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희미하게 스며들어오는 햇빛이 눈꺼풀을 간질이자 이새는 눈을 떴다. 잽싸게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열자 영상으로만 봤던 풍경이 펼쳐졌다. 
“후아~.”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제 도착했을 때는 날이 어두워져서 주위를 통 볼 수가 없었다. 이새는 창문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한참 동안 이질적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쉽게도 창문을 열 수는 없었다. 이곳 아라니아의 대기에는 인간에게 해로운 성분이 있었다. 
호텔과 몇몇 연구 시설이 있는 작은 규모의 인간 정착지를 제외하면 지평선 너머까지 온통 숲이었다. 숲은 아침 안개에 휘감겨 있었고, 안개 사이로 듬성듬성 높이 솟은 바위산도 보였다. 
생김새만 놓고 보면 지구의 여느 숲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특이한 점은 색채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곳의 풍경은 마치 먹으로 그린 산수화 같았다. 검은빛의 짙고 옅음만 있을 뿐 어디를 봐도 인간의 눈에 익숙한 색은 없었다. 하다못해 맑을 때의 하늘조차 희뿌연 빛깔이었다. 
키가 큰 나무가 - 생물학적으로는 지구의 나무와 전혀 다르지만 - 바람에 흩날리고 기묘하게 생긴 날짐승들이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독특한 느낌의 수묵화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게 바로 이곳이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얼마나 고대했는지. 그리고 또 하나….

이새는 이곳 시각으로 맞춰 둔 시계를 슬쩍 보았다. 가이드와 약속한 시각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얼른 욕실로 향했다. 중력이 지구보다 10% 정도 커서 발걸음이 다소 무거웠지만, 흥분한 근육은 활기차게 움직였다. 씻고 옷을 차려입은 이새는 부모님이 묵는 방으로 가 주먹으로 문을 쿵쿵 두드리며 “엄마, 아빠, 빨리 나와!”라고 외친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식당으로 갔다. 
“Good Morning. Did you sleep well?”
미리 와 있던 가이드가 이새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새는 “Good Morning”이라고 대답하며 주머니에 있던 통역기를 꺼내 착용했다. 
“중력이 강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사람도 꽤 있거든요.”
“아, 그래요? 전 그것보다 너무 흥분해서 잠을 설친 것 같아요.”
“하하. 물론 그렇겠죠. 어서 아침 드세요. 음식은 지구와 다를 게 없어요. 이곳 동식물 중에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네에? 먹다니요? 자연을 보호해야죠!”
“아, 당연하죠. 제 말은 먹으려고 해도 먹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온종일 돌아다녀야 하니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했다. 이새는 접시에 한가득 음식을 담아와 입 속에 욱여넣었다. 가이드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래요. 잘 먹어두는 게 좋지요. 창밖 풍경도 봤어요? 멋지죠.”
“네. 진짜 신기해요. 아, 가이드님은….”
“루크라고 불러요.”
“루크…, 네. 그 소리 들어본 적 있어요?”
“물론 라이브 공연을 말하는 거겠죠? 네, 있어요. 그런데 진짜 운이 좋아야 해요. 저도 여태껏 딱 세 번밖에 못 들었어요. 못 들어도 너무 실망하지 마요.”
“네….”
이새가 말한 그 소리란 이 행성을 주목받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숲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지구의 여느 동물이 내는 울음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음악이라고 할 만한 소리였다. 이 행성을 최초로 탐사한 생물학자 집단이 보고한 뒤로 몇몇 사람이 그 소리를 녹음하는 데 성공했다. 그 소리는 지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단순히 듣기 좋은 수준을 넘어 정신적인 고양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천사의 노래라고 불릴 정도였다. 
듣고 있으면 황홀경에 빠진다는 사람도 꽤 있었는데, 이새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 알람 소리도 그 노래였고, 밤에도 틀어놓으면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 외계의 음악은 지구에서 수시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가수 없는 가상의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이 소리가 인간의 뇌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흥미롭게도, 똑같은 소리가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매번 즉흥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연주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묘한 아름다움만큼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당연히 그 노랫소리의 주인공에게 큰 관심이 쏠렸지만,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음악을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을 들며 이곳에 지적생명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노래를 제외하면 토착 문명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허점이 있었지만, 이 이론은 꽤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여러 탐사대가 수수께끼의 음악가를 찾아 헤맸지만, 근처에서 소리만 들었을 뿐 누가 무슨 이유로 내는 소리인지는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노래는 어김없이 멀어지거나 아예 사라졌다. 
어쨌거나 그 천상의 외계 음악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듣는 건 이새를 비롯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 모두의 소망이었다.

마침내 출발 시각이 다가왔다. 이새는 부모님과 함께 루크와 보조 가이드 두 명의 안내를 받아 커다란 에어록 안에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탔다. 인원 확인이 끝나자 버스는 출발했고, 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움직였다. 모두가 창밖으로 흘러가는 수묵화 풍경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새는 로켓을 타고 달 뒷면의 히치 유적에 착륙했을 때보다, 우주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 정체불명의 외계 우주선을 탔을 때보다 지금이 더 떨렸다. 
루크가 마이크를 잡고 일어서서 창밖에만 시선이 꽂힌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 아라니아는 인간이 다섯 번째로 발견한, 생명이 있는 외계행성입니다. 아니, 인간이 발견했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히치 종족이 이미 오래전에 발견한 곳이니까요.”
달 뒷면의 지하에서 발견된 고대 외계인의 유적은 지구를 뒤흔들어 놓았다. 더욱 충격적이게도, 그곳에 남아있는 모종의 장치를 통해 우주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에 대한 흔적을 거의 남겨놓지 않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고대의 외계인을 사람들은 히치라고 불렀다. 
그렇게 인간은 뜻하지 않게 우주로 나가는 통로를 얻게 되었고, 그 뒤로 달 개발과 우주 탐사는 냉전 때의 우주 경쟁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탄력을 받았다. 이번에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이루어졌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위 탐사가 수천 번이나 이루어졌고, 용감한 사람들이 희생한 결과 인간은 새로운 세상을 여럿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부 지역에 한해 일반인 대상의 관광이 가능해졌다. 
“아마 여기까지 오시는 게 쉽지 않으셨죠? 몇 년은 대기하셨을 텐데, 기다린 보람이 있으면 좋겠네요. 자, 하이킹 출발지까지 가는 길에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주의사항입니다. 이 행성의 대기에는 인체에 유독한 성분이 있습니다. 피부 노출은 상관없지만, 호흡은 안 됩니다. 잠깐 노출되는 건 괜찮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해하니 외부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내장된 통신기와 통역기를 활용하시면 사적 대화도 가능합니다.”
루크가 마스크를 하나씩 나누어 주며 말했다. 
“외부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시간이 좀 있는데요, 이때 이곳 환경을 훼손하시면 안 됩니다. 이곳 동물들이 예민한 편이라 사람한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는데, 만약 가까이 접근한다고 해도 함부로 만지거나 먹을 걸 던져주시면 안 됩니다. 벌금이 상당히 셉니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당연히 아무거나 드셔도 안 되고요. 그건 벌금은 없는데, 아마 병원비가 꽤 나올 겁니다.”
별로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다 보니 다들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길을 잃으면 찾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꼭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지 마시고, 만약 숲속에서 길을 잃고 통신기 범위도 벗어났다 싶으시면, 각자 세 발씩 나누어 드릴 신호탄을 공중에 쏴 주세요.”
루크의 설명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버스가 멈췄다. 버스 문을 열기 전에 루크가 모두의 마스크 착용 상태를 점검했다. 
땅은 보기보다 단단했다. 솜털처럼 솟아 있는 풀이 이새의 발에 밀려 부드럽게 물결쳤다. 
“이새야, 이거 봐라.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지 않니?”
엄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채색의 음영으로만 이루어진 풍경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을 입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채로웠다. 섬세한 흑백 애니메이션 속에 들어온 실사 캐릭터 같은 느낌이랄까.
사방을 둘러보던 이새의 눈에 움직이는 물체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배경과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보니 동물이었다. 모양이나 덩치로 보면, 지구의 토끼와 비슷했다. 다만 긴 귀는 없었다. 자그마한 눈사람을 눕히고 짧은 앞다리와 긴 뒷다리를 붙이면 그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녀석이 새까만 눈으로 이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새는 가만히 그 자리에 수그리고 앉아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다가올 듯 말듯 움찔거리다가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가까이 오자 잽싸게 몸을 돌려 달아나 버렸다. 
“퓨라예요. 운이 좋네요. 시작부터 동물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저 녀석이 그래도 이곳에서는 가장 인간을 겁내지 않는 종이에요.”
“영상으로 봤는데, 실제로는 처음 봐요. 너무 귀여워요~!”
“쟤들은 하이킹하다 보면 종종 볼 수 있을 거예요. 날아가는 새들하고, 몇 가지 동물을 더 볼 수 있을 겁니다.”
“노래하는 동물은 정말 못 보나요?”
“하하. 그걸 볼 수 있으면, 엄청난 발견이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극도로 예민해서 인기척이 조금만 나도 달아나 버린다고 해요. 저도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쫓아가 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살금살금 걸어도 소리는 계속 멀어지더라고요. 인기척만이 아니라 전자기파에 예민하다는 얘기도 있고, 하여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죠.”
“그런데 그 노래는 왜 하는 걸까요?”
관광객 중 누군가 물었다. 
“글쎄요. 특정 계절에 많이 들리는 걸로 봐서 번식기의 구애 노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긴 해요. 마침 지금이 그때인데, 이 시기에 들리는 노래가 평소보다 더 길고 유난히 감미롭다고 해요.”
“혹시 위험한 동물은 없나요?”
“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요. 걱정해야 할 만한 육식동물은 없어요. 신기하게도 곤충 같은 작은 동물도 여기에는 없어요.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동물을 수십여 종을 발견했는데, 다들 순해요. 앞으로 퓨라 말고도 몇 종류를 더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노래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건 운이 좋기를 빌어야죠…. 자, 이제 출발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한 시간 남짓 걸어서 도착한 곳은 소규모 히치 유적이었다.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그 유적은 히치가 만든 것답게 간결하면서도 종교적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숭앙하는 듯한 공간 디자인은 히치 유적의 특징이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히치가 종교적인 종족이었다는 추정이 그럭저럭 지지를 받고 있었다. 더 나아가 히치가 소수의 유적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진 게 신을 따라 승천했기 때문이라며 인간도 그 신을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종교를 만든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히치교였다. 
관광객은 대부분 다큐멘터리에서 이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한 유적을 본 적이 있었고 다음날에 대규모 유적 방문이 일정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유적보다는 언덕에서 보이는 풍경을 사진에 담기 바빴다. 
내려가는 길에는 나무가 듬성듬성한 들판을 따라 걸었는데, 몇몇 동물이 먼발치에서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집이 통통하고 귀가 큰 동물 여러 마리가 뭔가를 먹고 있다가 이새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뛰어가 버렸다. 
“저건 볼랑이에요.”
루크는 눈에 띄는 대로 그게 어떤 동물인지 어떤 습성이 있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루크의 말대로 퓨라가 가장 눈에 많이 띄었다. 생긴 게 가장 귀엽기도 했다. 호텔 기념품 판매점에도 퓨라 관련 인형이나 상품이 가장 많긴 했다. 
연구원들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는 작은 건물에서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쉰 뒤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오후 일정은 근처에 있는 깊은 협곡이었다. 이곳은 입이 떡 벌어질 만했다. 까마득히 높은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며 깊은 협곡을 만들어 놓았다. 높은 중력 때문인지 폭포에서는 물이 더욱 세차게 떨어졌고 물방울이 안개처럼 기화요초가 솟아 있는 협곡을 흘러내려 갔다. 힘겹게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이런 풍경을 눈앞에 두고 그 환상의 노래를 들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이새는 혹시라도 그 노래가 들려올까 싶어 귀를 바짝 세웠지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전망대까지는 또 오르막이었다.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 걸었다.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힘든 건 숨길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전에 다른 외계행성에서 일어난 생태계 교란 사건 때문에 시설을 설치하는 게 굉장히 까다로워요. 연구자들조차 연구 활동이 너무 어렵다고 투덜거리는걸요. 힘들어도 걸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루크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자신도 헐떡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망대에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밀폐 시설조차 없었다. 다행히 풍경은 아래에서 보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장관이었다. 폭포에서 튄 물방울이 근처까지 날아왔다. 손을 뻗자 희뿌연 액체가 손에 몇 방울 묻었다. 이새는 이곳의 물을 마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물어보았다.
“이거 먹으면 어떻게 돼요?”
“글쎄요. 전 알고 싶지 않네요. 그나저나 숲속의 라이브 공연은 역시 실패군요. 운이 좋으면 내일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르죠. 희망을 잃지 마요.”
루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숙소로 갈 시각이었다. 산중이라 해가 빨리 진다며 루크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룻밤을 보낼 숙소로 걸어가던 도중 가까이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새가 걸음을 멈추며 외쳤다.
“잠깐만요! 무슨 소리가 나요!”
길 앞쪽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새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일행도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원하던 그 노래가 아니었다. 확실히 지구의 숲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이 행성을 유명하게 만든 그 소리는 아니었다. 음악적이라기에는 부족했다. 얼마 뒤, 소리가 그치더니 동물 한 마리가 튀어나와 일행을 빤히 바라보았다. 북극여우를 닮았는데, 움직임이 대단히 우아했다. 
“저건 그라샤예요. 쟤도 꽤 자주 볼 수 있어요. 울음소리가 그 소리와 좀 비슷하죠. 그게 그라샤가 특정 상황에서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증거는 아직 없지만요.”
루크가 설명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 적은 있지만, 역시 실물이 주는 느낌은 색달랐다. 몇몇 사람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그라샤는 순식간에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다들 지쳐 있었다. 자기 몸무게의 10퍼센트 정도씩을 짊어진 꼴로 종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씻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잠깐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하나둘씩 방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기운이 남은 어른들 몇몇은 술 한잔 하겠다며 뭉쳤다. 이새의 부모님도 어느새 친해진 일행 몇 명과 합류했다. 
이새는 여기까지 와서도 그놈의 술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방으로 갔다. 몸이 노곤했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잠시 내다보았다. 해는 완전히 졌지만, 달 두 개 중 하나가 보름이라 숲의 밤 풍경을 얼핏 볼 수 있었다. 밤이 되어 색이 의미가 없어지자 그다지 진귀할 게 없었다. 하늘에 뜬 달 두 개만이 지구와 다를 뿐.
‘내일은 그걸 들을 수 있을까….’
내일이면 관광이 끝나고 다시 달을 거쳐 지구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내일이 아니면 평생 다시는 기회가 없을 터였다. 밤을 맞은 동물의 소리가 이따금 들렸지만, 바라던 그 소리는 여전히 아니었다. 가능성이 작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새는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을 켠 채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떠들썩한 술자리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이새는 일어서서 불을 껐다. 아침부터 다시 강행군을 하려면 잠을 잘 자야 했다. 이새는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대로 가물거리던 이새의 정신이 갑자기 번쩍 돌아왔다. 이새는 재빨리 일어나 앉았다. 
그 소리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 소리였다. 
다시 한번 집중했다.
확실했다. 저 어딘가 숲속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천상의 노래를.
‘어, 어떻게 하지?’
마음은 이미 노래에 홀려 있었다. 
이새는 방을 뛰쳐나갔다. 다들 곯아떨어졌는지, 아무도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이새는 루크의 방문을 두드리려다가 멈칫했다. 노래의 주인공은 극도로 예민해 눈길을 피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숙소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또, 노래가 얼마나 길지도 알 수 없었고, 벌써 더 작아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새는 방으로 가서 마스크를 챙겼다. 그대로 나오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들어가 신호탄도 챙겼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걸 쏘면 날 찾을 수 있겠지. 아주 멀리 갈 건 아니니까.’
다행히 에어록은 조용히 열렸다. 에어커튼 소리도 사람들의 단잠을 깨우지는 못했다. 이새는 아마 이 뒤로 에어록이 야간에 열리면 경보가 울리게 바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달빛이 밝아서 다행이었다. 이새는 앞마당에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저쪽이다.’

이새는 소리를 따라 걸었다. 잰 발걸음이지만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한밤중에 외계행성의 숲속을 혼자 걷고 있으려니 겁이 났다. 하지만 위협이 되는 육식동물은 없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새를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이새는 귀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나무 사이를 지나 근원지로 다가갔다. 
돌연히 노래가 멈췄다.
이새는 숨을 들이켜며 걸음을 멈췄다. 1분도 넘게 그대로 굳어 있었다. 얼마 뒤 다시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리기 시작하면서, 이새는 안도했다. 이대로도 좋았지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더 크고 명료하게 듣고 싶었다. 그리고 운이 정말 좋다면, 그 주인공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달빛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지만, 나무의 그림자와 원래 검은 부분이 섞여서 눈이 혼란스러웠다. 이새는 정신을 집중해서 소리를 따라갔다. 
노래가 꽤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새는 잠시 가만히 서서 그 황홀한 음악을 감상했다. 동물의 목에서 나온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음색과 높낮이가 있었다. 뚜렷한 시작과 끝이 없다는 점은 일반 음악과 달랐지만, 자유롭게 이어지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근육이 떨릴 정도로 고조되다가도 너무 긴장이 된다 싶으면 절묘하게 구름 위를 거닐 듯이 온몸의 힘을 빼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아, 한낮의 기묘한 풍경 속에서 즐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직접 듣는 게 어딘가 싶었다.
음악에 너무 정신을 파느라 이새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음악 소리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기다려!”
이새는 자기도 모르게 외치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음악이 멀어지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허겁지겁 뛰는 이새의 발아래로 흙이 무너져 내렸다. 
“으악!”
흑백의 얼룩이 빙글빙글 돌다가 이새가 어딘가 세게 부딪치면서 눈앞이 새까매졌다. 
“으으으~.”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지다가 나무에 부딪힌 게 분명했다. 오른쪽 다리와 왼쪽 팔이 끔찍하게 아팠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새는 그 와중에도 노래의 주인공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오른팔로 땅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무에 기대앉았다. 
시큼한 냄새가 났다. 구르다가 부딪혔는지 마스크가 헐거웠다. 이새는 기겁하며 마스크를 똑바로 고쳐 썼다. 다행히 깨져서 새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통신기 겸 통역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굴러떨어지면서 충격을 받아 망가진 것 같았다. 이새는 불현듯 신호탄을 떠올리고 허리춤을 더듬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신호탄을 쏠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지금 쏴봤자 볼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자느라 이새가 혼자 나온 것을 모를 테니 찾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신호탄을 쏘는 건 아침이 되고 이새가 없어졌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 뒤여야 했다. 그건 곧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을 거야. 몇 시간만 참으면 돼.’
밤이어서 그런지 다쳐서 그런지 몸에 한기가 들었다. 이새는 움직이는 오른팔로 주변의 나뭇잎인지 뭔지 모를 것들을 긁어모아 가능한 한 몸을 덮었다. 생각보다 느낌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부러졌을지도 모를 다리와 팔을 최대한 고정한 채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새는 운 좋게 얻은 공연 감상 기회가 이렇게 끝난 게 못내 아쉬웠지만, 보람은 있다고 생각했다. 
잠이 드는 건지 기절하는 건지 정신이 깜빡깜빡 나갔다 들어왔다 했다. 아직 하늘은 깜깜했다. 이새는 눈을 감고 힘겹게 일 초 일 초를 버텼다. 
그때 앞쪽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새는 바짝 긴장했다. 육식동물은 없다고 했지만, 그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일 뿐이었다. 만약 이새의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동물이 있다면?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끔찍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달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이새는 그걸 알아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퓨라 한 마리였다. 인간에게 가장 친근하다는 바로 그 녀석. 잡아먹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퓨라가 어딘가 이상했다. 다쳤는지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온몸이 검은 얼룩으로 지저분했고, 뭔가 너덜너덜하게 떨어져나와 덜렁거렸다.
‘너도 다쳤냐? 넌 어쩌다 다쳤니, 쯧쯧.’
이새는 그 퓨라가 불쌍했지만, 피차 마찬가지 처지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의 동물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아픔도 참은 채로 눈만 살짝 깜빡이며 퓨라를 주시했다. 
그 뒤로 어둠 속에서 작고 하얀 불빛이 번쩍였다. 
‘저게 뭐지?’
작고 하얀 눈동자였다. 하얀 몸통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동물 한 마리가 소리도 없이 걸어왔다.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백호를 고양이만 하게 줄여 놓으면 저렇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크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새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동안 그 녀석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비틀거리는 퓨라를 두 발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 멀쩡한 다리 하나를 입으로 물어뜯었다. 이새는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그 퓨라는 사냥을 당하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공격을 받다가 간신히 도망쳤지만, 다시 잡힌 형국이었다. 루크의 말은 틀렸다. 육식동물은 있었다. 사람에게 큰 위협이 될 만한 덩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빨에 독이 있을 수도 있고…, 뭐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까. 이새는 더욱 숨을 죽였다.
눈앞에서 생명이 죽는 모습을 보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퓨라가 몸부림치며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이새는 숨이 멎을 듯한 기분을 느꼈다.
퓨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 때문이었다. 이새를 황홀하게 만들어 준 그 노래, 이새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그 음악. 이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이새가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도 공연은 계속 이어졌다. 육식동물이 퓨라를 먹고 있는 건 아니었다. 퓨라가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를 뜯어내고 있었다. 퓨라는 죽지도 못하고 맨정신으로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다. 육식동물의 이빨이 퓨라의 살에 박히고 가죽을 찢을 때마다 퓨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색과 선율이 절묘하게 바뀌었다. 여전히 황홀한 음악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새는 멀미를 느꼈다. 눈에 보이는 광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아름답게만 상상했던 진실은 이새를 배신했다. 단지 인간의 귀에 아름답게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구애의 노래니 천상의 노래니 하면서 온갖 상상을 하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토록 추앙해 마지않던 음악이 죽음을 앞두고 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니. 
이새는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너무 부조리했고, 너무 혼란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 빨리 끝내 줘.’
하지만 녀석은 빨리 끝낼 생각이 없었다. 퓨라를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든 녀석이 고개를 들더니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뭐지? 먹지 않아? 괴롭히기만 하는 건가? 내가 있는 걸 알았나?’
사라졌던 육식동물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주위에 친구들이 있었다. 아니, 덩치가 훨씬 작았다. 새끼들인 모양이었다. 어미가 머리로 슬쩍 밀자 새끼들이 퓨라에게 몰려갔다. 이새는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어미는 사냥 경험이 없는 새끼에게 살아있는 먹이를 죽이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있었다. 
새끼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퓨라에게 달려들어 작은 입으로 여기저기를 물어뜯었다. 퓨라가 크게 몸부림을 칠 때마다 어미가 와서 꼼짝 못 하게 눌렀다. 그러면서 퓨라의 노래는 한층 더 열기를 띠었다. 이새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들려오는 노래는 너무 고상하고 감미로웠다. 그러자 머리에서 또 죽어가는 퓨라의 모습이 떠올랐고….
인간을 극도로 경계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노래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노래의 주인공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다만 대단히 조심스러운, 게다가 새끼를 키우느라 극도로 예민한 육식동물이 사냥과 교육의 현장을 인간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구애의 노래라는 추측은 틀렸지만, 어떻게 보면 생명의 노래인 건 맞았다. 누구의 생명인지가 다를 뿐. 분명히 그 육식동물에게는 새끼를 키울 힘을 주는 생명의 노래였다. 특정 계절에 더 많이 들린다는 사실도 맞아떨어졌다. 번식기를 맞은 육식동물은 새끼를 위해 더 많은 퓨라를 사냥할 것이고, 새끼의 훈련을 위해 퓨라는 더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했다. 
마침내 퓨라가 움직임을 그쳤다. 노래도 그쳤다.
“으흑.”
이새가 나지막하게 울음을 터뜨리자 어미와 새끼가 모두 고개를 들었다. 어미가 죽은 퓨라를 물고 잽싸게 뛰어 도망갔다. 새끼도 그 뒤를 따랐다. 퓨라가 있던 자리에는 땅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검은 얼룩만 남아있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새는 아픔도 잊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그 노래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예전처럼 즐길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 소리를 아름답게 느낀다는 건 그대로였다. 
이 사실을 알렸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몰랐다. 과연 그 말을 믿어줄까? 다들 그 노래를 거부해 줄까?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여전히 그 노래가 인기를 끈다면? 혹시 누군가는 예술을 만들겠다며 이 연약한 동물을 잡아서 죽을 때까지 고문하지 않을까? 색다른 선율을 얻기 위해 창의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마스크 안이 뿌예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새는 시계를 확인하고 신호탄을 공중으로 쏘았다. 
얼마 뒤 이새를 찾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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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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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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