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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앞에 평등한 동물병원을 꿈꾸며

 

어렸을 적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잡지는 ‘보물섬’이었다. 두툼한 만화잡지가 주는 포만감은 다음 호가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게 했다. 중학교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대체한 잡지가 과학동아였다. 우리 집 화장실에는 언제나 과학동아가 있었다.
물리나 공학보다는 생물학과 식물, 동물 관련 기사를 즐겨 읽었다. 덕분에 학창시절 생물 성적이 가장 좋았다. 과학동아에서 세포사멸(apoptosis)과 괴사(necrosis)의 차이를 알려주는 기사를 즐겨 읽던 중학생에게, 주관식 문제 정답이 ‘미토콘드리아’ 수준이던 학교 생물 시험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졌다.

테니스, 미식축구, 양식학… 방황의 끝에 수의사가 되다
수의학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과학동아에서였다. 찌는 듯이 더웠던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미지근한 방바닥에 엎드려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때 서울대 수의대 학생이 수의학을 소개하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인간 중심의 의학과 달리 모든 생명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이라는 구절이나, 우리가 먹는 육류나 유제품도 수의사의 손을 거쳐 안전성을 평가받는다는 내용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거나 실험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테니스를 쳤고, 장래희망도 테니스 선수였다. 중학교 이후 슬럼프로 테니스를 그만두게 됐지만, 다른 진로에 대해 크게 고민 하지않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부산수산대(현재의 부경대) 양식학과에 진학한 이유도 물고기와 바다가 좋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진학해보니 학과 공부가 너무 재미가 없었다. 공부 대신 미식축구 동아리 생활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취미생활이었지만 나중에는 미식축구협회에서 선발하는 대표팀에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렇게 마냥 시간을 흘려보내다 문득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예전에 과학동아에서 관심 있게 읽었던 기사 속 수의사가 떠올랐다.


다시 대학입시를 치르고 경상대(현재의 경상국립대) 수의학과 학생이 됐다. 하지만 ‘이제야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고 안도할 틈은 없었다. 시험은 너무 많았고, 시간은 부족했다. 재미가 없기로는 양식학과와 별 차이가 없었다. 나를 수의대로 이끈 과학동아 기사가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다만 졸업 후 진로는 고민될 만큼 다양하다는 것이 위로가 됐다. 어떤 날에는 동물원에서 동물을 진료하는 꿈을 꾸기도 했고, 어떤 때는 산업동물 임상 수의사로 돼지나 젖소 농장에서 생산성을 높일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수의과학검역원(현재의 농림축산검역본부)이나 식품의약품안전처 같은 곳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될 수도 있었다.

 

수의사의 매력은 ‘사연 듣기’

 


나는 개와 고양이를 중심으로 반려동물을 진료하는 소동물 임상 수의사를 선택했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지금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흥미롭다(다만 좋은 일로 병원에 오는 반려동물과 보호자는 없기에 이 사실은 비밀에 부치고 있다).


동물을 진료하고 질병을 확진하고, 원인을 제거하는 과정은 마치 추리소설과도 같다. 오랫동안 이유를 알 수 없던 증상의 원인을 찾아 치료할 때는 어려운 퍼즐을 맞춘 것처럼 신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수의사에게 진짜 흥미로운 일상은 따로 있다. 일하다 보면 보호자와 동물의 사연을 듣게 되는데 그게 여느 라디오 프로그램 부럽지 않을 만큼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 해준다. 반려동물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자신에게 반려동물이 어떤 의미인지 사연도 다양하다.


한번은 시골 식당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개가 찾아온 적이 있다. 꽤 신기한 재주를 가진 녀석이었다. 강아지 시절부터 할머니가 손님들이 음식값을 치를 때마다 앞발을 가지런히 모아 인사를 시켰던 모양인데, 크고 나서도 돈만 보면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개가 됐다. 병원에 올 때마다 재주를 한 번 구경하려고 나도 천 원권 지폐를 꽤 날렸다.


그런데 이 녀석이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다행히 열흘 만에 죽지 않고 돌아왔지만, 앞발을 디디지 못한다며 할머니가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올무에 걸렸는지 오른쪽 앞다리는 감염이 심하게 일어났고 악취가 진동했다. 괴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절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할머니는 앞발 모아 하는 인사를 다시는 못 본다며 한참을 우셨다. ‘이제 인사 대신 경례를 할까요?’하고 위로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껏 가장 잊을 수 없는 수술이었다.'

 

동물병원 가면 바가지 쓴다는 오해


이제 수의사는 중학생이 과학동아를 보다가 우연히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될 만큼 낯선 직업은 아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직업인 경우도 많고, 동물병원은 약국만큼 많아졌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늘어난 만큼 수의학과의 위상도 높아졌고, 우수한 친구들이 많이 선택하는 직업이 됐다(근래 후배 수의사들을 가르치고 있자면, 됨됨이가 군자와는 비할 바 없는 나조차 ‘군자삼락’ 중 한 가지를 어렴풋이 체험해볼 수 있다).


동시에 수의사를 믿지 않는 사람도 늘어났다. 아직도 동물병원에 반려동물을 데리고 들어오는 보호자들은 시쳇말로 ‘바가지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수의사가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검사나 수술이 혹시 진료비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닐지 의심한다. 반려동물은 건강보험과 같은 제도가 없다 보니 보호자의 형편이 넉넉지 않으면 적절한 진료를 해줄 수 없는데, 이런 점도 수의사에 대한 대중의 평가를 낮추는 요인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수의사가 동시에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이 됐다.


나는 수의학을 공부하는 내내 수의사를 믿지 못하는 사람과 수의사 사이에 화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해답을 협동조합에서 찾았다.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우리동생 동물병원)이라는 긴 이름의 동물병원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반려동물 보호자들이 모여서 만든 동물병원이다. 나는 병원 주인이 수천 명 있는 곳의 직원인 셈이다. 이곳은 보호자들이 조합원의 자격으로 ‘내 돈으로 내가 만든 병원에서 내가 고용한 수의사에게’ 반려동물의 진료를 맡길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진료비와 수술비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해졌고, 수의사들은 필요 없는 수술이나 입원을 권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되려 보호자들이 수의사가 귀찮아서 꼭 필요한 진료를 언급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또 조합원들이 만든 기금으로는 어려운 처지의 동물에게 무료진료 혜택을 주거나, 길고양이 등 유기동물을 지원하는 활동도 한다. 현재 동물보호단체인 ‘카라’ 등과 함께 길고양이 중성화(TNR)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합원들끼리 소모임을 통해 소통하기도 한다. 지금은 수제 간식을 만드는 모임, 고양이 돌봄 품앗이 모임, 펫로스의 고통을 나누는 모임 등이 있다.
과학동아에서 수의사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됐을 때 내가 수의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똑같이 협동조합 형태의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이곳의 원장으로 근무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지 수의사를 구하지 못해 폐업 직전이라는 말에 원장직을 수락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나의 최종 목표는 고가의 수술도 무료로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동물병원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수의사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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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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