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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에 글을 싣는다 하니 주변에서 의아해 한다. 내 직업이 화가라서 그렇다. 미디어 아트 같은 첨단 장르도 아니고, 물감과 붓으로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게 내 일이다.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기법 덕분에 ‘하이퍼리얼리즘 아티스트’라는 그럴싸한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 기법을 사용하는 초상화가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과학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누군가 사주, 운세, 혈액형, 별자리 이야기를 꺼내거나 유사과학에 근거한 얘기를 하면 재미로 꺼낸 말에도 정색을 하는 내 그릇된 사회성에 익숙하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들은 내가 작업실 벽에 칼 세이건의 초상화를 걸어 뒀고,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팟캐스트를 즐겨들으며, 아직도 공룡 장난감을 사 모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학교에서 공룡 제일 잘 그리는 아이


어린 시절의 나는 고생물학자가 되기를 꿈꿨을 만큼 공룡에 미쳐 있었다. 그래서 공룡에 관한 책을 숱하게 읽었다. 관습적으로 분류하자면 나는 여러모로 ‘문과형’ 인간에 가까웠으나, 그토록 좋아한 공룡 덕에 과학과도 친할 수 있었다. 공룡에 관심을 가지면 지질학, 진화학, 생태학, 해부학, 형태학 등 다양한 분야를 자연스레 접하기 마련이니까. 공룡에 빠진 아이는 적어도 젊은 지구 창조론자는 되지 않는다.


유년기 책꽂이에 과학동아가 꽂혀있던 이유도 공룡이었다. 공룡에 관한 글이 짧게라도 실려 있으면 종이가 닳을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아들의 취향을 한껏 응원하고 도서 구매 비용을 절약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지원이 컸다. 저술된 지 한참 지난 교양서와는 달리 잡지는 최근 발견과 연구에 관해 알 수 있어 재미있었다. 1990년대 중반 기사 하나를 읽고 분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티라노사우루스보다 거대한 육식공룡이 아르헨티나에서 발견됐고, ‘기가노토사우루스’라 명명됐다는 소식이었다. 티라노사우루스를 일편단심 공룡의 왕으로 섬기던 초등학생 정중원은 제왕의 위상을 위협하는 도전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공룡에 대한 나의 애정은 늘 그림으로 표현됐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재능이 있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공룡을 주구장창 그려대다 보니 어느새 ‘공룡 잘 그리는 애’로 학교에 소문이 났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는 공룡 수십 마리가 등장하는 ‘중생대 풍경화’를 대문짝만하게 그려 학교 중앙 계단에 전시했다. 같은 해 과학교육 시범학교로 선정된 학교가 교내 환경 개선 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며 내게 특별히 맡긴 일이었다. 그림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 걸려있다고 하니, 나의 화가로서 첫 외주는 꽤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좇으니 진로는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무난한 학창시절을 거쳐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전공은 기대 이상으로 적성에 맞았고, 방학을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캠퍼스 생활이 즐거웠다.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하고, 이론을 배우고, 친구들과 야식을 먹으며 밤샘 작업을 하던 날들이 지금도 흐뭇하게 기억에 어린다.

 

연구 성과에 예술적 기량을 접목한 팔레오아트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없었을 리는 없다. 미대생의 가장 큰 부담은, 적어도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실기와 이론을 버무린 자신만의 작품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공연히 찾아오는 법이 없기에 수많은 작품과 작가들을 연구해야 한다. 당시 동기들 사이에서는 에곤 쉴레와 프란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가 유독 인기가 많았다. 미술학도라면 모를 수가 없는 스타들이다.


그런데 내 작업노트 한 구석에는 찰스 R. 나이트, 존 시빅, 제임스 거니 등 동기들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화가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어린 시절 봤던 수많은 공룡 책에 삽화를 그린 공룡 전문 화가, 이른바 팔레오아티스트(paleoartist)들이다.


팔레오아트(paleoart)는 과학적 고증에 맞춰 선사시대의 생물과 풍경을 재현한 예술을 지칭한다(접두어 ‘팔레오(paleo)’는 그리스어로 ‘옛날’을 뜻한다). 존재하는 모든 미술 장르를 통틀어 팔레오아트 만큼 과학과 불가분한 분야는 없을 것이다. 화가는 정확한 복원을 위해 과학자의 연구와 검증이 필요하고,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를 시각화하고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화가의 손이 필요하다. 그래서 뛰어난 팔레오아티스트는 동시대의 연구 성과와 예술적 기량의 행복한 결합을 성취해 낸다. 1930년대 미국 자연사박물관을 장식한 찰스 R. 나이트의 그림들은 여느 국립미술관에 걸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나는 사실 미대생이 된 이후 공룡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화가로서 나의 구미를 가장 자극한 분야는 초상예술이었다. 미켈란젤로, 홀바인, 반다이크, 렘브란트 같은 초상예술의 거장들을 추앙했고, 스스로도 같은 분야의 대가가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의 작가 리스트에 팔레오아티스트가 포함된 이유는 분명했다. 감성과 즉흥이 아닌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전제하는 팔레오아트의 방법론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 방법론을 참고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작업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룡을 고증하듯 초상화를 그리다


나는 한동안 유명 배우나 가족, 친구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들을 직접 만나거나 사진을 찍어 모공과 땀구멍, 터럭 한 올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 앞에 존재하는 얼굴들은 충분히 그렸으니, 이제 실제로 볼 수 없는 얼굴을 그려보면 어떨까.’ 컬러사진이 발명되기 전에 살았던 과거 인물들의 얼굴을, 마치 내가 실제로 본 것처럼 극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팔레오아티스트가 화석을 보고 살아있는 공룡을 재현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의 첫 주인공은 고대 아테네의 시인 호메로스였다. 팔레오아트가 화석에서 출발하듯, 나는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호메로스의 대리석 흉상에서 출발했다. 풍성한 수염과 매부리코, 깊게 팬 주름 등 기본적인 형태와 인상은 흉상에 기록된 모습을 그대로 참고했다.


다음은 자료 조사다. 팔레오아티스트는 다양한 연구 자료에 근거해서 공룡을 재현한다. 예컨대 티라노사우루스의 얼굴에서 어느 부위가 케라틴 조직으로 덮여있는지, 비늘은 어떤 모양인지, 이빨을 어느 정도 드러내야 하는지 등 사소한 특징까지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인물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다. 인종과 나이는 기본이고 눈동자와 머리카락의 색깔, 성격, 식습관, 즐겨 입은 의복의 재질에 관해서까지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았다.


문헌 자료와 함께 시각 자료도 수집했다. 사실적인 묘사를 하려면 관찰할 만한 참고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공룡을 실제로 볼 수는 없으니 팔레오아티스트는 새, 악어, 도마뱀 등 공룡과 비슷한 현생동물을 참고한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이태원 일대를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호메로스와 비슷하게 생긴 노인을 찾아 ‘길거리 캐스팅’을 했다. 마이클 피너란이라는 이름의 영국인이었다. 그를 작업실로 초청해 얼굴 사진 수백 장을 찍었다. 피부의 부위별 색감과 질감, 주름의 모양, 검버섯과 사마귀 같은 병변까지. 60대 백인 얼굴의 미세한 특징들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 그 사진들이 유용하게 쓰였다.

 


나머지는 예술적 허용(artistic license)의 영역이다. 표정과 각도, 조명과 배경색 등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는 나의 주관적 해석에 따라 연출된다. 서사적인 장치도 집어넣는다. 예컨대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의 환영이 뿜은 광채에 눈이 상해 시력을 잃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를 암시하기 위해 그의 눈에 뿌연 백내장을 묘사했다. 마찬가지로 빈센트 반 고흐의 얼굴을 재현하는 작업을 할 땐 콧등에 흉터를 그려 넣었다. 다혈질에 성격 장애까지 있었으니, 그의 얼굴에는 주먹다짐의 흔적이 분명 있었을 것 같았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얼굴을 복원할 때, 주둥이에 사냥할 때 생길 법한 생채기를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새로운 초상 시리즈는 첫 작품을 발표하자마자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내가 그린 호메로스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펴낸 호메로스 전기에 도판으로 실렸다. 이후 방송사의 의뢰로 다큐멘터리에 쓰일 신라시대 고승 혜초의 얼굴을 복원하기도 했고, 시인 이상을 기리는 문학관에도 내가 그린 이상의 초상화가 영구 전시돼 있다. 작년에는 조지 오웰의 얼굴을 그려 민음사에서 출판한 조지 오웰 전집 표지에 실었다. 이 책은 올해 초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1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화가


상상하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업에 비하면 내 작업은 답답하고 지루해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작업 과정이 고생스럽지 않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상과 실재를 함께 다루는 이 일이 무엇보다 재밌다. 판타지로만 존재하는 용보다는, 판타지와 현실을 모두 아우르는 공룡이 훨씬 더 매력적인 법. 막연한 상상보다는 관찰 가능한 현실 세계에 훨씬 더 많은 소재와 표현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지금의 그림을 그리기까지 과정을 거슬러 보니 시작점에 공룡이 서 있다. 공룡이 조류로 진화한 것처럼 유년기의 공룡 그림이 지금의 초상화로 진화한 셈이다. 어린 시절 공룡 삽화를 한가득 싣고 내게 예술적 자극과 영감을 선사해준 책들이 새삼 고마운 이유다. 그 중에는 물론 과학동아도 있다. 과학과는 무관해 보이는 나 같은 화가에게도 과학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소중한 시선이다. 아니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던 것을 설명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과학과 예술은 공통 조상을 공유하는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판이한 닭과 티라노사우루스가 알고 보면 같은 분류군에 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2021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정중원 하이퍼리얼리즘 화가
  • 에디터

    이영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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