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과학연구소 여성 연구원 1호. 33년 전 입사 당시 ‘포’와 ‘총’도 잘 구별하지 못했던 주성진 국방과학연구소 국방기술사업부장은 열심히 익히고 배우며 능력을 키웠다. 그 노력 덕분에 여러 기회를 얻게 된 그는 10호, 100호, 그리고 뒤이을 수많은 여성 연구원을 위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1호’ 타이틀의 무게를 원동력으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고, 묵묵히 해내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호 여성으로 먼저 행운을 거머쥔 자의 책임감
주 부장은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사할 때 특별한 사명감이나 드라마틱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국방과학연구소의 존재조차 몰랐다. “수학을 전공하고 석사 과정을 마쳤을 때 같은 과 남학생들이 국방과학연구소를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병역특례가 가능한 연구소였거든요. 저도 슬쩍 모집 공고를 봤는데, 제 전공인 수학(해석학)을 뽑더라고요. 게다가 그 해부터 여성을 뽑기로 했다는 거예요. 장난스레 친구들과 원서를 넣었어요.”
늘 ‘~인 남자’로 기재됐던 모집 공고가 ‘~인 자’로 바뀐 첫 해, 그는 운명처럼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사했고 1호 여성 연구원이 됐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기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여성을 바라보는 동료의 시선과 편견이었다. 하지만 연구소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도와준 것도 함께하는 동료였다.
“처음으로 사격장에 나간 날 사수들이 제 팀장에게 ‘왜 여자가 여기에 오느냐’고 항의했어요. 이를 꽉 물고 ‘일하러 왔다’고 말하려는데, 팀장이 한발 앞서 ‘주성진 연구원은 앞으로도 계속 올 거니까 너희들이 생각을 바꿔라’고 답했죠.”
성별을 넘어 안전한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료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남성 동료와 똑같은 일을 해내고 남성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동료의 수고를 덜어줬다. “처음에는 개발한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 출장을 갈 때 저를 파트너로 택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파트너가 여성이면 무거운 장비를 혼자만 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래서 오기로 남자 동료와 똑같은 무게의 장비를 들었어요. 시간이 차츰 지나며 힘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는 법을 배웠고, 대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죠.”
무기에 대해 하나씩 배워 나가며 10년쯤 연구에 매진하니 연구소 경영을 총괄하는 참모 부서에서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다. “연구를 내려놓고 경영 일을 하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았지만 그 자리를 택한 이유는 하나예요. 여성 연구원의 비중이 차츰 늘어가던 시기였는데, 이제 한 명쯤은 여성이 정책부서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죠.”
연구소에 최초의 모성보호실을 만들다
그의 한 걸음은 국방과학연구소 내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연구원의 모든 여성을 위한 여성 개발회를 설립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과 협력해 최초로 연구소에 모성보호실을 만들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임신 중인 후배가 간식을 먹고 있는 걸 발견했어요. 임신 중엔 수시로 간식을 먹어야 하는데 사무실에서 먹는 것이 눈치 보였던 거죠. 10년 전에 제가 똑같이 눈치 봤던 경험이 생각나며 너무 속상해 모성보호실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죠.”
이를 계기로 국방과학연구소의 사례를 다른 연구원에도 공유하고, 여성협회와 모성보호실을 개설토록 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는 “여성들이 스스로 필요한 것을 조직에게 알리고 요구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바쁜 일정에서도 열심히 다양한 기관의 여성을 직접 찾아가는 이유는 명확하다. “여성을 위한 당신의 노력을 지켜보는 이가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성들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조직은 여성에게 지원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모두 더할 나위 없는 행운으로 여기고 있었다. 먼저 행운을 거머쥔 자로서의 책임감으로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여성 연구원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잘 해내지만, 팀장이나 부장과 같은 직급을 꺼리죠. ‘이건 죽어도 못 해’가 아니면 일단 해보세요. 먼저 그 길을 걷는 저와 같은 선배를 보면서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분명 훌륭한 연구원을 넘어 독보적인 리더로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