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레이블링, 소위 데이터 눈알 붙이기 아르바이트에 손을 댄 계기는 당연히 돈이었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면서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내면 가계부 앱은 ‘조금 더 저축하세요!’ 라는 조언을 내뱉었다. 하지만 말이 쉽나. 줄줄이 떠오르는 투자 상품이며 주식 추천 종목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천 원을 투자하면 12개월 이후 9프로의 이자를 받는다지만 12개월 후까지 기다리기엔 막막했다. 퇴근하고 나면 재택 아르바이트를 찾아 헤맸다.
블로그 원고 쓰기, 레포트 아르바이트 등등 재택 아르바이트는 많았다. 하지만 이것도 직장을 다니며 겸업으로 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들었다. 내 하루가 30시간쯤 되고 4시간만 자고도 쌩쌩한 몸이라면 몰라도, 스트레칭 할 때마다 아이고야 신음이 절로 나는 몸으로 밤을 새면 결국 약값이 더 나간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데이터 레이블링이라는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이거 뭐, 돈 나가는 건 아닐까. 다단계 같은 건 아닐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데이터 분석가’ 라는 타이틀을 단 잘나가는 친구에게 물어보자 친구는 자뭇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괜찮아. 인공지능의 성장에 이바지하는 셈 치고 해라.”
아니,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바지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27인치 모니터와 괜찮은 시력과 그럭저럭 움직이는 손이 있었다. 딱 그것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사진을 보며 한없이 지정된 사물에 박스를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박스 하나당 200원을 받는다고 해도 적어도 매일 아침 털어 넣는 종합비타민 값은 나올 듯했다. 그래서 호기롭게 사이트에 가입 신청을 하고 나는 밤마다 박스를 그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인공지능에게 뭘 가르치는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일 만의 일이었다. 도로에 차들이 줄줄이 늘어선 사진 한 장에서 36개의 차량을 찾아내 박스를 그리며 나는 욕설을 다섯 번 내뱉었다. 똑같은 모양의 차들이 줄지어 안전운행만 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사진에는 겹친 자동차, 칼치기하는 오토바이, 무단횡단중인 행인, 방치된 자전거가 섞여 있었으며 나는 세 살 조카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모, 저건 차야? 응. 차야. 저것도 차야? 응. 차야. 바퀴가 두 개 달린 거는 차야? 응. 차야. 그럼 자전거는 차야? 응. 이륜차야. 그런데 왜 사람 다니는 길로 막 달려? 그러게. 확 신고해버리고 싶다.
오토바이를 찾아서 박스를 치라는 프로젝트를 받았을 때는 울고 싶었다. 정말 세상에는 어디에나 오토바이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운전면허도 없는데, 저게 바이크인지 오토바이인지 스쿠터인지 어떻게 알아보란 말인가.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에 사용될, 차와 행인을 구별하는 중요한 시스템의 근간이 될 거라는 친구의 위로를 듣는 것도 별 소용은 없었다. 반려, 반려, 반려가 쌓여갔다. 좀 더 타이트하게 박스를 그려주세요. 백미러를 가리지 않게 해주세요. 하, 씨. 크라우드 플랫폼이라더니.
이건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 노가다를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초보 작업자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별로 없었다. 포인트를 쌓아서 다음 단계 작업을 하려면 초보 작업자의 본분을 다해야 했다. 간신히 포인트 일만 점을 채워서 다른 단계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과장을 보태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지나가는 모든 것이 데이터로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그 다음 레벨에서는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영상을 보고 핵심 구간을 태그했다. 웹툰을 5화 정도 보고 맞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매우 애매하고 귀찮은 작업이었다. 코로나 시국을 맞이하여 카페에 갈 수도 없고 독서실에 갈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퇴근 후 집 안에서 눈이 시리도록 뭔가를 보고 요약하는 작업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콘텐츠가 있는지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이렇게 요약을 하면 의미가 있나? 아니, 책 한 페이지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10분짜리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더니 이제 그 영상의 핵심 구간을 태그하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물론 정보의 바다에서 내가 하는 작업들은 소비자의 취향 분석과 맞춤 콘텐츠 추천에 도움이 되겠지만 웹툰 태그 작업을 하고 나서 나는 보던 웹툰을 일주일 정도 끊었다. 사람을 어떤 일에 진저리나게 하려면 그 일만 종일 시켜 보면 된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제일 싫었던 건, 단가가 꽤 높음에도 불구하고, 폐쇄회로(CC)TV로 촬영된 듯한 저화질 영상에 ‘폭력’과 ‘위험’ 태그를 붙이는 일이었다. 이 일은 분석도 아니었고, 요약도 아니었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후줄근한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얼굴은 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거나 너무 화질이 낮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5분 정도의 영상 안에 별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없음’ 이라고 태그를 붙이고 제출했다. 하지만 결코 낮지 않은 빈도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등장했다. 사람 둘이 갑자기 서로 멱살을 잡는 사건이 나타나면 폭력. 술에 취해 대자로 누워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위험. 주먹질을 하면 그건 폭력. 골목길에서는 정말 별 일이 다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고민에 시달려야 했다. 가이드라인은 명백하게 행동이 일어난 상황에만 태그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수많은 애매한 상황이 존재했다. 사람과 사람이 멱살을 잡으면 폭력인데, 사람이 길고양이를 걷어차면 폭력에 해당하나? 그건 폭력이 아닌가? 한 쪽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한쪽이 끊임없이 삿대질을 하며 다른 한쪽을 몰아붙이면 폭력인가, 아닌가? 목줄을 맨 개를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은 폭력인가? 길고양이 사료인 듯한 그릇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침을 뱉는 행위는 위험인가? 동물이 든 박스를 골목길 구석에 내려놓고 도망가는 행위는 폭력인가? 그렇지만 그런 애매한 상황들이 저화질 영상을 지켜보는 걸 그만두게 만든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 ‘없음’으로 처리된 영상은 실제 폭력이나 위험 태그가 붙은 영상보다 단가가 낮게 책정되었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이건 아마 CCTV와 연동된 인공지능이 특정 상황을 포착하면 경고음을 내거나 경찰을 부르도록 돕는 데이터 작업일 테니까 실제로 사람이 위험하고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에만 태그를 붙여야 하고, 그런 데이터가 더 ‘필요한’ 데이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느 주말, 캔맥주 하나를 홀짝이며 영상을 쭉 보다가 어른 한 명이 아이의 팔을 끌고 골목길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저기서 어른이 아이를 때리면 폭력이다. 아이가 어른을 때리면 그것도 폭력이다. 나는 폭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태그 버튼을 누르려고 캔맥주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어른은 아이를 때릴 듯 몇 번 손을 들어올리다 가 버렸다. 아이는 우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나는 캔맥주로 다시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아, 아깝다. 때리면 폭력이니까 50원 더 받는데.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좀 혐오스러워졌다. 위험이나 폭력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CCTV 관련 아르바이트 프로젝트에는 접속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크라우드 작업이란 게 본래 그런 거였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할 테니까 막대한 데이터 속에서 조용히 할 만큼 하고 떠나도 되는 일. 그러니까 나는 단계에 맞고, 적성에 맞는 다른 작업을 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한동안 다른 자잘한 일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현재 기준으로 폭력을 판단하고 있고, 그걸 인공지능에게 학습시키고 있다.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짧은 찰나에도 많은 것들을 폭력으로, 상해로, 위험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현재의 기준을 미래에 학습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딥러닝을 아무리 한다 한들 인간이 폭력이라고 태그를 달지 않은 행동을 인공지능은 폭력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결국 사람의 기준보다 한 발짝 늦게 학습하고, 한 발짝 더딘 판단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결국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은 인간이니까. 이것은 바둑의 기보나 문학의 문장과는 또 다른 것이어서, 옳다 그르다를 가르는 인공지능의 판단이 인간보다 공정해지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친구와 줌을 켜놓고 술을 마셨다. 만나기는 어려운 시국이니 화상카메라로 건배라도 하고,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본업도 아니고 진짜 인형 눈알 붙이는 수준의 부업에 왜 그렇게 진지해?”
친구는 비난보다는 흥미롭다는 어투로 나에게 물었다.
“껄끄러워. 어쨌건 내가 한 작업으로 뭔가가 학습을 한다는 거잖아?”
“바퀴벌레 있을까 봐 컴퓨터 본체 청소 못 하는 소리 하고 있네. 아무 데이터도 주입하지 않으면 딥러닝도 못 해.”
“그거야 그런데.”
나는 말문이 막혀 캔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친구가 턱을 괴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우리 회사 두꺼비 징계 먹었다.”
친구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박수를 쳤다. 두꺼비는 친구 옆 팀의 팀장 별명이었는데, 취미가 신입사원 트집 잡기였다. 이렇게 바짝바짝 군기를 잡아 놔야 나중에 실수를 안 한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었고, 친구도 몇 번 당한 적이 있었다.
“신입한테 소리 지르면서 어깨를 서류철 모서리로 쿡쿡 찌르고 머리 때리고 손으로 민 거, 하나하나 동영상으로 찍어놨거든. 티 나게 설치하면 안 되니까 신입 책상에 공기계 하나 두고 CCTV 앱으로 연결해서 움직임이 감지되면 찍히게 했지. 기술 좋아졌더라. 그렇게 괴롭힌 게 한두 번도 아니라 증거 모이니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았어.”
“잘했다. 진짜.”
친구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캔맥주를 마셨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라고 하지만, 세상이 다르니까. 증거 있냐고 우길 때 동영상 제출을 받았다고 하니까 얼굴이 확 굳더라고. 두꺼비는 사람만 우습게 본 게 아니라 기술도 좀 우습게 본 듯.”
“그러네.”
내가 맞장구치자 친구가 다시 턱을 괴었다.
“조금 늦어도 아예 아무것도 발전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야. 내가 이런 말 한다고 네가 하는 걱정이 단번에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 날은 간만에 푹 잘 수 있었다.
띠링. 새로운 프로젝트가 오픈되었습니다. 나는 퇴근길에 터덜터덜 걸어가며 메일을 확인했다. 새 프로젝트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맞춤 메일이 오곤 했다. 이번 건수는 포인트가 사천이었다. 나는 와, 하고 스마트폰의 글씨를 키웠다. 사천이면 박스를 이십 개 치고, 이십 개 모두가 보류 없이 통과되어야 하는 포인트였다. 대체 뭐기에 그러나. 나는 상세요강을 확인했다. 그리고 윽,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일반인 사진 모집 프로젝트였다. 육십 대 사진이 사천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24개월 이하 유아. 뭐, 애먼 데 쓰이지 않고 인공지능이 사람의 표정을 분석하는 데 쓰인다지만 사진 속 사람의 개인동의를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아서 생기는 향후 문제는 모두 작업자가 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돈 벌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내게 가장 가까운 60대 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는 이야기다.
역시나 엄마는 펄쩍 뛰었다.
“어휴. 데이터고 뭐고 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분석한다는 거 아냐. 난 그런 거 싫어. 안 한다.”
“엄마 아니면 아빠라도 좀.”
“됐어. 할 거면 너네 외할머니 사진 갖고 해.”
일가친척이 팔도며 외국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터라 이모며 고모도 부탁하기 어려운데, 외할머니라니. 나는 순간 엄마가 말을 잘못 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외할머니는 85세까지 사시다가 3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심령사진도 포함이 되나? 아니, 이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집으로 와서 엄마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외할머니라니, 무슨 소리야. 돌아가셨잖아.”
“그래. 뭐, 증명사진 구도로 찍어야 된다며? 외할머니 영정 사진이면 딱 맞겠네.”
“아이고, 어머니. 진심입니까.”
생전에 엄마와 외할머니는 사이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기억했다. 늘상 온갖 간식을 들고 먹어라 먹어라 하고 날 쫓아다니시는 외할머니와 애 살찐다고 그만 좀 주라는 엄마의 타박 정도. 돌아가시기 전 투병을 하실 때는 돌아가면서 간병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장지로 갈 때 정말 바닥에 주저앉아 애처럼 엉엉 울었다. 그런데 지금 그 엄마가, 외할머니 영정 사진을 데이터로 써도 된다니. 이건 신종 부모 욕보이기인가 아닌가. 고인에게 개인동의서를 받을 수야 없겠지. 초상권도 상속되나? 나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
“60대라니까? 외할머니 80대에 돌아가셨어. 컴퓨터한테 보여주는 거라니까. 컴퓨터가 설마하니 80살이랑 60살을 구분 못 할까.”
그리고 만에 하나 80대 이상의 얼굴을 수집하는 프로젝트가 열리면 그때는 포인트가 더 비쌀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갑자기 우스운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깔깔거리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너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는구나? 2002년에 우리 딸, 몇 살이었더라? 15살?”
사정을 들어 본즉 이러했다. 외할머니, 죽는 날까지 스마트폰이며 컴퓨터는 가까이 하지도 않는 분이셨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어릴 때 꼴도 보기 싫던 일본이랑 월드컵도 공동 개최하는데 뭔가 해야겠다 결심을 하셨다고. 엄마 말로는 2000년 밀레니엄 새천년이 되면 우리 구주 내려오셔서 천년왕국 만드시리라 믿었는데 2002년이 되도록 천년왕국은 코빼기도 안 보이니까 실망하셔서 그런 거라고 하셨지만. 아무튼 그때 할머니는 영정사진을 찍기로 결심하셨더랬다. 그런데 영정사진을 혼자 찍기는 쑥스럽고, 마침 외갓집에 설이라고 다들 모인 날, 말씀을 하셨단다.
“나 더 늙기 전에 영정사진 찍을란다. 환갑도 넘었으니 언제 주님 품에 갈지 모르는데, 세상에 남은 얼굴이라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야지. 마침 내 어릴 때 웬수같던 일본하고 우리나라하고 그 뭐냐, 뽈도 같이 찬다며?”
당연히 생일날 무슨 영정 타령이냐고 집안은 뒤집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다고 해서 한일전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그때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걸 보니, 나는 아마 사춘기라도 호되게 치르느라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큰어른이 찍으시겠다면 찍으셔야죠. 할머니가 딱 버티고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날 만큼 고집 센 양반이었다는 건 나에게도 기억이 날 만큼 선명했다. 그리고 정말로 할머니는 그 해 5월에 한복 곱게 입으시고 영정사진을 찍으셨다고 한다. 그 해 5월 31일, 한일월드컵이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4강에 진출했다. 대-한민국. 짜작짝짝짝.
“아니, 그래도 살아 계시면 88세시니까 되짚어 봐. 2002년에 이미 70세신데?”
나에게는 먹이려는 기억밖에 없는 외할머니지만, 그래도 사자의 존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어떻게든 자기 대신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데이터 바다에 물방울 하나로 보태려는 엄마를 말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음. 하지만 엄마는 한 번 더 한국 근현대사를 휘둘러서 날 한 방 먹였다.
“너네 외할머니 주민등록증에 다섯 살 어리게 올리셨어. 그러니까 서류상으론 60대야.”
“뭐? 대체 왜?”
“아유, 그 때야 뭐. 자기 나이 제대로 등록한 사람 반 올리고 내린 사람 반이었어. 엄마 지금 친구랑 통화해야 돼. 끊어.”
아아아아. 그래. 나야 주민등록제도가 철석같이 자리잡은 때 태어났다지만 우리 엄마도 주민등록제도 시행 전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3년인가 늦게 올라갔댔지. 그때야 지금처럼 딱딱 산모수첩 갖춰서 애 백신 맞춰라 건강발달 검사해라 학교 보내라 하는 시기도 아니었고. 1962년에 시행된 주민등록제도 앞에서 당시 이미 우리 엄마를 낳았던 할머니 심정을 어찌 알랴. 아무튼 서류상으로도 인물이 60대요, 찍은 것도 무려 20년이 다 되어가는 영정사진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외갓집에 갔을 때는 휑한 방에 외할머니 물건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통화 중이었다. 나는 네 평짜리 원룸에 가습기를 틀어놓으며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서 그 영정사진은 어디 있는 거냐고.
“멀다, 멀어.”
엄마가 알려준 곳은 납골당이었다. 외할머니를 모신 곳에 나는 처음 가는 거였다. 외할머니를 납골당에 모시는 날, 날이 너무 추워서 애들은 차 안에 있으라고 했고 나는 조카들을 돌보느라 차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납골당에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요즘은 뭐, 납골 항아리를 땅에 다시 묻느니 납골함을 메모리얼 북으로 만드느니 온갖 게 다 있던데 외할머니가 있는 납골당은 그냥 납골당이었다. 탄탄한 전면 유리 장식장 안에 납골 항아리가 하나 있고, 할머니 사진과 외할머니가 생전 늘 쥐고 기도하시던 반질반질한 십자가가 하나. 진짜, 납골당에 와서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면 외할머니가 내 입에 넣어 주시려던 약과로 맞을 것 같았는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여기가 무슨 사물함도 아니고 참 썰렁한 곳에 외할머니가 계시다는 것. 하나는 납골함 앞에 하나씩 놓인 영정사진을 보고 ‘와, 이거 다 찍어다가 앱에 올리면 대체 포인트가 몇만이야?’ 싶었다는 것. 외할머니의 납골함 앞에서 나는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서 영정사진을 찍었다. 유리에 빛이 반사되어 희뿌연 점이 남아서, 몇 번이고 다시 찍었다. 에이씨, 하고 짜증을 내다가 나는 주머니에 있는 안경닦이를 꺼내 뽀득뽀득 외할머니 영정 앞 유리를 닦았다. 사진 속의 외할머니는 한복을 차려 입고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웃고 계셨다. 확실히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모습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이십 년이 지나면 노인도 늙는구나. 나는 외할머니 납골함을 뒤로 하고 다른 사람들의 납골함을 둘러보았다.
새삼스러운 건, 죽음은 사람의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 찍혀 있는 사진도 있고, 교복 입은 학생이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찍힌 것도 있었다. 아마도 이 사람들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나이 상관 없이 닥쳐온다는 걸 알면서도, 이 사진이 자신의 영정이 될 줄은 몰랐겠지. 대체적으로 영정 안의 얼굴이 어릴수록 사람들이 함께 넣은 물건이 많았다. 사랑한다는 편지, 작은 장신구, 좋아하던 장난감 같은 것들. 나는 하,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정말 이런 곳만 돌아다니며 죽은 사람의 사진을 훔쳐다 데이터로 써먹을 수도 있겠지 싶었다.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하지 말란 짓을 인간이 모두 하지 않았다면 세계는 턱없이 평화로웠을 테니까. 사진이 연령대에 따라 이목구비의 위치, 피부의 탄력도, 골격으로 나뉘는 데이터 세계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무슨 차이 있으랴. 나는 납골당 밖으로 나와 커피 하나를 뽑아 벌컥벌컥 마신 후 캔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만 메모리에 남기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서 번호 키를 누르며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녀왔어. 납골당.”
“외할머니가 반가워하시겠네. 그렇게 비쩍 말랐던 애가 이렇게 건장해졌으니.”
“엄마는 거기 가? 난 별로던데. 괜히 으스스하고 찝찝해.”
“엄마는 돈 좀 더 쓰더라도 추모공원에 묻어 줘. 위에 꽃도 좀 심고.”
드르륵, 문이 열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근데 할머니는 화장 싫어하시지 않았나? 전쟁 때 보니까 불이 그렇게 무섭다고.”
“미리 장지라도 사 놓고 그런 말을 하셨으면 몰라도, 장지가 없는데 어쩌냐.”
“집단 불효 아닌가. 청개구리 가족도 아니고.”
나는 컴퓨터를 켜고 휴대전화를 연결해 사진을 불러왔다. 멀리서 찍고, 가까이서 찍고, 고화질로 찍고. 영정사진이라고 곱게 찍어달라고 땅땅 못을 박고 찍으셨다니 포토샵 처리가 되어 있을 영정을 한 번 유리 액자에 넣고, 그걸 또 납골당 유리 한 겹 너머에서 찍었으니 사진 화질은 떨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2002년 당시의 외할머니를 보는 것은 반갑기도 하고 그리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불러일으켰다. 포토샵을 켜서 사진을 되도록 선명하게 하고, 반사된 빛이며 외할머니의 머리 양 옆에 있는 검은 리본을 살살 지웠다. 차라리 2010년대쯤 찍으셨으면 디지털 원본도 받았을 텐데, 20여 년 전의 사진 원본이 어디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어디서 찍으셨을지는 몰라도 그 사진관도 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검은 리본까지 지우고 나니 유리 너머로 반사된 다른 영정사진이 보였다. 여성 노인이었다. 쪽까지 단정하게 찌시고 옥색 한복을 차려 입은 모습에서는 꼬장꼬장함이 희미한 모습에서도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마 저 분도 미리 찍으셨겠지. 나는 마우스 휠을 돌려 그 할머니가 찍힌 부분을 확대해 보았다. 딱 여학교 교장선생님처럼 생기셨네. 입 꼬리는 너무 희미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다듬으면서, 나는 그 할머니의 입꼬리도 올라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길 사진이라면 웃는 게 낫지 않을까. 으으으- 하고 나는 내 양 볼을 손으로 잡아늘여 보았다. 입꼬리의 각도와 눈매, 얼굴의 주름으로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을 가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사진관에서는 웃으라고 하고 웃음을 찍으니까, 어떻게 보면 증명사진 속의 웃음은 가짜 웃음인 거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지우개질로 다듬어낸 외할머니의 사진 속 웃음은 진짜 같았다. 찍은 당시에는 웃으래서 웃은 거였어도, 할머니 뜻대로 영정사진이 되어 나를 보는 웃음은 진짜가 아닐까. 시간이 지나서야 진짜가 된다니, 웃음이 무슨 묵은지도 아니고, 그저 말도 안 되는 가정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거 영 가성비 안 나오네.”
증명사진 모으기 프로젝트에 대한 내 감상은 그랬다. 멀리 경기도 어디까지 가서 버스 비용에, 외할머니 뵌다고 차려 입은 옷에, 꽃다발에, 자판기에서 뽑아 마신 커피 한 캔 값까지 치고 포토샵으로 다듬는 시간까지 합하면 아무리 잘 봐줘도 적자였다. 정말 그 납골당에 있는 사진들을 다 쓸어와서 데이터로 제출한다면 몰라도. 하지만 개인정보 보호법과 초상권 침해를 떠나서, 자기가 언제 죽어 어디 안치될지도 모르는 그 사진들을 데이터 더미에 때려 넣었다가 무슨 에러라도 일어나면 골치 아프지 않을까? 아니, 물론 원한령이 있든 없든 컴퓨터 데이터가 오고 가는 서버를 조작할 수야 없겠지만. 있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SF와 오컬트의 콜라보레이션이지. 아마 천도제는 비트코인으로 치르겠군.
증명사진으로 수집된 데이터는 여러 곳에 쓰인다는 프로젝트 안내 메일을 나는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모 노인 대상 대화용 안드로이드의 얼굴 인식용, 표정 분석 로봇의 데이터용, 노인의 특징을 인공지능에 합성시키는 용도 등. 그렇군. 외할머니, 4000 포인트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제출 버튼을 누르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 다른 프로젝트들을 훑어보다가 포토샵 창을 다시 열었다. 외할머니의 사진 옆에서 잘라낸 닳은 십자가, 멀리서 찍어 놓은 봉안당의 사진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저장하시겠습니까’ 에 ‘아니오’를 누르기 전, 조각조각 잘려진 사진 찌꺼기들을 보았다.
그때 왜 친구가 해 준 말이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증거가 모이니 됐다고. 친구는 징계위원회에 들어가 자기가 동영상을 하나하나 재생해 가며 증언했다고 했다. 여기 소리 질렀죠? 폭언이에요. 파일 모서리로 머리 때렸죠? 폭력이죠. 사람들 다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거, 이거 인격 모독에 해당할 수 있고요. 그때 두꺼비는 그렇게 항변했다고 한다. 그래 봤자 여기 찍힌 게 폭력 하나 폭언 하나 인격모독 하나인데 하나쯤 실수할 수도 있지, 이렇게 사람을 소집하나? 징계위원회에서 친구는 말했다. 하나하나가 모여서 쓰리아웃이에요. 지금 권위적 관계를 이용해서 하급자에게 직장 내 괴롭힘을 시행하신 거죠. 한 사람의 고발만으로 이럴 수 있냐는 호통에도 친구는 대답했다. 촬영 기획에 기획팀 신이수 사원, 촬영 카메라 프로그램은 제가 깔았고요, 피해자인 김진수 사원은 혼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고, 사전에 우리 팀장님과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도 우리 팀 양소라 사원이 상담했어요. 한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목격자입니다. 이건 그냥 증거일 뿐이에요. 데이터라고요.
모아서 쓰리 아웃이라. 외할머니의 사진에서 잘려 나간 닳은 십자가는 그냥 십자가지만, 외할머니 옆에 놓으면 그건 그리움이 된다. 아이의 눈을 동그랗게 뜬 사진은 그냥 사진이지만, 그게 납골당에 놓여 있다면 영정사진과 안타까움이 된다. 합쳐지면 달라지는구나. 사진 한 장이 여러 개의 프로젝트에 데이터가 되는 것처럼. 나는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60대 노인이라는 것으로 분류했지만 무언가에게는 미소로, 무언가에게는 피부의 주름살로, 무언가에게는 자신이 우선 구해야 하는 노약자로 분류되기도 하겠구나. 나눠지면 달라지기도 하겠구나. 갑자기 외할머니에게 좀 죄송해졌다. 외할머니, 저는 아무래도 외할머니를 생각보다 많은 곳에 팔아먹은 것 같습니다. 4000 포인트로 할머니 납골당에 레쓰비 캔 커피라도 하나 사 갈 걸 그랬나요. 생전에 마시면 잠이 안 오니 어쩌니 하셔도 냉장고에 항상 다섯 캔씩 구비해 두시고 제가 마시면 화내셨잖아요. 늙은 할미 주전부리 뺏어먹는다고.
그러게. 나의 외할머니가 60대에 영정사진을 찍은 노인이고, 서기 이천 년 천년왕국을 믿는 개신교도였고, 80대까지 살다 돌아가셨고, 주민등록에 실제 나이보다 어리게 등재된 사실을 모두 모아 외할머니가 되었듯이. 인공지능에게 하나하나를 가르치는 일은 더디고 답답해 보이고 현실보다 늦게 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폭력을 가르치는 순간 다른 사람은 같은 데이터로 동물학대를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어디 사는 누군가는 몸짓으로 행동을 추정하는 알고리즘을 짰을지도 모른다.
데이터는 그냥 데이터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개입하는 순간 자료가 되니까. 친구 말마따나,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면 딥러닝도 되지 않겠지. 언젠가는 골목길 CCTV의 화질이 선명해지고, 아이의 우는 얼굴이 감지되고, 손을 올리는 어른이 폭력의 징조로 감지되어 아이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길고양이를 학대하면 벌금이 나올지도 모른다. 희망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미래에게 그렇게 바라기로 했다. 내가 박스를 치고 해석한 모든 것이, 데이터로 등록한 모든 것이 미래에게 안내자가 되기를. 개당 250원으로 내가 미래에게 공정함과 신뢰를 부여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