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서울의 세종과학문화회관에서는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숨을 죽이고 이건수박사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던 인간의 기쁨과 슬픔, 치매 같은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이교수가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염기 서열이 완전히 밝혀진 2003년 이후 유전자를 이용한 각종 질병 치료는 이제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랐으나 신경생물학은 그의 연구가 출발점이 돼 가속화 될 것이라는 것이 전세계 언론의 평가다.
이상은 가상 시나리오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생물학의 시대를 꽃 피울 젊고 패기있는 분자생물학자인 이건수박사(39)가 있기 때문이다.
7시에 관악산 깨워
만날 약속을 10시로 정하면서 너무 이르지 않냐는 물음에 그는 더 일찍도 괜찮다면서 8시도 좋다고 한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몇 시에 연구실에 나오냐고 했더니 목표는 6시까지인데 잘 지켜지지 않아 대개 6시를 넘긴다는 것이 아닌가. 남들만큼 일하려면 일찍 일어나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서 저녁엔 그만큼 일찍 잔다고 겸연쩍게 웃는다.
주중에는 12시간,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6시간씩은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른 출근은 어찌 보면 자신과의 약속이다. 이때의 시간은 순수하게 일하는 시간이다. 즉 밥먹고 차 마시는 시간은 제외한다는 말이다. 교수가 이쯤되면 지도를 받는 대학원생들의 고통이 짐작된다는 말에 “글쎄요”하며 웃어넘긴다. 이에 대해 박사과정에 있는 유재철씨는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래서 다른 연구실 학생들보다 1시간 일찍 나오게 됐지만 하루를 길게 쓸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연구재산 1위
부모님은 의사가 되라고 했지만 고교때 미래를 결정하는데 꼭 부모님의 뜻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판단, 당시 주목받던 생화학을 공부하려고 서울대 생화학계열에 입학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들이 동물학과를 선택해 친구따라 강남가는 격으로 오늘날의 분자생물학과인 동물학과로 들어갔다.
그 후 자신의 결정이 행운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공부를 하면서 80년대는 유전자의 시대라고 파악하게 됐다는 것이다. 서울대에서 난자가 배란되는 메커니즘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8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장학제도의 천국이었다. 학비는 물론 조교를 하면서 생활비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텍사스 대학에서 세포의 분열 메커니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발생과정에서 세포분열이 어떻게 조절되는가를 연구했다.
그러던 중 모교로부터 11년 6개월의 미국생활을 청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과학자가 국내로 들어오기로 결정하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했더니 “한국이 미국에 비해 과학분야에 투자가 훨씬 적지만, 서울대에는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맨 파워가 있기 때문이다”고 힘주어 말한다. 미국에서는 지도교수가 연구원 한 명과 연구를 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못하다. 그에 비하면 능력있고 의욕넘치는 학생들이 돈을 내며 배우겠다고 하는 국내 상황은 어쩌면 또다른 돌파구라는 얘기다. 대학원생들이 재산이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는 국내에서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가 되려면 두가지 실력을 갖춰야한다고 주장한다. 전공 분야의 실험 능력과 이것을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논문으로 낼 수 있는 언어 능력이다. 물론 과학에서는 빠질 수 없는 창의적인 사고와 실험을 하는 사람의 필수 덕목으로 불리는 성실은 기본이다.
희노애락의 메커니즘에 도전
물리학과 화학의 시대가 가고 생물학의 시대가 왔다, 심지어 ‘유전자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제로 지금까지는 인간의 유전자를 찾는데 급급한 유전자의 시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유전자가 세포의 기능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파악해 그동안 난제로 남아있던 많은 질병과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포스트 유전자 시대’다. 즉 분자생물학에서 얻은 지식이 공학적인 기반 하에 산업화로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새로운 세기에 생물학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증거는 많다. 네이처 같은 과학전문지에서 발표되는 연구 논문의 50% 이상이 생물학 분야라는 것, 연구논문 색인 인용(SCI)의 상위 25위권 안의 분야도 모두 생물학이라는 것, 또 연구비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연구비의 60-80%가 생물학과 의학쪽에 투자된다는 것이 그 예다. 여기에 벤처 캐피탈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벤처기업하면 컴퓨터 분야만을 많이 생각하는데 미국에서는 생물학 벤처가 많다고 한다. 물론 이 중 흑자를 내는 것은 전체의 5% 이내지만 앞으로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현재 그는 인위변이를 일으킨 생쥐를 이용해 유전학을 연구한다. 그는 포유류이면서, 키우기 쉽고, 다루기 편하며, 인위변위를 일으키기 쉬운 생쥐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예를 들어 뚱뚱하지 못하게 만드는 유전자를 망가뜨린 초기 배아세포로부터 발생시킨 생쥐를 만들어 비만과 관련된 유전자를 연구하고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렇게 인위변위를 일으킨 생쥐를 가지고 유전학을 연구하면 인간 개체에서의 유전자의 기능은 물론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훨씬 쉽게 개발될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불임은 큰 문제다. 이 중 절반의 책임을 지닌 남성의 불임 요인을 유전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 그의 요즘 숙제다. 불임은 환경적, 질병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나지만 무엇보다 유전적인 원인이 클 것이라는 것이 이박사의 생각이다. 또 신경세포와 관련된 유전자의 기능을 밝혀 기쁨, 슬픔, 기억 등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일어나는지 밝히는 것도 그 이후의 과제다.
이러한 숙제를 풀기위해 이박사의 12시간이 소비된다. 오전 중에는 걸려 오는 전화도 받지않고 주로 논문이나 책을 읽으며 연구설계를 한다. 현재 연구자로서의 의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교육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강의 준비를 철저히 하는것도 그의 몫이다. 또 실험을 위해서 생쥐와 부대끼는 시간도 적지않다.
실패는 싫어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분자생물학의 미래를 그리던 그의 얼굴이 ‘실패’이야기가 나오면서 한순간 굳어졌다. 실패를 모르고 지냈을 것 같다는 말에 많은 실패를 무수히 경험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패를 싫어한다고 짧게 말했다.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항상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말이 아닐까. 그는 “실패를 통해 많이 배우는 것이 사실이다”라며 “하지만 실패를 인정한 시점은 이미 과거가 된 것이므로 그 전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많은 가능성을 탐색하고 노력해야한다”고 했다.
12시간을 일에, 12시간을 가족에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정생활에 실패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