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7월 7일은 조선 총독 구로즈미 기요타카가 항일결사조직 불새단 단원들에게 암살된 날이다.
세계 역사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날의 진실은 흐릿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에서만도 이 사건을 다룬 80여 편의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가 만들어졌지만 구로즈미와 주인공인 불새단 단원 네 명의 이름을 제외하면 내용이 모두 다르다. 2016년 영화 ‘암살’은 심지어 초자연현상을 끼워 넣은 호러 영화이고, 간신히 암살 미수 현장에서 피투성이로 살아남은 총독이 경술왜란 당시 죽은 황족 유령들에게 살해당해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나온다. 많이들 지적했지만, 구로즈미가 별 정치적 입장 없는 흐리멍덩한 인물이었고 순전히 그 때문에 그 직위에 앉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 묘사는 분명 과함이 있다. 이와 별도로 불새단 조직원들의 희화된 묘사도 지적을 받았지만, 당시 이시하라 주석의 전범 옹호 발언으로 인한 반일 감정에 힘을 얻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2021년 7월 7일, 거사 90주년을 맞아 공개된 최윤옥의 수기와 다른 불새단 조직원들이 남긴 관련자료를 통해 당시의 진상이 보다 상세하게 알려지게 됐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다시 점검해 보기로 하자.
1901년 6월 14일, 화성에서 쏘아 올린 전투 우주선들이 영국을 침략했다. 서리주에서 시작해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침공은 지구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감염된 화성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보름 만에 중단됐다. 비슷한 침공은 1938년 미국, 1949년 에콰도르에서도 있었지만, 이미 대비가 돼 있던 지구 군대에 의해 비교적 단기간에 격파됐다.
화성인의 침공은 인류 역사의 진행 방향을 바꿨다. 그 전까지 전쟁 직전까지 갔던 유럽 국가들은 다른 행성에서 온 침략자의 위협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연합했다. 대신 앞으로 또 있을 수도 있는 화성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핑계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착취가 가속됐다.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됐고 곧 경술왜란과 조선의 식민지화로 이어진다.
제2차 화성인 지구 침공이 있기 전까지 영국은 외계인 침공을 받은 유일한 국가였고, 외계인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했다. 영국은 이를 거대한 외교적 블러핑의 도구로 삼았다. 수많은 국가에서 기술 공유를 목적으로 영국을 지원하고 협조했다. 뒤로는 기술 탈취를 노린 수많은 스파이 행위가 잇달았다. 이후 부인됐지만, 화성 독가스와 열광선 무기를 연구하던 일링과 사우스 켄싱턴 연구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고의 원인을 외국 스파이의 사보타주라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국의 역공학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기계공학, 항공공학, 야금학 분야에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고 정부는 이를 과장해 선전했다. 하지만 화성 전쟁 기계는 당시 지구인들이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발전돼 있었고 달랐다. 일단 바퀴와 축이 없어서 기존 지구의 기계에 접목이 어려웠다. 이들의 작동방식을 따라가려면 화성의 에너지 압축 기술과 인공지능 기술을 이해해야 했는데, 이건 중세 유럽인에게 원자로를 던져 주고 똑같이 만들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차례의 대참사 이후 영국은 관련 연구소들을 식민지로 옮겼다. 인도,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에 다섯 개의 연구소가 들어섰다. 이유는 순전히 인종차별적이었다. 본국에서는 더 이상 민간인 희생자를 낼 수 없었다. 1924년 말레이시아의 샤알람, 1929년 나이지리아의 카두나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고들은 이 제국주의자들의 계산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고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가 총 1만 7000명에 달했는데도, 영국 정부는 1986년까지 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연구소에서 흘러나온 화성 독가스로 카두나의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던 1929년, 세실 하드윅 교수가 이끌고 있던 인도 망갈로르의 연구소에서는 일련의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화성인의 복제와 통제에 성공한 것이다.
하드윅의 연구는 화성인의 정체에 대한 의문과 연결돼 있었다. 당시 지구인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침공한 이 기괴한 모양의 생명체가 화성에서 진화한 초지능의 고등생물이고, 다른 대륙의 선주민들을 학살하고 땅을 차지한 유럽인들처럼 지구를 정복하러 왔다가 계산 착오로 실패했다고 믿었다. 진화론과 인류 역사에 기반을 둔 이 가설은 한동안 타당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기엔 너무 기괴했다.
일단 화성인의 행동은 초지능의 고등생물치고는 구멍투성이였다. 지구의 미생물에 대비하지 못해 감염돼 죽어간 건 누가 봐도 바보 같았다. 화성에서 발사한 우주선의 숫자는 겨우 24대에 불과했는데, 아무리 이들이 갖고 있는 기술이 뛰어나도 지구 전체를 정복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우주선은 화성인과 기계를 지구로 보낸다는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했지만, 심지어 20세기 지구인들이 보기에도 원시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점점 나빠지는 화성의 환경 때문에 지구를 침략한다는 생각 자체가 이상했다. 이들이 화성에서 자체 진화했다면 화성의 기후는 몇 억 년 동안 바뀐 게 없었기에 그 환경은 그들에게 정상이었고, 화성인이 가진 에너지 압축 기술만으로도 충분한 자체 생존이 가능했다. 굳이 위험한 미생물이 들끓고 중력이 강한 이웃 행성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하드윅의 팀은 몰랐지만, 이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침공에서도 화성인들은 이전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기만 했다. 이는 누가 봐도 고등문명이 열등한 문명을 대상으로 벌인 정복 전쟁이 아니었다.
생물학적 문제도 있었다. 화성인이 그렇게 쉽게 지구의 미생물에 감염됐다는 것은 이들이 지구 생명체와 의외로 가까운 친척 사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들이 우주선에 태우고 왔던 화성 생명체의 시체들은 누가 봐도 지구인과 비슷했다. 사람들은 이 시체가 화성인의 먹잇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성인은 이미 에너지 압축 전지에 연결된 영양 순환 장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설은 의미가 없었다. 화성인들이 영양 순환 장치의 연료로 쓰려고 지구인들을 사냥한 건 사실이었지만 지구에 도착한 뒤로도 이들 외계 생물 시체는 멀쩡한 상태로 남아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먹잇감이라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그리고 같은 뿌리에서 진화한 두 동물의 모양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로지 뇌와 손만 남아있는 생명체의 모양이 과연 정상인가.
세실 하드윅은 지금은 사실로 확인된 가설에 도달했다. 지구를 침략한 생명체는 진짜 화성인이 아니었다. 우주선이 싣고 온 기계를 조종하기 위해 설계된 인공 두뇌였다. 진짜 화성인은 시체가 돼 우주선 구석에 박혀 있던 인간 비슷한 생명체였고 이들은 지구인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들의 침략행위가 그렇게 이상했던 것은 진짜 화성인들이 멸종했거나 문명의 통제권을 잃었고 이들의 기계 문명이 고장 난 프로그램에 따라 오작동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인의 보존된 시체를 가져온 것도 그 때문이라 추정된다. 특정 상황에서 주인을 지구에 귀환시킨다는 명령이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었고 그것이 불완전한 상태로 지켜진 것이다.
하드윅은 인공 두뇌에 이 모든 프로그램이 내장돼 있고 이 정보가 그대로 후손들에게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 가설은 화성 기계에 바퀴가 없다는 데 기반을 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바퀴 정보가 든 인공 두뇌의 번식이 중단됐고 바퀴 지식이 없는 개체만이 번식에 성공해 지금의 화성 기계 문화가 유지됐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들 정보가 학습을 통해 이어졌다면 바퀴의 결여라는 이상한 상황에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프로그램된 기계라면 인간이 적절한 조건 안에 통제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약한 추론이었지만 내장된 프로그램이라는 가설 자체는 어쩌다 보니 맞았다.
하드윅의 지휘 아래 망갈로르의 과학자들은 폴립 상태로 보존된 어린 화성 인공 두뇌의 시체에서 떼어낸 세포를 갖고 화성 인공 두뇌를 복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재생산이 쉽도록 최대한 단순하게 설계된 기계였기 때문이다. 3개월만에 청소년 수준으로 자란 인공 두뇌는 실제로 프로그램된 지식을 하나씩 되살리기 시작했고 망갈로르 팀은 부분적으로나마 화성어를 해독하는 데에 성공했다.
망갈로르의 연구는 극비로 진행됐지만, 인도 어딘가에서 영국 과학자들이 무언가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로 퍼졌고 각국의 스파이들이 벌떼처럼 인도로 모여들었다. 하드윅 팀은 허겁지겁 연구소를 정리하고 무균 탱크 안에 든 인공 두뇌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완벽하게 뒷정리를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화성어 연구 결과의 파편들, 새 인공 두뇌를 이용해 만든 화성 기계 부품 상당수가 연구소에서 빼돌려졌다. 이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망갈로르 연구소에서 일하던 수학자 디완 굽타였다. 무정부주의자였던 굽타는 화성 문명의 지식을 대영제국이 독점하는 시기가 길어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굽타가 빼돌려 1년 뒤에 익명으로 공개한 MH290582F 문서의 첫 두 페이지는 이후 화성어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리며 마르코니 연구소가 잡아낸 화성 신호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굽타의 사보타주를 통해 영국은 하드윅 팀이 발견한 화성 지식 독점 기간을 10년에서 20년 정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굽타가 빼돌린 화성 기계들은 캘커타의 암시장을 통해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이들 대부분은 실용적인 면만 봤을 때 그냥 쓸데없었다. 어떤 기계는 금속 조각을 구멍에 넣어주면 콩깍지 비슷한 모양의 덩어리를 계속 만들어냈다. 어떤 기계는 평면 위에 놓으면 여섯 개의 다리로 잽싸게 움직이며 복잡한 도형을 끝도 없이 그려댔다. 작동 방식은 알 수 없지만 결국 기능은 기름을 넣어 줄 필요가 없는 라이터에 불과한 것도 있었고, 결정적인 부품이 빠졌는지 윙윙거리는 소음을 내며 공회전만 하는 기계도 있었다.
공회전 기계 다섯 개가 캘커타에서 상하이를 거쳐 불새단에게 넘어간 건 1930년 12월 25일이었다.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장창국의 아들 장준형이 ‘경성의 카나리아’로 불리던 소프라노 가수이자 연극 배우 최윤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던 것이다. 둘은 다음 해 가을에 결혼할 예정이었다. 적어도 장준형이 멋대로 세운 계획은 그랬다.
최윤혜가 받은 선물은 주사위를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모양의 직육면체 다섯 개로 이를 십자 모양으로 연결하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의 부속품들이 움직였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물건이었지만 아름다웠고 가구 위에 올려놓고 화성 물건이라며 자랑하기엔 딱이었다. 화성의 에너지 압축 전지로 작동했기에 그냥 둬도 21세기까지는 돌아갈 물건이었다.
오로지 불새단 첩자 임무 때문에 장준형을 만났고 이 남자에겐 가벼운 혐오와 귀찮음 이상의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최윤혜는 그 물건을 불새단의 핵심 5인 중 한 명이자 안과의사였던 언니 최윤옥에게 넘겼다.
섣달 그믐날 불새단 총재 조영효 집에 모인 핵심 5인은 최윤옥이 상자에서 기계를 꺼내기가 무섭게 이를 항일 투쟁에 써먹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이런 물건이 상하이 골동품 가게에 풀릴 정도라면 곧 일본 정부에게도 들어갈 것이다. 그들이 대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의 용도가 뭐지? 상관없었다.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라면 재래식 도구로 거사를 벌인 뒤 화성 기계를 썼다고 홍보하면 그만이었다. 이들은 흩어지기 전에 ‘화성검’이라는 작전명까지 만들었다.
몇 달 동안 쏟아 부은 인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새단은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기계의 기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오로지 가설만 생겼다. 십자 모양일 때만 작동했지만 중심에 놓는 기계를 정사각형 모양으로 배치한 네 기계 앞 머리 위치에 놓았을 때 가장 그럴싸한 모양이 만들어진다는 것. 각각의 기계를 연결할 때 튀어나오는 막대가 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아마도 이것은 곤충 모양의 움직이는 기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작동시키지?
1931년 4월 2일 오후, 모든 게 아주 뜬금없이 해결됐다. 간호사들이 퇴근한 뒤에도 병원 금고 안에 숨겨놓은 기계벌레와 씨름하던 최윤옥의 머릿속에 산만하면서도 단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기계를 제대로 움직이려면 에너지 압축 전지 말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할지도 몰라. 그 때 영국 침략 당시 화성인들이 지구인의 피를 빨아 양분을 섭취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이들이 단순히 피만 빨아먹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분석이었지만 다들 화성인을 뱀파이어라고 생각했다. 최윤옥은 하드윅의 가설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화성인과 전쟁 기계가 거의 하나의 기계처럼 연결돼 있다는 것은 알았다. 만약 이 벌레 안에 배가 고픈 무언가가 숨어 있다면? 그것에게 먹이를 주면 어떻게 될까.
최윤옥은 벌레를 꺼내 탁자 위에 놓고 왼쪽 엄지에 상처를 내 피를 벌레의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몇 분 동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실망해서 반창고를 찾으려 일어나려 하는데, 갑자기 벌레는 꿈틀거리며 탁자 위의 핏방울을 빨아마셨다. 최윤옥이 다시 떨어뜨린 핏방울을 조금 더 먹은 벌레는 여덟 개의 다리를 뽑았다. 머리에 난 두 개의 구멍에서 붉은빛이 반짝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밖에 나가보니 건물 주인인 박규익이 앞에 서 있었다. 막 예순을 넘긴 이 남자는 최윤옥이 자기 건물에 병원을 연 2년 전부터 계속 귀찮게 추근거렸다. 심지어 집에 30년 동안 아들 넷을 낳아준 아내가 있었는데도 그랬다.
남자는 당황한 최윤옥을 밀치며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간절한 얼굴을 보니 뭔가 할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 사정이 뭔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벌레가 갑자기 뛰어나와 박규익의 목을 물었던 것이다. 벌레의 몸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순식간에 성대를 도려냈기 때문에 남자는 피를 뿜으며 죽어가면서도 신음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공격은 남자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멈췄다. 칼날이 다시 몸 속으로 들어갔고 벌레는 작은 머리를 들어 최윤옥을 올려다봤다. 상자 안에 들어가 금고 안에 갇히는 동안에도 그것은 반항하지 않았다.
최윤옥은 동료들을 불러 조용효의 소유인 근처 농장으로 시체를 옮겼다. 시체는 화성 기술이 활용된 분쇄기로 들어가 닭모이가 됐다.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불새단 단원이고 최윤혜와 같은 극단 소속인 안유택이 박규익으로 변장한 채 이틀 동안 밤마다 경성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녔다.
불새단은 이제 스펙터클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으며 어디에든 숨겨갈 수 있는 엄청난 무기를 갖게 됐다. 단지 조종을 위한 테스트가 더 필요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은 이들이 그렇게까지 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기미 봉기 때 눈 앞에서 친구와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은 아무리 정상으로 돌아온 척해도 내면은 갈기갈기 찢겨 있기 마련이었다. 불새단 단원들은 죽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꽤 긴 리스트를 갖고 있었고 최윤옥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섯 명이 희생됐다. 두 명은 종로경찰서 형사였고 세 명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였다. 조선인 네 명, 일본인 형사 한 명이었다. 이들은 납치돼 닭들이 박규익의 시체 조각을 먹고 있는 농장으로 끌려가 테스트 대상이 됐다. 사흘에 걸친 연구 끝에 불새단은 살인벌레의 조종법을 익혔다. 일단 벌레는 통제된 상태에서 자신의 피를 먹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피를 먹이고 자극을 주면 직선 방향에 있는 인간을 공격했다. 소리에 예민했기 때문에 개 호루라기를 이용해 공격 순간을 확정할 수 있었다. 테스트에 쓰인 시체는 모두 닭모이가 됐다. 전과 마찬가지로 극단을 동원한 알리바이 공작이 이어졌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갑작스러운 실종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지만, 단서는 불새단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확신이 선 불새단은 거사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표적은 자살한 전임자를 대신해 5월에 부임한 조선 총독 구로즈미 기요타카였고 날짜는 총독의 생일인 7월 7일이었다. 야심을 조금 더 크게 잡아 천황을 노리는 게 어떠냐는 아이디어도 제시됐지만, 보다 비중이 작더라도 성공률이 높고 의미가 분명한 표적을 죽이는 게 정치적으로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무엇보다 반년 전 요란한 희생자를 내고 실패로 끝난 천황 암살 시도가 있어서 흥이 떨어졌다.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최윤혜와 장준형을 통한 연줄이 있었다. 최윤혜는 파티에서 슈베르트의 ‘물 위에서 노래함’과 ‘음악에’를 부를 계획이었다. 최윤혜는 언니와 동행을 손님 리스트에 올렸고 피아니스트로 동료 한 명을 더 데려올 수 있었다. 최씨 자매, 배우 안유택과 피아니스트 오우일이 암살단 최종 멤버가 됐다. 최윤옥의 수기에 따르면 이들은 슈베르트의 공연이 끝난 뒤 총독을 암살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체포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만세는 최윤옥 혼자 해도 됐는데, 불새단 높은 양반들은 남자들도 있어야 한다고 우겼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예상대로 풀리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불새단이 자기네들이 쓰고 있는 무기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건 주어진 조건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벌레 지능의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벌레는 첫 번째 핏방울을 먹은 뒤로, 이제 영국인 과학자들이 징기스칸이라고 이름을 붙인, 지구의 유일한 화성 인공 두뇌와 중성미자 통신장치로 연결됐다. (이 장치는 1970년대까지 작동원리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텔레파시로 여겨졌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하드윅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프로그래밍돼 있었다. 몇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상하게 고장이 난,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는 정교한 기계였다. 이 상황에서 하드윅 팀과 불새단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면서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불새단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버킹엄셔주 시골 저택으로 연구소를 옮긴 하드윅의 팀은 화성어 어휘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그 사전은 고대 지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몇몇 단어들은 시베리아 매머드와 같은 멸종된 거대 포유류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친척들이 돌도끼를 쓰던 시절 이웃 행성으로 우주선을 발사한 문명이 지구에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의 5분의 1이 지난 지금에도 그 문명의 기원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드윅의 언어학자들은 이 단어들이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문장으로 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몇몇 사람들은 지구 침공의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측면 일부가 이 종교와 연결돼 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원래 종교는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건 지금 무균 탱크 안에 갇혀 있는 징기스칸이 종교적 행동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었다.
당시 중성미자 통신장치에 대해 몰랐던 하드윅 팀은 자기네들이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징기스칸이 통신장치를 심어 둔 기계가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 심지어 그 중 3분의 1은 디완 굽타가 빼돌려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이들은 굽타가 1947년에 회고록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 물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굽타가 치밀하기도 했지만, 대영제국의 관료체제가 그렇게 건성이었다.
기계 대부분은 조각나 있거나 핵심 부품이 빠져 있거나 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불새단의 살인 벌레를 포함한 몇몇 기계들은 사정이 달랐다. 구자라트의 몇몇 지역 신문엔 주로 늙은 거지들을 사냥하는, 타원형 금속판이 이마에 박힌 여자 뱀파이어에 대한 기사가 실렸지만 아무도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연료 탱크에 구멍을 내고 석유를 빨아 마시는 금속 쥐를 목격한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이 역시 믿는 사람은 없었다.
7월 7일이 찾아왔다. 전날 여섯 번째 희생자로 최종 테스트를 마친 암살단은 벌레를 다섯 조각으로 쪼개 나눠 가졌다. 최 자매는 목걸이로 위장했고 남자들은 벨트 버클에 붙였다. 나머지 하나는 최윤옥이 핸드백에 숨겼다. 그 안에서 기계는 그냥 작은 화장품 케이스처럼 보였다.
암살단은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무사히 총독관저에 들어갔다. 파티는 기대보다 화려했다. 선임 총독의 자살을 둘러싼 소문과 우울함을 지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신임 총독은 본국에서도 알아주는 파티광이었다.
먼저 와 있던 장창국 남작이 최 자매에 아는 척을 했다. 남작은 왜 아들이 최윤혜와 같이 오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그 이유는 여자친구 집 열쇠를 멋대로 복사해 갖고 있던 장준형이 동료들과 함께 한참 암살 계획을 최종 조율하고 있던 최윤혜의 아파트에 갑자기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자매는 대충 둘러댔고, 남작은 엉겁결에 납치돼 여섯 번째 테스트 희생자가 됐다가 지금은 닭모이가 된 아들을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최윤옥은 동료들이 건내 준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 2층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하나로 조립했다. 속을 도려낸 ‘골짜기의 백합’ 일본어 번역본 안에 벌레와 면도칼, 개 호루라기를 숨기고 여자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아랫배를 움켜쥔 구로즈미 총독이 뒤뚱거리며 옆의 남자화장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성긴 턱수염과 툭 튀어나온 배가 우스꽝스러운 대머리의 키 작은 노인네였다. 저 별거 없어 보이는 남자 때문에 남은 인생을 포기해야 하다니 실망스러웠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최윤혜와 오우일의 슈베르트 공연이 있었다. 원래는 두 곡만 부를 계획이었지만 반응이 워낙 좋아서 앙코르로 ‘물레 감는 그레첸’도 불렀다. 곡이 끝날 무렵 최윤옥은 면도날로 왼손 엄지를 찔러 벌레에게 피를 먹이고 개 호루라기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갑자기 장창국 남작이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총독 옆으로 걸어갔다. 그와 함께 하인 두 명이 하얀 천에 가려진 무언가가 올려져 있는 바퀴 달린 테이블을 끌고 만찬장에 들어왔다. 남작은 서툰 일본어로 총독의 생일을 축하했고, 이날을 위해 자신이 희귀한 선물을 가져왔다고 우쭐거렸다. 총독 옆에 테이블을 놓고 하인들이 뒤로 물러나자, 남작은 거창한 동작으로 천을 벗겼다.
36개의 화성 기계로 만들어진 작은 탑이 찰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서 있었다. 모두 최윤옥이 들고 있는 벌레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기계였다. 장준형은 여자친구에게 주려고 아버지가 모은 수집품 중 다섯 개를 몰래 빼돌렸던 것이다.
“화성 기계입니다. 영국인들이 인도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만들고 있었지요. 상하이와 베이징에 조각조각 떠돌고 있는 걸 제가 사람들을 시켜 모아왔습니다.”
남작이 말했다.
“멋있군요. 어디다 쓰는 것입니까?”
총독이 물었다.
“이것만으로는 특별한 기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다른 기계와 연결되면….”
이는 장창국 남작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갑자기 탑이 무너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골짜기의 백합’을 탈출한 벌레가 총알 같이 튀어나와 남작의 목을 찢어발겼던 것이다. 5초도 지나기 전에 남작은 피투성이 시체가 돼 쓰러졌고 목에서 솟아오른 피는 얼마 전까지 탑을 이루고 있던 기계 부품을 적셨다. 피맛을 본 기계들은 순식간에 일곱 마리의 살인 벌레가 돼 만찬장의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최윤옥은 군중을 밀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총독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마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사각형의 기계가 달라붙어 있었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고 기계는 회전하며 뇌 속으로 들어갔다.
“야만인들, 코끼리를 사냥하는 자들!”
갑자기 눈을 뜬 총독은 잘난 척하는 영국식 영어로 외치며 죽어가고 달아나는 군중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버킹엄셔주 연구소와 하드윅 팀의 연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여기 사람들은 이 말투가 징기스칸에게 영어를 가르치려 시도한 세실 하드윅과 얼마나 닮았는지 몰랐다. 최윤옥이 벽에 걸린 장식용 칼을 뽑자, 총독은 머리가 뜯겨 나간 채 죽어있는 경호원의 상의에서 권총을 꺼냈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안전장치에 걸려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총독은 총을 집어던지고 2층으로 달아났다. 암살단은 그 뒤를 쫓았다.
오우일이 서재로 뛰어들어간 총독의 엉덩이를 차 넘어뜨렸다. 최윤혜와 안유택이 미친 듯이 웃어대는 노인의 몸을 뒤집고 팔다리를 잡았다. 최윤옥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상아 페이퍼나이프를 가져와 이마에 난 구멍을 쑤셨다. 1분쯤 애를 쓰자 뇌 속의 기계가 얌전히 딸려 나왔고 총독의 웃음은 멎었다. 암살단은 아직도 웃는 얼굴을 한 시체를 버려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총독을 포함해 죽은 사람은 모두 13명이었고 얌전해진 여덟 개의 벌레들이 만찬장 여기저기에 굴러다녔다. 그들은 벌레들을 핸드백과 악보 가방에 숨겨 넣고 나왔다. 얼떨결에 목표를 달성했지만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타이밍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총독 관저의 대학살은 사고로 발표됐다. 기능을 알 수 없는 화성 기계가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 최윤옥의 ‘골짜기의 백합’에서 튀어나온 벌레를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그 기억은 총독 옆에서 조립된 다른 벌레들에 대한 기억에 묻혀버렸다. 경성에는 도시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을 습격하는 화성 벌레들에 대한 음침한 소문이 돌았다. 남작의 가족은 장준형 실종 사건을 적당히 묻었다. 그렇지 않아도 의심받는 상황에서 경찰의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구로즈미 기요타카는 화성 벌레에 의해 살해당한 첫 번째 조선 총독이었다. 벌레를 이용한 요인 암살이 여덟 차례 더 이어지자 (그 중 두 명은 총독이었고 이들의 부임기간은 모두 한 달을 넘지 않았다) 더 이상 이것은 사고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총독이 죽은 다음 날, 불새단은 삐라를 뿌려 자신이 암살 주체라는 것을 밝혔다. 다른 세 독립운동 단체가 자기가 한 일이라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 선언은 더 멋있게 들렸을 것이다.
총독관저 대학살은 대변혁의 서막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에 새로운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 아니라, 화성 인공 두뇌가 적극적으로 지구 역사에 개입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머나먼 영국의 대저택에 갇혀 있던 무른 뇌의 청소년인 징기스칸은 아무런 저항없이 불새단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이는 전 세계 반제국주의 동맹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939년, 불새단과 연맹한 인도의 군사조직이 버킹엄셔주에서 징기스칸을 탈취했고, 이는 8년에 걸친 반제국주의 세계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동안 만들어진 화성 기술을 장착한 전쟁 기계들이 지구 전역을 뛰어다녔고 1억 명의 희생자를 냈다.
전쟁이 끝난 뒤 세계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곳이 됐다. 더 좋은 곳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사람들은 서로를 싫어했으며 툭하면 국지전이 터졌다. 모두가 갖고 있는 화성 살인 기계들은 세상에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이 많은 종교 옆에 화성교라는 새 주류 종교가 덧붙여졌다. 다행히도 1950년대 말에 원리가 밝혀진 화성의 에너지 압축 기술은 지구의 에너지와 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적어도 사람들은 맑은 공기 속에서 살았고 굶주리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화성에서는 21세기가 된 뒤에도 두 차례의 침략 우주선 군대를 헝가리와 나이지리아에 보냈다. 다행히도 이번엔 화성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지구 편 인공 두뇌가 있었다. 준비만 철저하게 한다면 침략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성과의 유의미한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지구에 온 개별 인공 두뇌와는 대화할 수 있었지만, 꾸준히 침략군을 보내는 화성 시스템은 수많은 대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종종 진짜 화성인 또는 그들이 남긴 기계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신호가 잡혔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2021년 9월 2일, 12대의 유인 우주선으로 구성된 첫번째 우주 부대가 화성으로 떠난다. 우주선의 조종은 징기스칸의 6대손들이 맡는다. 이들의 목적은 고장난 화성 기계들을 수리하고 두 행성 문명을 연결하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이 호전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은 있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고 지금은 때가 됐다고 믿는다. 운이 좋다면 그들은 아직도 살아남은 진짜 화성인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들이 ‘코끼리들을 사냥하는 야만인’인 우리를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