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불완전한 표준모형 너머를 꿈꾸다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미국 물리학회 부회장 인터뷰

 

“아주 작은, 그래서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입자를 탐구하는 실험물리학자입니다.”


11월 8일 화상으로 만난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 물리학부 석좌교수의 자기소개는 단출했다. 그는 실험입자물리학, 특히 입자가속기 분야의 세계적 리더다. 2000년 미국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주목할 젊은 과학자 20인’에 그를 선정하며 ‘충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2004~2006년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페르미랩)에서 여러 나라의 연구자 700여 명으로 구성된 충돌실험그룹(CDF)을 이끌었으며, 2006~2013년에는 페르미랩 부소장을 지냈다. 지난 9월 8일 미국물리학회(ASP) 부회장으로 선출돼 내년부터 임기를 시작한다. 2023년에는 차기 회장을, 2024년에는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는 ‘여성’ ‘150cm의 작은 키’ ‘비영어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리더가 된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고 했다. 여성이 CDF 대표로 선출된 건 그가 처음이었다. “이 분야에 여성은 아주, 아주 극소수입니다. 과거에는 더 심했죠. 게다가 저는 체구도 작고, 영어도 서툴렀습니다. 연구자 수백 명의 투표로 선출되는 페르미랩 CDF 대표에 제가 뽑힌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연구자들과 즐겁게 교류했을 뿐인 걸요.”

 

 


그는 CDF 실험 대표로 지내며 약한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W보손’과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 중 하나인 ‘톱 쿼크’의 질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등 여러 성과를 냈다. 이후 페르미랩 부소장으로 활동할 당시에 그가 세운 성과도 여전히 물리학계에 파장을 남기고 있다. 올해 초 발표된 ‘뮤온 g-2’ 실험 결과도 그중 하나다. 기본입자의 하나인 뮤온의 자기모멘트를 측정했는데, 페르미랩에서 실험한 결과와 물리학에서 우주의 구성과 움직임을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인 ‘표준모형’에서 예상한 값이 달랐다. 이는 표준모형을 넘어서는 다른 이론이 존재할 가능성을 높인 결과다. 현재 페르미랩 연구자들은 정확도를 높여 뮤온 g-2를 측정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페르미랩 부소장으로 취임한 당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가속·충돌기인 대형강입자충돌기(LHC)가 한창 건설되고 있었습니다. 페르미랩이 보유하고 있던 충돌기인 테바트론(양성자·반양성자 충돌기)은 퇴역이 예고돼 있었죠. 페르미랩만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획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중성미자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가속기를 만들고 여러 실험을 설계했습니다. 뮤온 g-2 실험도 그렇게 시작됐죠. 지금은 페르미랩에 몸 담고 있진 않지만 여전히 실험 결과들을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결과들이 정말 많답니다.”

 

 

“실험물리를 선택한 건 정말 다행입니다”


김 교수는 고려대에서 이론물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수학을 좋아하던 그에게 이론물리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다 미국 로체스터대로 박사 유학을 떠나기 직전, 우연히 실험물리를 만났다. 


“한국에서 2월에 석사를 졸업하고 미국의 학기가 시작되는 9월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로체스터대에 계셨던 스티븐 올슨 교수님이 일본 국립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KEK)에서 실험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하셨죠. 3~4개월 간의 짧은 시간 KEK에서 실험을 했는데, 미국으로 넘어가 박사 공부를 하면서도 그때의 실험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올슨 교수님이 저를 좋게 봐주셨는지 이론물리를 공부하고 있던 저에게 편지로 실험의 진행 상황을 계속 보내주셨습니다.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실험물리를 선택하게 됐죠. 후회는커녕 그때 실험물리를 선택한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구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았다. 많은 그룹에서 리더 역할을 담당하며 일주일 사이에도 여러 국가를 오가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회의를 주재하고 있지만, 새벽 시간을 할애해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했다. “힉스의 발견으로 표준모형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하지만 표준모형은 중력을 설명하지 못하는 등 아직 완벽하지 않죠. 저는 아직 밝혀내지 않은 힉스 입자의 특성에서 완벽한 이론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암흑물질 또한 같은 이유로 저의 관심 주제입니다. 새벽녘 CERN에 있는 학생들과 이런 주제로 얘기하고는 하는데, 이 시간만은 진정 ‘나의 시간’입니다.”


그는 이 분야가 ‘아직 완벽하지 않아 더 재밌는 분야’라고 설명했다. “CERN에서 힉스 입자가 발견되고 그 질량이 예측값과 같아 한편으로는 좋고,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실험값이 예측값과 달랐으면 표준모형이 깨졌을 테니 그것도 재밌었겠다 생각했죠. 표준모형은 현재 가장 탁월한 이론이지만 왜 중성미자는 3가지인지, 왜 쿼크는 6가지인지, 왜 같은 쿼크도 질량이 천차만별인지 등 ‘왜’에 관한 물음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표준모형을 보완할 이론이 필요하죠.” 

 

“한국에는 일하는 여성들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영기’라는 이름은 종종 남성으로 오해를 받았다. 여성이 드문 과학 분야, 특히 물리학 분야에서는 그 오해가 더 공고하다. 그런데 한국 이름에 관한 편견이 없는 미국에서도 그는 ‘당연히 남성일 것’이라고 오해받곤 한다. 


“40여 년 전 중학생 때 경상북도 경시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라디오에서 수상자를 발표했는데 저를 남성으로 소개했습니다. 아마 그동안 남성이 우승해왔을 테니 당연하다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오해를 받습니다. 이 분야에 여성이 워낙 소수이니 큰 그룹의 리더는 당연히 남성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그는 물리학자, 넓게는 과학자를 꿈꾸는 여학생을 늘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미국의 학부 여학생을 위한 콘퍼런스를 2003년부터 매년 여름 열고 있는데, 현재는 미국 전역에 12개 지부가 생겼을 만큼 규모가 커졌다. 중·고등학생과 그들의 학부모를 위한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과학, 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출생률이 낮아져 일하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현재 한국에는 여러 이유로 일을 포기한 여성들이 많습니다. 훌륭한 인재를 숨기고 있는 셈이죠. 이들이 제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합니다.”


그는 과학을 연구하며 자신이 여기 있는 게 맞는지 의심하는 여성이 많다는 질문에 “당연하고 건강한 생각”이라며 “어떤 걸 더 배워나갈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만 생각하며 나아가는 것만이 의심을 거둘 유일할 방법”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리더로, 최초의 여성으로, 아시아 출신으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그는 예술을 통해 오롯이 그만의 시간을 즐긴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 과학만큼 노래와 춤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외국에 출장을 가면 시간을 내 그곳의 전통 무용을 배웁니다. 시카고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는 재즈 댄스를 췄죠. 지금은 한국무용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춤은 몸의 각 부위가, 음악과 동작이, 나와 상대방이 조화를 이루는 몸짓이다. 수십km 길이의 거대한 실험 장치를 배경으로 수많은 물리학자들을 진두지휘하는 그의 행보도 하나의 거대한 춤은 아닐까. “세계에 공헌하고, 평등하며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미국물리학회가 되도록 이끌어가겠다”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조화로운 춤의 흔적을 확인한다. 

 

2021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박영경 기자

🎓️ 진로 추천

  • 물리학
  • 화학·화학공학
  • 천문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