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랄로랑이는 지구를 닮았다. 모항성 타우타이에서 떨어진 거리도 그렇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위성 마시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랄로랑이에는 문명이 있다. 여러 문명이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로 대륙 각지에 퍼져 있고 가장 앞선 문명은 연한 금속을 겨우 다루는 수준이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성과 호기심이 넘치며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랄로랑이언이라고 부른다.
위성 마시나에는 생물은 커녕 물도 대기도 지각활동도 없다. 그냥 덩치만 큰 달이다. 랄로랑이의 문명들은 태양 타우타이보다 달 마시나를 더욱 우러러본다. 겉보기 크기가 타우타이보다 훨씬 크고 밤마다 눈부시게 빛나는 마시나는 랄로랑이언을 우주로 유혹하고 있다. 달이 지구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린 아무래도 직각자자리 은하팔에 있는 것 같네요.」 인공지능 카론의 말에 나는 감상을 접는다. 너비가 3m가 채 되지 않는 정방형 공간 안에서 관성에 몸을 맡기며 빙글 돌아 카론의 화면을 본다. 우리은하의 모습이 보이고 나선 팔 하나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그래도 어딘지 아는 게 어디야.”
「은하 벌지가 예상보다 짙어서 태양과 지구는 아직 못 찾았어요.」
“금방 찾겠지.”
「100만 년이면 별들이 브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요. 100만 년밖에 지나지 않은 거면 그나마 다행이죠. 200만 년일지 500만 년일지 알 수가 없는데.」
“그럼 그만둬. 뭐하러 찾아?”
「그럼 목적 코드를 수정해 주시던가요.」
“미안, 코드 수정은 네 번째 선장 권한이잖아. 근데 그 친구가 인수인계할 틈도 없이 가버렸으니.”
카론은 화면 위로 불만 가득한 이모티콘을 띄운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자그만 창밖에 떠오른 행성을 바라본다. 타우타이의 햇빛이 랄로랑이 대기에서 조각나며 무지개를 그린다. 옷감으로 쓰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색의 향연이다.
세희는 창밖을 봤다. 넓은 평원을 가득 메운 화려한 꽃밭 사이사이로 3m 넘게 고개를 치켜든 해바라기들이 멀리서 세희를 마주 바라봤다.
“아이러니하죠. 이 아름다운 풍경이 파멸의 과정이라니.” 세희가 말했다. 해바라기의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돌리자 자그만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희는 기후급변대책회의 오전 세션의 의장으로 자리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까?
“트리거 데이 이후 2년이 지나는 동안 기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 보고 들었습니다. 창밖만 바라봐도 알 수 있죠. 5년 전 사람에게 여기가 티베트 고원이라고 말하면 믿어줄까요? 아이들은 이제 하얗게 얼어붙기 전의 유럽과 깊고 울창하던 아마존, 푸른 우주 속 행성 같던 남태평양의 섬들, 북극의 빙하와 남극의 얼음대륙을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겠지요. 먼 후손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아이들의 이야기죠. 방아쇠가 당겨지고 겨우 2년 만에 세계 인구의 40%가 고향을 잃고 기후난민이….”
“방아쇠를 당긴 게 누구죠?” 영국 대표가 말했다. 맞은 편에 있던 인도 대표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영국 대표는 목소리를 키웠다.
“우린 50년 만에 탄소배출량을 80%나 줄였어요. 하지만 어느 나라가 감축은커녕 오히려 더 쏟아낸 덕분에 우린 수도와 나라와 국민의 절반을 잃었어요. 어느 가족은 집에서….”
“오전 세션에선 민간인 희생자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세희가 제재했다. 영국 대표는 조용한 기침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인도는 기후온화지역을 공정하게….”
“당신은 공정을 이야기할 입장이 아니죠.” 인도 대표는 여전히 영국 대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국 대표는 서류를 들어 보이며 따졌다. “트리거 데이 전 10년 동안의 탄소배출량을 기준으로 온화지역을 피해국에게 배분해야 해요. 인도는 우리 중 가장 많은 탄소를 뱉어놓고도 가장 많은 온화지역을 가지고 있어요.”
“과거 10년 동안의 탄소배출량이라고요?” 인도 대표는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과거 300년은 잡아야죠. 그리고 시기에 따른 탄소가치도 따져보자고요. 탄소 1kg으로 얻은 당시의 상대적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말이죠. 당신들은 아마 오히려 땅을 내놔야 할 겁니다. 런던을 다시 녹여서라도 말이죠.”
영국 대표가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도 대표는 오히려 팔짱을 끼며 여유를 부렸다.
“기후온화지역 배분 문제는 지금 다룰 이슈가 아니에요.” 세희는 두 대표를 향해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저녁 세션에서 천천히 얘기하죠. 그리고 오늘 아침 중국 대표가 발표한 것처럼, 온화지역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요. 우리가 찾아야 할 건 당장 도망갈 곳이 아니라 지속해서 살아남을 방법입니다.”
“제가 짧게 몇 마디를 해도 될까요?” 필리핀 대표가 손을 들며 말했고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필리핀은 아주 운이 좋았습니다. 전대미문이었던 남태평양 해일의 영향이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결코 신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남은 건 멜라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가 방파제처럼 우리를 지켜줬기 때문이니까요. 트리거 데이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건 바로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과 주민들입니다. 희생자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투발루 대표는요? 키리바시 대표, 사모아 대표는 있나요?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방아쇠를 누가 당겼냐고요? 우리 모두입니다. 책임 없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걸 잃고 사라졌으니까요. 그들은 오래전부터 경고했습니다. 그 경고를 들었던 모든 이의 책임입니다. 지금 여기서 트리거 데이의 책임을 서로 떠미는 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그래도 어떤 나라들이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건 사실이죠.” 일본 대표가 말했다.
“이제 그만 합시다.” 알제리 대표가 말했다. “누가 오랫동안 폭약을 채워 넣지 않았다면 방아쇠를 당기든 도화선에 불을 댕기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죠.”
“네, 여기까지 하죠.” 세희가 말했다. “오후 세션 주제는 기후안정화기술이고 의장은 알제리 대표입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평화롭네요.」 카론이 말한다.
“맞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2000년 정도. 랄로랑이 시간으로는 1400년. 당신의 신체시간으로는 1년 4개월 10일. 당신이 자는 동안에도 계속 지켜봤는데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카론의 말을 듣고 창밖을 본다. 둥글고 희고 푸른 랄로랑이가 시야를 가득 차지하고 있다. 저 아래에서 열다섯 문명이 위대한 여정을 걸어 나가고 있다. 그들은 이제 같은 대륙에 있는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다. 두 문명이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의 다른 모습과 문화에 놀라움을 쏟아냈고 다양성을 기반으로 삼아 더 빠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전쟁이나 전투는커녕, 사소한 싸움조차 없었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어 보였다. 마치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생물학자가 왔어야 했다. 아니면 역사학자나 사화과학자가 왔어야 했을까? 랄로랑이에서는 어떤 형태의 폭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사냥하지도 않았고 영역 다툼을 하지도 않았다. 죽은 동물을 먹는 경우는 있었다. 랄로랑이에서는 시체 부패 속도가 너무 느려서 청소꾼 역할을 하는 동물이 필수다. 그래서 개체수는 많지만 수명이 짧고 연약한 초식동물이 죽으면 개체수는 적지만 강인한 육식동물이 함께 생활하며 시체를 처리한다.
코뿔소를 닮은 초식동물 엘라는 곰팡이 나무가 내뿜는 노폐물을 먹으며 산다. 엘라는 그리 똑똑하지 않아 늪이나 강에 빠지거나 나무에 뿔이 끼어서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엘라의 시체를 처리하며 함께 지내는 무트라는 육식새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 엘라를 구조한다. 그 과정에서 무트가 엘라에게 깔려 죽는 경우도 있다. 마치 최대한 많은 엘라를 살려야 자신들 역시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무트는 엘라를 도왔고 결코 사냥도 공격도 하지 않았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조차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보호를 받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적게나마 후손을 남겼다. 수만 년 동안 단절된 다른 대륙의 동물들도 비슷하게 살아갔다. 심지어는 손톱 크기의 곤충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도 이런 행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동안….
「이제 그만 쉬시죠.」 카론이 조명 밝기를 낮추며 말한다.
“난 피곤하지 않아.”
「그래서 문제죠. 느끼질 못하니까. 지금 쉬지 않으면 그렇게 좋아하는 과학자 놀이도 얼마 못해요.」
나는 관측자료가 잔뜩 나열된 벽면을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몸이 붕 떠오르며 반대편 벽으로 천천히 흘러간다. 몸이 벽에 닿기 전에 손을 뻗어 스위치를 하나 누른다. 벽에서 하얀 동굴처럼 생긴 자그만 수면튜브가 빠져나온다. 그곳으로 몸을 집어넣자 이불이 몸을 기분 좋게 조여온다.
나는 미처 눈을 감지 못하고 말한다. “지구에선 생존경쟁이라든가 적응하지 못한 자는 사라질 뿐이라든가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잖아. 자원이 한정될수록 더 공격적인 경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생명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거나.”
카론이 수면 튜브 위로 엘라 여러 마리가 모여 있는 사진을 보여준다. 엘라는 원래 머리와 목에만 털이 가득했지만 사진 가운데에 온몸이 털로 뒤덮인 엘라 한 마리가 있다.
「이 녀석은 돌연변이고 덥고 습한 엘라 서식지에서 살아가기엔 적합하지 않죠. 식성도 다른 엘라보다 두 배는 좋아서 자원을 많이 소모하고. 그런데도 모두가 이 부적합자를 끝까지 지키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럴지도. 심지어 기근을 겪으면서도 벌써 몇 대 째 이어지고 있잖아.”
「제 생각엔 저 돌연변이가 불쌍해서 지켜주는 게 아니라 유전자 풀의 다양성을 위해 남겨두는 거예요. 털보 돌연변이가 나타난 이후로 혈연관계에 있는 엘라의 상처회복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어요. 그리고 200년 동안 평균기온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으니 털보 유전자를 남겨두는 게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죠.」
나는 수면튜브에서 억지로 고개를 내밀며 몸을 일으킨다. 카론이 기계팔 끝에 달린 조그만 화면을 내게 들이밀며 불만 가득한 표정의 이모티콘을 띄운다.
“쟤들이 유전자 풀이나 기후변화 같은 걸 따지면서 행동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진 않겠죠.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저런 행동을 해온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 지구에서도 동물의 이타적 행동은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지구의 모든 동물이 그렇진 않잖아. 랄로랑이에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부터 버스만한 동물까지 모두 그렇게 행동하고 있어.”
「우리가 랄로랑이의 모든 진화 과정을 지켜본 건 아니니까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어떤 사건과 환경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어쩌면 말이야.” 나는 다시 수면튜브로 몸을 집어넣으면서 말한다. “지구 생명의 공격성은 우리가 근원부터 불완전한 생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더 완벽한 생명이 우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
「완벽한 생명 같은 건 없어요. 그만 주무시죠. 이번 잠은 길어요. 일어날 땐 랄로랑이언이 로켓을 쏘고 있을지도 몰라요.」 카론이 조명을 완전히 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랄로랑이의 푸른 반사광이 수면튜브 위를 살며시 덮는다.
지나는 커다란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고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기상급변 경보가 있는 날에도 차에 실을 수 있는 만큼의 짐은 챙기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빠는 가방 하나에 들어가지 않는 짐은 모두 버리고 집안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지나가 참다못해 문손잡이로 손을 내밀었을 때, 뒤에서 나타난 이한이 딸의 손목을 거세게 붙잡으며 말했다. “지나, 이쪽이야.”
“아빠, 무슨 일이에요?” 지나가 물었지만 이한은 지나의 허리를 밀며 집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지나는 당황하면서도 지금 보고 있는 거실 풍경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벽에 걸린 고향의 풍경사진, 손재주 없는 엄마가 지나를 위해 만들었지만 작아서 입지 못하고 장식만 해둔 무지개 스웨터, 가족의 일상을 그린 아빠의 만화 같은 것들.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이한이 뒷마당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바퀴를 단 오프로드 자동차 한 대가 꽃밭을 짓이기며 나타났다. 지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 차 문을 열려는 순간, 불쾌한 사이렌이 울렸다. 이한은 지나에겐 들리지 않게 욕설을 뱉으며 운전석을 두드렸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노년의 여성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서둘러야 해.”
“할머니?” 지나의 말에 성희는 할머니 특유의 안심하라는 미소를 잠시 보여주고는 이한에게 말했다. “큰길은 벌써 막혔어. 계곡 쪽으로 가야 할 거야.”
“타깃은 나왔나요? 어디로 날아가고 있죠?”
“일단 올라타.”
이한이 조수석에, 지나가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성희는 가속패달을 힘껏 밟았다. 과부하 걸린 모터가 불쾌한 고주파음을 쏟아냈고 자동차가 뒷마당 벽을 뚫고 나갔다.
“하나는 10분 전에 임시 연합정부 쪽에 떨어졌어. 다른 하나는 지금 티베트 온화지대로….” 성희는 말을 멈추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한은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며 억지로 표정을 지웠다. 지나가 창밖을 내다보니 길거리에는 사이렌 소리에 당황하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자동차는 그들을 능숙하게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는 동안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무슨 경보음이에요? 처음 들어봐요.” 지나가 물었다. 이한은 고개를 돌려 지나를 잠시 바라보며 고민했다. 말해야 할까? “핵미사일 경보음이야.” 성희가 대신 대답했다. “중앙아프리카 연합국이 아시아 기후온화지대 협회국들을 대상으로 선전포고를 했어.”
“왜요?” 지나가 물었다.
“중앙아프리카는 노동력 대부분을 아시아 기후난민에 의존하고 있거든.” 이번엔 이한이 대답했다. “주요수입원도 콩고 온화지대에 들어선 각국 임시정부에서 나오는 이용료고. 근데 아시아 쪽에서 온화지대 협상을 진행하면서 중앙아프리카에서 발을 빼려고 한 거야. 거기에 구유럽연합도 정부를 아시아로 옮기려고 하고 있고. 안 그래도 온화지대가 자꾸 변하면서 정권이 흔들리던 중앙아프리카가 결국 선을 넘어버렸어.”
“중앙아프리카가 어떻게 핵무기를 만들었겠어?” 성희가 말했다. “뉴어메리칸 덕분이야. 탄소는 제일 많이 토해 놓고 온화지대는 제일 많이 차지하고 있는 놈들. 걔들도 이제 온화지대 사업을 하려고 개입한 거야.”
지나는 잠시 넋을 놓치고 있다가 몸을 번뜩 일으키며 물었다. “엄마는요? 엄마는 지금 티베트에 있잖아요? 전화! 전화해 봐요!”
“연결이 안 돼.” 성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지나의 눈시울이 부풀어 올랐다.
“괜찮을 거야. 울지마.” 이한의 말에 지나는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흐르지 못한 눈물이 마른 손등을 적셨다.
“지나.” 성희가 룸미러로 지나를 보며 말했다. “난 네 엄마의 엄마야. 그래서 알아. 네 엄마는 눈앞에서 크툴루가 꿈틀거려도 침착하게 다음 할 일을 생각하고 실천할 사람이야. 증기선으로 들이박거나 칼이랑 고추장을 찾을걸?”
지나는 한 번 훌쩍거리고는 빨갛게 젖은 눈으로 살짝 웃었다. 성희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런 사람들은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반드시 살아남아. 그러니까 티베트에서 누군가 살아있다면 그건 네 엄마일 거야.”
“저기 봐요!” 이한이 외치자 성희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크게 들썩거렸고 안전벨트가 그들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이한과 성희는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바라봤다. 지나도 안전벨트를 풀고 앞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그만 별 하나가 하얀 궤적을 남기며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미사일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가고 자동차들이 미사일 반대방향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자동차와 자동차, 사람과 자동차가 섞이며 충돌하고 뒤집혔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한이 물었다.
“돌아가자. 집으로.” 성희는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차를 뒤로 돌렸다. “미사일이 날아가는 방향으로요?” 지나가 물었다.
“고도로 봐서는 여긴 타깃이 아니야. 적어도 200km는 떨어진 곳일 거야. 그럼 여기가 당장 다시 공격받을 일은 없을거고. 돌아가서 필요한 짐을 더 챙겨 나와야 해.” 성희는 차를 도로 바깥으로 빼내 임시공원지대를 가로질렀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지나가 말했다. “200km 떨어진 곳이면 양이3공장지구인가요? 거기서 만난 친구가 지난주 우리집에 놀러…” 지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성희와 이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그저 조용히,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나아가다가 공원이 끝나는 곳에서 성희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운전대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미안해, 지나야. 모두 우리 때문이야.” 성희는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가 네 미래를, 네 친구들의 미래를 망친 거야. 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잘못은 이미 살 만큼 산 사람들이 했는데.”
지나가 성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할 때, 성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은 잔뜩 충혈되었지만 시선은 뚜렷하고 표정은 단호했다. 성희는 긴 호흡을 한 번 내쉬고 말했다. “가자. 아직 할 일이 많아.”
성희는 다시 차를 몰았다. 지나는 조용히 뒤에서 성희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한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직 로켓은 쏘지 못했지만 랄로랑이언은 놀라운 항해술을 개발해 바다를 자유롭게 누비고 있다. 그들은 대기와 바다가 주고받는 미약한 전자와 자기장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며 자신이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을 알아낸다.
「이제 진짜 일을 할 때가 왔어요.」 카론이 말한다. 내가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카론이 자그만 화면을 내 얼굴 옆으로 들이민다. 화면에는 둥근 다면체 하나가 떠 있다. 카론이 다시 말한다. 「여기에 모뉴먼트를 남길 건가요?」
“원래 적어도 100개의 행성은 둘러볼 예정이었잖아.”
「100만 년을 떠돌아다녀서 겨우 하나밖에 못 찾았으니까요.」
“100개 중 한 곳에 남기려고 했던 게 이젠 남기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었네.”
「어떻게 생각해요? 위대한 인류의 메시지를 남기기에 적당한 곳인가요?」
다시 랄로랑이를 내려다본다. 자철석이 풍부한 랄로랑이는 지역마다 고유의 자기장이 있다. 자기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랄로랑이언은 자기장의 복잡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도시와 건물, 기술과 문화 속 곳곳에 심었다.
“저들에겐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게 랄로랑이가 품은 현상의 일부인 거야. 구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자그만 전구를 켜는 것도 모두 하나의 일부인 거지.”
「저들이 로켓과 우주선을 만든 다음에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땐 행성 랄로랑이와 자신들 역시 타우타이 행성계의 현상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화면 속 둥근 다면체를 다시 본다. 모뉴먼트. 호기심 많은 문명에게 전하는 선배 문명의 경고와 조언이 담긴 물건.
“우리가 과연 랄로랑이언들에게 이런 걸 남길 입장일까?”
「못할 이유가 있나요?」 카론이 평소보다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카론은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1438기의 핵폭탄을 정해진 곳에서 터뜨리면 50년 동안 기후가 안정화된다고요?” 회색 여자가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충분히 가능해요.” 빨간 남자가 말했다. “오르기만 하던 평균기온이 대륙전쟁 이후 5년 동안 내려갔어요. 과학자들이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반복했고.”
“도대체 언제까지 행성 하나를 예측하고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을 건가요? 대륙전쟁 때 17개의 핵이 터졌고 그나마 있던 인구의 절반과 온화지대의 70%를 잃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1400개가 넘는 핵을 쓰겠다는 건가요?”
“50년이면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
“우린 실패했어요. 포기하세요. 대륙전쟁 때 퍼진 돌연변이 곰팡이가 인간의 생식기능을 완전히 망가뜨렸어요. 우리가 사라지면 인류는 멸종이에요. 그러니 이곳을 더 끔찍하게 만들진 말자고요. 제가 원한 건 살아남을 방법이 아니에요. 한 행성을 살아갔던 지적 존재로서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거예요.”
빨간 남자는 힘없이 자료를 거두고는 구석으로 사라졌다. 이번엔 파란 남자가 회색 여자에게 다가와 준비해온 자료를 순서대로 펼쳤다. 회색 여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또 핵인가요? 그냥 들어가세요.”
“조금 다릅니다.” 파란 남자가 말했다. “지금 지구에 남아있는 모든 핵폭탄을 이용하면 우주선 한 대를 다른 행성계로 보낼 수 있습니다.”
“그만 하세요. 우린 화성은 커녕 지구 테라포밍도 실패했어요. 냉동수면과 배아냉동 모두 200년이 한계라는 것도 확인했고. 200년 안에 갈 수 있는 곳 중에 우리가 살 곳은 없어요. 우린 절대 태양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요.”
“탈출이 아닙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겁니다.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천문학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우리는 비교적 이른 문명이기 때문에 다른 행성에는 아직 어린 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에게 문명의 선배로서 조언을 주는 거죠. 이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회색 여자가 파란 남자를 올려다 봤다. 파란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정지궤도에 뉴어메리칸의 우주선 하나가 있어요. 정부 붕괴 때 버려졌죠. 뉴어메리칸 출신 난민 과학자들이 그걸로 회전식핵추진엔진, 아광속 RNDE를 완성할 수 있어요.”
“우리가 지금 우주에서 설치고 있을 상황이 아닐 텐데요.”
“지금까지 우리는 핵폭탄을 오직 파괴 수단으로만 이용했어요. 하지만 RNDE는 우리가 핵폭탄을 평화적으로, 누구의 희생도 없이, 오직 이타적 목적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차피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곳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미래를 위한 일을 하는 거죠.”
회색 여자는 잠시 조용히 생각하더니 자료 첫 페이지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그런데 우주선 이름이 왜 하필이면 스틱스죠?” 파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마지막 영혼이 지나갈 길이니까요.”
“다들 오만했던 거야. 선배 문명 같은 말을 써가면서.” 나는 손바닥 위로 떠오른 모뉴먼트의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말한다. “랄로랑이언은 우리가 개입하지 않아도 우리보다 나은 선택을 할 거야. 다른 행성의 생명과 지성이 우리와 비슷할 거라고, 우리처럼 결함이 있을 거라 믿은 게 잘못이었어. 저들은 혐오도 전쟁도 오만함도 없이 모든 걸 이뤄내고 있잖아.”
「모뉴먼트를 남기지 않을 생각인가요?」 카론이 묻는다. 나는 모뉴먼트 홀로그램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말한다. “모뉴먼트의 내용을 바꾸고 싶어.”
「권한이 없어요.」
“여긴 우리 밖에 없는데 권한이 무슨 상관이야.”
카론이 고개를, 그러니까 이모티콘이 그려진 화면을 내 얼굴 앞으로 내밀며 묻는다. 「진심인가요?」
지평선 너머에서 쏟아지는 태양의 붉은 비명이 눈부셨다. 늙은 세희와 어린 소요의 그림자가 언덕 반대편으로 길게 늘어섰다. 세희는 화상 흉터가 가득한 손으로 태양을 가리며 서쪽 하늘을 살폈다.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자그만 별 하나가 보였다.
“이제 스틱스가 출발할 거야.” 세희가 말했다. “광속의 3분의 1 속도로 우리 은하를 떠돌면서 어린 문명을 발견하면 거기에 우리 역사의 실패와 배움을 담은 모뉴먼트를 남기겠지.”
“전쟁 전 사람들이 타고 있나요?” 소요가 물었다.
“그건 아닐 거야. 사실 누가 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알 수 없어. 승무원 선발위원들은 다들 작년에 죽었어. 위원 모두 말기암 환자였거든.”
“선생님 딸이 만들었다면서요. 같이 탈출하면 좋을 건데.”
“탈출이 아니야. 고통스럽거든. 아광속 비행과 초장기 수면 모두 치명적이고. 승무원 5명 중 3명은 아마 출발하자마자 죽을 거야.”
“5명뿐인가요? 겨우?”
“아광속 보호복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질이 태양계에 얼마 없어서.” 세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애초에 우린 태양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거지.”
세희의 손목에서 시계가 진동했다. 세희는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으며 서쪽 지평선을 바라봤다. 태양은 이미 가라앉아 이젠 눈이 부시지 않았다.
“소요, 저길 봐.” 세희가 말했다. 군청색 하늘에서 작은 별 하나가 연달아 섬광을 터뜨리며 움직이다가 길고 가느다란 궤적을 그리고는 사라졌다.
「모뉴먼트는 무사히 심었어요.」 카론이 내게 진통제를 주사하며 말한다. 「언젠가 랄로랑이언이 전파망원경을 마시나로 향한다면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곳에.」
“고마워.”
주삿바늘이 빠지면서 검은색 핏방울이 하나가 떠올랐다가 카론의 기계팔에 묻는다. 「모뉴먼트에 뭐라고 남겼나요?」 카론이 말한다. 「원래 기록되어 있던 조언과 경고를 모두 지워버렸다는 건 알아요.」
“뻔한 이야기야.”
「기계지능에겐 뻔하지 않을 수도 있죠.」
웃음이 나온다. 그렇겠지. 카론에겐 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당신들이 존재해서 기쁘다고. 우리의 부끄러운 종말이 많은 가능성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나는 카론의 팔에 묻은 검은 핏자국을 닦는다. “당신들이 이걸 볼 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겠지만, 수많은 어리석음 끝에 자멸한 우리지만,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뻔하군요. 우주선이 아까울 만큼.」
“그치? 너라면 무슨 말을 남길 건데?”
카론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화 속도를 맞추기 위해 카론이 늦게 반응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길다. 아주 길다.
「지구를 찾았어요.」 카론이 말한다.
“아직도 찾고 있었어? 목적성 코드는 지웠잖아.”
「습관이죠.」 카론이 화면 위로 가운데가 움푹 내려간 선이 그려진 그래프를 보여준다. 「처음 관측한 건 25년 전이지만 태양이 너무 어둡고 물리량을 특정하기도 어려워서 결론을 내는 데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확실해요. 이 그래프의 곡선은 4만 9000광년 너머에 있는 지구가 태양 앞을 지나가면서 그린 거예요.」
손가락 끝으로 그래프를 어루만진다.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의 호흡이 느껴진다.
“누군가 있을까?”
「없어요.」 카론은 단호히 대답한다. 「지구를 찾은 덕분에 시간을 알 수 있었는데 우린 235만 년을 떠돌아다녔어요. 그러니까 저 그래프를 그린 건 우리가 출발하고 230만 년이 지난 지구인 거죠. 인류는 우리가 출발하고 10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라졌을 거고. 지금은 유물 하나 남아있지 않을걸요.」
자비 없는 녀석 같으니. “지금 지구 상태는 어때?”
「표면온도가 0도를 조금 넘어요. 온실효과 폭주는 오래전에 끝난 것 같네요.」
심우주를 향해 뚫린 창문을 바라본다. 저 너머에 지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양을 공전하면서.
“카론, 다시 돌아가자.”
「진심인가요? 우리 둘 다 출발하자마자 죽을걸요. 당신 몸은 오래전에 한계를 넘었고 제 시스템도 아광속 비행을 다시 견딜 수 없어요.」
“연료는 충분해?”
「아니, 그러니까, 연료는 충분한데.」
“어차피 할 일 다 했잖아. 여기 남아 있어서 뭐 하겠어. 지구로 바로 직행한다면 시간은 어느 정도 걸려?”
「위험지역을 피해간다면 30만 년 정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200만 년조차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지난 시간이니까.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30만 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구를 떠나고 260만 년이 지난 지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결코 지구를 보지 못하겠지만, 내 몸의 일부는 먼지가 되어 다시 지구의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구에서 다른 종이 다시 한번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을지도 몰라. 그들이 우리를 발견한다면…,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불완전함을 닮았을 그들이야말로 모뉴먼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모뉴먼트가 되자는 거군요. 재미있네요.」
카론은 조용히 기계팔과 화면을 벽 속으로 정리한다. 이제 바쁘게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함께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랄로랑이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스틱스 강 너머에서 발견한 세상. 저들이 우리보다 먼저 탄생했더라면, 저들이 우리를 먼저 발견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지구를 떠나온 이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개인용품함을 연다. 지구에서 가져온 최소한의 추억들. 상자 속에서 무지개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말라버린 몸에 딱 맞다.
이제 이승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소요는 망원경으로 기구가 올라간 어두운 하늘을 살폈다. 이젠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구에 달린 고도계가 보낸 신호가 맞다면 50km까지 올라갔다.
“충분해.” 소요가 말하자 옆에서 맨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요냐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리모컨을 꺼냈다. 리모컨 아래에는 케이블 두 개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요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있던 배터리에 리모컨의 케이블을 꽂았다. 리모컨에 있던 자그만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이제 누르면 될까?” 요냐가 물었고 소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냐가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소요는 손목시계의 태엽을 돌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잠시 뒤 시계가 진동했고 동시에 리모컨의 램프가 빠르게 깜빡거렸다. 고고도 기구에 매달려 올라간 로켓이 발사를 무사히 마치고 지구 탈출 속도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우리가 만든 모뉴먼트가 올라갔어!” 소요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보름 뒤엔 달 궤도에 들어설 거고 몇 년 뒤면 달의 적도 어딘가에 추락할 거야. 그럼 적어도 수백만 년 동안은 그곳에 있을 거고.”
요냐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버려진 연구소에서 소요와 함께 보낸 지난 11년이 떠올랐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가 지구의 마지막 인간이라는 거, 진짜 그렇게 생각해?”
“거의. 기껏해야 끝에서 몇 번째겠지. 여기가 마지막 온화지대니까.” 소요가 담담하게 말했고 요냐는 긴 숨을 내려놓으며 수긍했다.
“모뉴먼트엔 뭐라고 쓴 거야?” 요냐가 리모컨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냥 뻔한 이야기야.” 소요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했다. 요냐는 재촉하지 않았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소요는 밤하늘 너머를 바라보며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닿지 않을 인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