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는 원래 산림의 굴이나 바위틈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최근에는 도시화 때문에 마을까지 내려온 경우가 많은데, 컨테이너 밑의 좁은 틈이나 오래된 가옥의 보일러실에 터를 잡는 경우가 많다. 10년 전인 2011년 5월에도 도시의 틈에서 너구리 6마리가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새끼 너구리가 사람에게 납치된 뒤 구조센터에 왔다. 어미를 잃고 버려진 것으로 오인해 안타까운 마음에 한 행동이었지만, 이 때문에 이들 너구리 6마리는 영영 어미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사람에 대한 ‘각인’ 때문이었다. 각인된 동물은 야생동물과는 다른 행동을 보인다. 특정 사람을 따르고 그 외의 모든 사람에게 심한 공격성을 보이기도 하고, 사람에겐 공격성이 없지만 동종에게는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각인 때문에 영영 잃은 야생성
구조센터에서는 각인을 풀기 위해 야생너구리의 서식환경과 비슷한 야외계류장에서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다른 곳에서 구조된 너구리들과만 생활하게 했다. 다행히 6마리 중 5마리는 각인이 풀렸고 야생으로 방생하는 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여전히 특정 사람만 따르는 각인 행동을 나타냈다. 야생으로 돌아가면 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구조센터에서 ‘짬이’라는 이름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구조센터엔 짬이 외에도 여러 마리의 너구리가 야생성을 잃은 채 생활하고 있다. 그중에는 모든 사람을 잘 따르는 ‘너울이’도 있다. 너울이는 1년 6개월 간 사람과 지내다 구조됐다. 일반인이 특별한 사유 없이 야생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불법이다. 아무리 정보가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지만, 사람은 야생동물을 결코 제대로 키울 수 없다(유튜브 영상을 맹신하지 말라!). 불행 중 다행으로 너울이는 건강에 문제가 없었지만 또 다른 너구리 ‘클라라’는 달랐다.
신고자는 클라라가 세탁기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야생동물인 어린 너구리가 어떤 연유로 세탁기에 올려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클라라는 이 사고로 좌측 전완 및 우측 대퇴골두가 골절됐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부적절한 사육으로 다리가 안쪽으로 굽는 구루병 증상을 보였다. 신고자가 그동안 급여했던 먹이는 비타민D가 부족했던 것이다.
새끼 동물이라 골절 부위는 금세 붙었지만 모양이 변한 다리는 꾸준한 치료가 필요했다. 먹이에 비타민 영양제를 섞고 매일 재활운동에 전념했다. 운동량을 늘려가며 근육을 만든 결과 여느 너구리처럼 걷게 됐다. 하지만 강아지처럼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던 클라라도 야생으로 나가지 못하고 구조센터에 머물게 됐다.
클라라 곁에는 ‘데이비드’라는 너구리가 있다. 차량 충돌로 구조된 데이비드는 양측 대퇴골 골절, 두부 출혈로 구조 당시 하루하루가 위기였다. 두 달 동안의 치료를 통해 기적같이 회복됐지만 왼쪽 시력을 잃어 구조센터에서 함께 살고 있다.
본래 너구리는 무리생활을 하며 다른 개체들과 소통한다. 각인된 동물은 어릴 때 어미와 떨어져 이런 습성을 배우지 못했거나 잃었다. 클라라와 데이비드는 성별이 다르고 같은 해에 태어난 덕분에 짝이 될 수 있었다. 너구리는 생에 한 번 짝을 지으며 둘은 지금도 금실 좋게 지내고 있다. 두 너구리의 재활과 복지를 위해 데이비드가 중성화 수술을 받아 새끼 너구리는 태어날 수 없다. 짬이와 너울이는 동종에게 공격성을 보이게 각인됐기 때문에 단독 계류장에서 각각 홀로 살고 있다.
이들은 구조센터 직원의 관심 속에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지만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다.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단지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너구리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돌덩이가 되기 전에 구조센터에 올 수 있다면
각인 외에도 개와 고양이의 공격, 기아 및 탈진, 수로 고립, 덫, 올가미, 차량 충돌 등 너구리를 위협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위협은 기생충인 개선충 감염이다. 지난해 구조된 너구리 중 58%에 해당하는 105마리가 개선충 때문에 구조센터에 왔다.
‘옴 벌레’라고도 불리는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는 가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피부를 긁어 스스로 상처를 낸다. 갈라진 피부에 상처가 생기며 세균들이 들어온다. 피부에는 두꺼운 각피층이 형성되며 털이 빠진다. 한 생명체가 마치 돌덩이처럼 변해간다. 체온은 점점 내려가고 몸은 점점 둔해진다. 먹이 활동에 장애가 있을 정도로 둔해진 너구리는 탈진 상태로 사람에게 발견된다.
개선충은 대다수의 포유류에 기생하지만 너구리는 특히 취약하다. 고립된 환경인 굴에 함께 사는 배우자나 새끼에게 전염시키고 공동화장실을 통해 가족이 아닌 개체까지 감염시킨다.
개선충은 너구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치료는 가능하다. 체온을 올리고 수액을 주입한 뒤 이버멕틴과 같은 구충제를 주사하면 회복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감염 초기에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야생동물은 포식자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신고가 중요하다. 발견자 중에서는 너구리의 흉한 몰골에 겁먹고 피하는 경우도 있다. 신고자가 직접 만지거나 구조해야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전문 구조기관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피부가 여느 너구리와 다른, 털이 빠진 너구리를 본다면 지체하지 말고 신고해주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