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꽃은 자연에서 매우 희귀하다. 그런데 독특한 검은빛은 물론 모양까지 특이한 식물이 있다. 타카 칸트리에리(Tacca chantrieri) 다. 영어 이름은 ‘블랙 배트 플라워(black bat flower)’로, 직역해 우리 식으로 이름 붙이자면 ‘검은박쥐꽃’이다.
이름대로 박쥐를 꼭 닮았다.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2장의 검은색 포엽(잎이 변형된 것으로 꽃을 둘러싼 부분)은 마치 박쥐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 포엽의 길이는 각각 15cm에 이른다. 또 포엽에 살짝 도드라진 잎맥은 박쥐 날개에 주름진 모양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 가운데 올망졸망 작게 매달려 있는 꽃들도 박쥐 얼굴을 닮았다. 가늘고 길게 늘어뜨려진 소포엽(꽃에 가장 가까이 달려있는 포엽)은 구레나룻 혹은 고양이 수염을 닮아 꽃의 개성을 더한다.
하지만 박쥐와 연관 짓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보면 오묘한 빛깔과 자태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마과(Dioscoreaceae)에 속하는 타카 칸트리에리는 원래 태국,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시아 정글 숲 바닥에서 자란다. 어쩌면 지역민들은 어두운 정글 숲에서 이 꽃을 만나면 살쾡이나 박쥐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생존을 위해 기이한 모습으로 진화
꽃에선 살짝 악취가 난다. 이 때문에 타카 칸트리에리가 썩은 유기물을 찾는 파리를 유혹하고, 파리로 꽃가루받이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2011년 중국 식물학자인 링 장을 비롯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 꽃은 파리나 곤충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수정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먼 과거 이 꽃을 위한 꽃가루 매개자는 이미 멸종했고, 오랜 세월 속에서 스스로 생존을 위해 이런 모습으로 진화했다는 견해다. 가령 소포엽이 기다랗게 발달한 이유는 그늘진 숲속에서 광합성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전체적으로 꽃 모양이 기이하게 생긴 이유는 초식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한 위장술이라는 것이다.
이 식물의 포엽을 비롯한 꽃 부분은 우리 눈에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매우 짙은 보라색이다. 사실 완전한 검은색을 지닌 꽃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빨강, 보라, 파랑 등 여러 종류의 안토시아닌 색소가 고농도로 함유돼 있는 경우 이렇게 검은빛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식물 품종을 육종할 때 검은색을 띠는 꽃을 얻기 위해서는 보통 안토시아닌 함량이 높은 꽃 종류를 사용한다. 검은 접시꽃 ‘니그라’(Alcea rosea ‘Nigra’) 같은 꽃 속에도 9가지 안토시아닌이 포함돼 있다.
제임스 폭스 영국 케임브리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저서 ‘컬러의 시간’에서 “검정은 흔히 결핍, 어둠, 악, 불결함으로 연결되며 ‘흑색선전’이나 ‘블랙리스트’ 같은 부정적 은유로 쓰이지만 고대 이집트에서는 비옥한 토양의 색, 생명의 색으로 숭배받았다”고 서술했다. 시대와 문화, 국가에 따라 색깔에 대한 해석과 의미의 차이가 있겠지만 검은색을 띠는 꽃은 일반적으로 ‘미스터리’하면서도 ‘엘레강스(우아한)’한 느낌을 준다.
타카 칸트리에리는 이처럼 꽃 색깔과 모양이 독특해 관상용으로도 키운다. 정원에서 직접 키우려면 13℃ 이상의 온도가 필요하다. 덥고 습한 열대 정글 숲처럼 직사광선이 내리 쬐지 않으며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이면 더욱 좋다. 유기질이 풍부하면서 배수가 잘 되는 흙에 심고 매년 조금씩 큰 화분으로 옮겨 준다. 꽃은 여름과 가을에 걸쳐 핀다.
※필자소개
박원순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롱우드 가든에서 국제 정원사 양성 과정을 밟았으며, 델라웨어대에서 대중원예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에버랜드에서 식물 전시를 담당하다가 현재는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나는 가드너입니다’ ‘식물의 위로’ ‘미국 정원의 발견’ ‘가드너의 일’이 있고, ‘세상을 바꾼 식물이야기 100’ ‘식물: 대백과사전’ ‘가드닝: 정원의 역사’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