • 일러스트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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