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도 부시의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각국 언론은 10년의 세월을 하반신 마비로 살아온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가 미국 대선을 앞두고 10월 세상을 떠나자 부시의 재선에 상당한 악재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리브가 생전에 배아복제 허용을 촉구해왔지만 부시는 “생명파괴와 다름없는 배아복제를 금지한다”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케리 후보는 “수많은 난치병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배아복제를 허용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부시의 재선 성공으로 배아복제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강경한 입장이 당분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 대선이 있던 바로 그날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줄기세포 연구에 30억달러를 지원한다는 법안이 통과됐다. 앞으로 미국 내 줄기세포 연구자들이 대거 캘리포니아로 옮겨가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복제기술 강국으로 떠오른 우리나라도 배아복제에 대한 찬반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최근 정부가 세계적 복제 전문가인 서울대 수의학과 황우석 교수에게 거액의 연구비를 주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됐다.
과기부의 ‘묻지마 투자’
지난 10월 20일 황 교수 연구팀은 잠정 중단했던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재개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자 정부도 발 벗고 나섰다. 과학기술부가 최고과학자연구지원사업 명목으로 황 교수에게 총 265억원의 지원금을 내년 예산으로 책정한 것. 이 중 140억원으로는 서울대 수의대에 ‘황우석 연구소’를 설립하고, 나머지는 장기이식용 복제돼지 사육시설, 복제소 실험목장 등을 만드는데 쓸 계획이다. 한명의 과학자에게 돌아간 지원금으로 단연 역대 최고액이다.
정부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난치병 치료가 실용화되면 연간 500억달러(약 54조원)에 달하는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원 배경을 설명했다. 최근 열린우리당이 논의 중이라는 ‘의료도시’ 건설안도 줄기세포 치료 전문병원을 설립해 국내외 난치병 환자들이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치료를 받게 한다는 구상과 연결돼 있다.
그러자 민주노동당은 지난 11월 11일 정부의 ‘황우석 교수 퍼주기’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퍼주기에 대한 과학계의 반응도 냉소적이다. 한 생명과학 연구자는 황 교수에 대한 정부의 집중 지원에 대해 “솔직히 부럽다”며 “연구할 의욕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황 교수 이외에도 복제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나 세계적 저널에 논문을 실은 과학자는 많다.
줄기세포 치료는 아직 먼 얘기
줄기세포는 인체 내 여러 세포로 분화할 수 있어 치료용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 줄기세포를 신경세포로 분화시켜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환자에, 심장근육세포로 분화시켜 심장병 환자에, 혈액세포로 분화시켜 백혈병 환자에 이식하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배아 줄기세포를 실제 치료에 적용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3개 있다. 첫째는 줄기세포 확립 단계. 하나의 배아에서 하나의 줄기세포주를 얻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재는 수많은 배아에서 한두개 줄기세포주를 얻는 게 고작이다. 마리아병원 생명공학연구소 박세필 소장은 “동물 난자에 동물 체세포를 넣는 기술도 성공률이 15~20%를 넘지 못한다”며 “현재 이 기술을 인간배아복제에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다음은 줄기세포가 분화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을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줄기세포가 치료에 필요한 특정 세포로 분화하도록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화연구는 세계적으로도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최근 미국 미네소타대 연구팀은 인공수정 후 남은 배아에서 얻은 줄기세포로 혈액세포를 만들었다고 미국 혈액학회지에 발표했다. 하지만 영국 해머스미스병원 의과학연구소 크리스 히긴 박사는 “분화연구에 고작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분화과정이 밝혀져야 비로소 줄기세포를 임상에 적용하는 셋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인간유전체연구실 유대열 박사는 최근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서 열린 신경과학회에서 1000편이 넘는 줄기세포 논문이 발표됐지만 2, 3단계에 관한 우리나라 논문은 10여편 뿐이었다”며 국내 줄기세포 연구가 아직 초보단계임을 지적했다.
황 교수 연구팀은 여성에게서 수정되지 않은 난자를 제공받아 핵을 제거한 다음 그 여성의 체세포를 넣어 유전자를 복제한 배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꺼내 배양하는데 성공했다. 동물 난자에 인간 체세포를 넣는 시도는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인간 난자에 인간 체세포를 이식한 인간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한 것은 황 교수가 처음이었다. 체세포 핵이식으로 만든 인간배아 줄기세포는 체세포 핵에서 유래한 염색체를 갖기 때문에 이식해도 면역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단 미토콘드리아의 염색체는 난자에서 온 것이므로 유전적으로 100% 동일한 복제는 아니다).
그런데 황 교수의 연구결과는 줄기세포 연구의 1단계에 해당한다. 줄기세포를 얻는 몇가지 기술 중 하나를 성공시켰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줄기세포를 특정 세포로 분화시키고, 사람에게 이식해 부작용 없이 난치병을 치료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런 상황에서 줄기세포 치료 전문병원 설립 얘기까지 나오는 것은 너무 ‘앞서가고’ 있는 느낌이다.
최초로 인간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해낸 황 교수의 연구는 분명 세계가 인정한 성과다. 그러나 연구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과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울산대 의대 인문사회과학교실 김장한 교수는 “과학적 성과를 섣불리 확대해석하는 것은 첨단연구에서 제기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성체 줄기세포 치료 가능성 제기
정부의 황 교수 ‘편애’ 정책이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배아복제 연구가 생명윤리법에 위배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생명윤리법에 따르면 황 교수의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심의를 거쳐 허용여부가 결정돼야 한다. 그러니 법적으로 허용될지 안될지 불확실한 연구에 거액의 예산부터 책정한 셈이다.
윤리학자나 종교계 인사들은 복제한 배아를 자궁에 이식하면 곧바로 인간복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배아복제를 반대한다. 또 하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배아를 연구 목적으로 파괴해서는 안된다고도 주장한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완벽한 인간복제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동물실험으로 증명됐다”며 “핵을 제거한 난자는 생식능력이 없기 때문에 생명으로 간주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체세포를 넣어도 완전한 생명체로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굳이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지 않더라도 골수나 탯줄 등에 남아있는 줄기세포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를 성체 줄기세포라고 한다. 그러나 황 교수를 비롯한 배아 줄기세포 연구자들은 성체 줄기세포가 배아 줄기세포에 비해 분화능력이 떨어지는데다 얻을 수 있는 양도 적다고 지적해왔다.
그런데 최근 조선대 의대 줄기세포임상시험팀이 성체 줄기세포도 치료용으로 사용 가능함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20년 동안 하반신이 마비됐던 척수장애 환자의 척수에 탯줄혈액에서 분리한 성체 줄기세포를 이식했다. 그랬더니 운동과 감각신경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 연구를 주도한 산부인과 송창훈 교수는 “수술이 성공했다고 단언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경과가 좋게 나타나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성체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가톨릭대 의대 오일환 교수는 “이번 연구는 아주 초기단계로 수술이 실용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도 “배아 줄기세포보다 부작용이 적고 윤리문제에도 위배되지 않는 성체 줄기세포 연구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배아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한양대 생명과학부 김철근 교수는 “다른 환자에게 시도했을 때도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지 확인해야 하고, 신경이 정말 성체 줄기세포로부터 자라났는지를 증명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체 줄기세포로 환자가 치료됐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고 의문을 나타냈다.
결국 배아나 성체 줄기세포 모두 질병을 치료하는데 쓰일 ‘가능성’은 열려있지만 둘 다 아직 연구 초기단계다. 이런 상황에서 황 교수의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만 집중 지원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한 몇몇 과학자나 윤리학자들은 황 교수 연구팀이 난자를 확보한 과정이 윤리적으로 타당한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배아를 만들려면 수정되지 않은 난자가 필요하다. 황 교수 연구팀이 1개의 줄기세포주를 얻기 위해 사용한 난자는 자그마치 242개에 달한다. 여성은 한달에 하나씩 난자를 만든다. 따라서 연구에 필요한 많은 난자를 얻기 위해 여성에게 호르몬제를 먹여 과배란을 유도하고, 이를 복강경 수술로 채취했다. 이 과정이 여성의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배아복제가 본격화되면 난자가 불법적으로 대량 매매될 가능성도 있다. 또한 황 교수 연구팀처럼 배아복제에 필요한 난자를 여성에게서 채취하는 방법 말고 불임 치료 후 남은 난자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인공수정을 목적으로 채취한 후 냉동 보관해둔 난자는 약 5년이 지나면 폐기처분한다. 이 난자를 연구에 사용하는 것이다.
황 교수 연구팀은 난자를 제공한 여성의 동의를 받았고 적법한 심사를 거쳐 연구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에 한국생명윤리위원회는 지난 5월 홈페이지에 성명서를 내고 이 연구를 승인받은 과정과 난자를 제공한 여성의 동의서를 공개할 것을 황 교수 연구팀에 촉구했다. 그러나 황 교수 연구팀은 이에 대해 아직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이언스’ 8월 13일자는 이 같은 논쟁에 관한 한국 과학자들의 상반된 견해를 나란히 실었다. 한국생명윤리학회 소속 한양대 송상용 석좌교수는 “황 교수 연구팀이 인간복제나 치료용 복제가 사회적으로 합의를 얻기 전에 배아복제 연구를 진행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현했고, 그 답변으로 황 교수와 서울대 의대 문신용 교수가 “우리 연구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인정하나 이번 연구는 법적, 윤리적 규제 안에서 이뤄졌다”고 반박한 것.
결국 윤리논란이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연구에 정부가 전폭적 지원을 자청한 형국이다.
치료용 배아복제 허용해야
황 교수에게 연구비가 집중되는 것을 문제 삼는 생명과학자들이 치료용 배아 줄기세포 연구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배아 줄기세포가 치료용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을 확신하고 현실화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의 도전을 비판할 수는 없다. 단 연구과정이 법적, 윤리적 규제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지난 11월 9~12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에서 열린 세계생명윤리학회에 참가한 미국 하버드대 댄 브록 교수는 “원숭이나 개로 실험하는 것과 인간배아를 실험에 쓰는 게 뭐가 다르냐”며 “결국 연구목적의 도덕성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배아복제의 가이드라인을 엄격히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10월 22일자 ‘사이언스’는 과학자와 윤리학자 1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워싱턴에 모여 미국 내 줄기세포 연구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자발적으로 만들고자 논의한 사실을 소개했다. 위원회는 실험방법부터 줄기세포주 분배 문제까지 연구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고, 내년 2월까지 가이드라인을 확정할 예정이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이미 시작됐다. 이 연구가 법과 윤리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우리나라도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줄기세포 연구를 무조건 지원하는 것보다 우선 과학자들에게 배아복제 연구의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인간복제 전면 금지 포기한 유엔
유엔이 인간배아 복제를 전면 금지하는 조약을 만들려던 계획을 결국 포기했다.
유엔의 사법위원회인 제6위원회는 지난 11월 19일 “인간배아 복제를 둘러싼 회원국 간의 갈등이 심각해져 이 문제에 대해 구속력 있는 조약 대신 형식적인 선언문만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가 낸 중재안을 수용한 것으로, 유엔은 실무그룹을 조직해 인간복제 선언문을 만든 다음 제6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발표할 예정이다.
유엔은 이 선언문을 통해 “각국 정부 차원에서 배아복제 연구로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할 방침이다. 유엔은 특히 “여성이 생명과학기술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1년 이래 유엔 회원국들은 배아복제 연구 허용을 둘러싸고 의견 차를 좁히지 못했다. 올해 제59차 유엔총회 기간 중 10월 21~22일 있었던 토론에서도 역시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다. 전선은 뚜렷했다. 코스타리카안 대 벨기에안.
모든 복제를 금지하는 코스타리카안은 사실상 미국 부시 행정부 주도하에 이탈리아 필리핀 노르웨이 케냐 등 61개국이 지지한다. 반면 벨기에가 낸 초안은 인간(개체)복제는 금지하되 치료나 연구 목적의 복제 허용 여부는 각국의 재량에 맡기자는 내용. 한국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21개국이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