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은 과학자들에게 흰 도화지 같은 곳이에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각자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곳입니다.”
지구의 양끝, 얼음의 땅과 바다에서 누구보다 심장이 뛰었던 과학자가 있다. 여성 최초로 극지연구소의 선봉장이 돼 국내 최초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를 운영하며, 남극 장보고과학기지의 건설을 주도한 이홍금 전 극지연구소장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찾는 일을 했다. 새로운 미생물을 만나기 위해 멀고 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불카노섬을 비롯한 활화산, 스쿠버다이빙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해역, 남극과 북극 기지가 그의 주된 연구지였다.
국내 최초로 여성 극지연구소장이 되다
1990년대 초부터 한국해양연구원(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에서 근무하던 이홍금 전 소장은 2004년 KIOST의 부설기관이 된 극지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음 해 북극다산과학기지로 떠났다. 쉰 살이 넘고서 30시간이 넘는 비행을 견디는 일은 고됐지만, 새로운 연구에 도전한다는 사실이 그를 움직였다.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예기치 못한 행운을 마주하기도 했다. 우연히 채취한 시료에서 적조 현상을 퇴치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미생물을 세계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국내 최남단 마라도에 갔는데 해면 채취가 어려워 대신 해변의 바위에서 시료를 채취했어요. 실험실에서 살펴보니 새로운 모양의 미생물이었습니다. 국내 미생물학 원로이자 제 은사님인 하영칠 서울대 교수님의 성을 따 ‘하’, 미생물이 발견된 지역인 ‘제주’를 붙여 ‘하헬라 제주엔시스(Hahella chejuensis)’로 발표했어요.”
2007년에는 국내 최초로 여성 극지연구소장이 됐다. 아직 극지에서 겨울을 보낸 경험이 없다는 염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당시 그는 우수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역량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장이 된 뒤 가장 큰 성과는 단연 아라온호를 무사히 건조한 일이었다. 아라온호는 2009년 완성된 국내 최초 쇄빙연구선이다. 얼음으로 덮인 곳을 부숴 항로를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남극 연구에 필수적이었지만,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쇄빙선을 선진국에서 대여해 사용했다.
“쇄빙선은 하루 빌리는 데만 8000~9000만 원이 들어요. 극지 연구에 적합한 시기는 정해져 있는데, 정작 연구를 하기 좋은 시기에는 쇄빙선 보유국에서 써야 해 돈이 있어도 빌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장비가 장착된 아라온호가 연구를 시작하자 선진국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국내 연구팀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이처럼 아라온호는 극지 연구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것으로 평가 받으며, 우리나라가 2013년 북극이사회에서 정식 옵저버 지위를 획득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옵저버가 되면 북극 연구와 자원 개발 등을 주도할 수 있다.
2014년에는 국내 두 번째 남극 기지인 장보고과학기지 준공을 이끌며 연구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극지에서 6번의 월동대를 보낸 이 전 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매 순간이 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임무 완수보다도 강조해 당부한 것은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것이었어요. 극지 연구자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연구를 합니다.”
이 전 소장은 극지는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충분한 연구지라고 강조한다. 그는 “극지는 지구온난화에 따라 지구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연구할 수 있는 장소”라며 “특히 남극은 국가 간 영토의 가로막힘 없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어 과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 전 소장은 2020년 정년퇴임하며 30여 년간의 연구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앞으로는 국제 협력 업무나 극지 연구에 있어 동료 연구자를 돕는 조언자의 역할을 할 예정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성 연구자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여자, 남자를 떠나 인간으로서 꿈을 크게 갖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계 없이 해내길 바랍니다.”
이홍금
극지연구소 전 소장 한국해양연구원(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해양자원연구본부 본부장(2002) 극지연구소 극지바이오센터장(2005)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상 수상(2015) 과학기술진흥훈장혁신상 수상(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