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부분은 ‘KAIST인’이 아니다. 그래도 KAIST가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는 지난 50년간 KAIST가 연구와 교육이라는 목표에만 매진하지 않은 덕분에 사회 곳곳에서 KAIST인들을 만날 수 있어서다. 창업을 통해 굴지의 기업이 나왔고 지금도 많은 기업이 창업되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 문제를 진단하는 과학기술정책학을 육성했고 대중과 소통하는 과학자도 KAIST에 있다. 과학기술로 사회에 말을 건 사람들을 만나봤다.
[ KAIST인 사회에 기업을 짓다]
● 창업 성공해 KAIST 100억A 기부자로 돌아온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네오위즈, 첫눈, 본앤젤스, 크래프톤(前블루홀), 이렇게 4개의 회사를 창업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은 KAIST 전산학부 재학 당시에도 유명인사였다. 특정 장소에서 길게 줄을 서서 해야 했던 수강신청 방식을 개선해 어디에서나 신청이 가능하도록 직접 개선했다. 정보기술(IT) 서비스 제작 동아리 SPARCS에서 이뤄낸 일이었다. 서면 인터뷰를 통해 장 의장에게 직접 창업을 하게 된 계기를 물어봤다.
“학부생 땐 동아리 활동을 무척 열심히 했습니다. 석·박사과정 땐 실험실의 연구 주제가 저와 너무 맞지 않아서 공부가 재미없었죠. 1995년 웹이 세상에 처음 나왔는데, 세상이 변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창업하게 됐습니다.”
첫 창업 당시 장 의장의 목표는 무척 단순했다. “사회적 규범을 어기지 않고 3년 동안 열정적으로 해서 10억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네오위즈는 이처럼 목표가 단순해 오히려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고 변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두 번째로 창업한 인터넷 검색 플랫폼 ‘첫눈’을 매각해야 했을 때, 블루홀에서 직접 이끌었던 온라인 게임 ‘테라’의 중국 서비스가 부진했을 때를 가장 뼈아팠던 순간으로 떠올렸다. 장 의장은 25년 전과 비교해 창업 환경은 훨씬 좋아졌지만 창업가의 외로움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어떤 정부도 창업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선배 창업자들의 도움까지 더해져 ‘스타트업 생태계’가 풍성해졌지요. 하지만 창업이라는 특성상 여전히 성공하는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성장통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죠. 창업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독단적으로 판단하기보단 협업을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회사를 만들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작년 1월 장 의장은 KAIST에 100억을 기부했다. 통 큰 기부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했다. 그는 “과거 지도교수께서 창업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KAIST에서 제가 만든 수강신청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제가 이룬 것들은 KAIST 생태계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기부금이 KAIST 학생들의 ‘우연한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 굴지의 IT 기업 창업가 길러낸
전길남 KAIST 전산학부 명예교수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길남 KAIST 전산학부 명예교수의 주도로 1982년 우리나라 최초로 인터넷이 구축됐다. 이 시기에 KAIST에도 인터넷이 연결됐다. 당시 전산학부 학생들은 신문물인 인터넷을 하기 위해 연구실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전 교수가 이끈 시스템아키텍처 연구실에서는 굵직한 창업가들이 많이 탄생했다. 넥슨 창업자인 김정주 NXC 대표, 리니지의 아버지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국내 최초의 인터넷접속서비스업체 아이네트 창업자 허진호 대표 등 현재 IT 업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들이 시스템아키텍처 연구실 출신이다. 1월 4일 화상인터뷰를 통해 전 교수에게 연구실에서 굵직한 창업가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어봤다.
“지금은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1980년대에는 카세트테이프와 TV 같은 전자기기를 만들며 세계를 쫓는 수준이었어요. KAIST 학생들은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인터넷을 경험했지만, 이 친구들이 갈 만한 마땅한 기업이 없었죠. 창업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어요.”
전 교수는 “당시 학생을 뽑을 때 운동을 잘하는지 제일 먼저 봤다”며 “밤을 지새우며 연구하는 게 일상이라 체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하던 친구들 중 리더십이 있는 친구들이 자는 시간을 쪼개 창업을 시도했다”고 덧붙였다.
잠을 쪼개가며 연구와, 창업까지한 창업가들이 마치 신화적 인물처럼 느껴졌다. 전 교수는 “지금 학생들과 비슷한 점도 있다. 때로는 연구는 미뤄두고 온라인 게임에 몰두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이를 제지하진 않는 편이었다”고 말했다. 게임회사 대표의 탄생이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전 교수는 앞으로는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창업가들이 많이 나타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코로나19, 기후변화, 플라스틱, 각종 오염 등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세상에 널렸다”며 “KAIST가 쌓아온 창업 노하우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 따뜻한 사회 꿈꾸는 젊은 창업가
돌봄드림 김지훈 대표,
한동엽 부대표
TOVDATA 박효진 대표
최근 1~2년 사이에 KAIST에서 창업한 두 기업의 설립자를 만났다. 기업이 데이터 관련 규제를 지킬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한 ‘토브데이터(TOVDATA)’와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조끼를 제작한 ‘돌봄드림’이다. 두 기업이 보유한 기술은 전혀 다르지만 사회 문제를 기술로 해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동엽 돌봄드림 부대표는 1월 8일 화상 인터뷰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복지관에서 근무하며 발달장애인에게 치료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됐다”며 “하지만 교사가 부족해 늘 대기인원이 많았고 적절한 시기에 치료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봄드림에서 개발한 조끼는 공기를 주입해 사람과 껴안은 듯한 느낌을 주어 발달장애인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따금 불안해 하는 발달장애 아동을 진정시키고 치료 효과를 높인다. 교육이 원활히 이뤄지는 덕분에 한 교사당 가르치는 아동 수도 늘릴 수 있다.
TOVDATA는 데이터 수집 시 필요한 약관 작성, 데이터 활용목적에 따른 처리 방법 안내 등 기업이 개인정보를 지키면서도 데이터를 활용하는 솔루션을 제공한다. 박효진 TOVDATA 대표는 1월 7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우연한 기회로 창업에 도전했다고 전했다. “박사과정 중에 유럽연합(EU)의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에 대처하는 기술적 방안을 연구하는 한-EU 국제 공동연구과제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아마존웹서비스(AWS)를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꼭 필요한 기술이라며 창업을 권유했어요.”
두 기업은 모두 KAIST의 대표 창업지원프로그램 ‘E*5 KAIST’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박 대표는 “E*5 KAIST는 미션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저와 같은 ‘창업알못’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진정한 ‘액기스’ 프로그램”이라며 “이 프로그램 덕분에 투자 유치도 받게 됐고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운영하는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 ‘팁스(TIPS)’ 선정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KAIST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창업 학생을 지원한다. 박사과정 중이었던 박 대표는 창업 휴학 제도를 신청해 2년간 창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됐고, 김지훈 돌봄드림 대표는 KAIST에서 창업 석사 과정을 밟았다.
창업 1~2년차에 불과하지만, 두 기업 대표들은 잊을 수 없는 순간도 간직하고 있었다. 김 대표는 “늘 잠을 못 자던 아이가 조끼를 입고 편안히 자게 됐다는 피드백은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며 “정식 제품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조끼라는 요청에 결국 제품을 드렸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저의 재직증명서를 제가 직접 만들었을 때”라며 활짝 웃었다.
돌볼드림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통합 솔루션 기업’, TOVDATA는 ‘누구나 아는 좋은 기업’을 꿈꾸고 있다. 두 기업에게 성공 이후에도 지금의 꿈을 잊지 않는 기업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KAIST인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다]
●과학기술정책 미래를 그리는
김소영·박범순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과학기술로 어떻게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는 집단을 꿈꿉니다.”
KAIST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1월 15일 과학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목표를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주어진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과학과 기술, 사회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2008년 정식 출범 당시 초대원장을 지낸 박범순 교수는 1월 13일 화상 인터뷰에서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우린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과학은 어떻게 뻗어 나가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들이 퍼져있었다”며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수업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임무는 최근 혐오 표현으로 논란이 된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 이슈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김 교수는 “몇 년 전 영국의 한 로봇연구소에서 개발자들과 AI의 편향성 문제에 관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며 “데이터 자체가 편향돼 있을 경우 개발자들은 완벽히 필터링할 수 없다고 토로했는데, 우리와 같은 정책, 윤리학자들은 그럼에도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기술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 차이가 이번 이루다 사태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재 한국4차산업혁명정책센터에서 이 문제에 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싱가포르국립대, 영국 과학시민단체 ‘센스어바웃사이언스(Sense about Science)와 함께 전문가와 시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AI 활용 가이드(AI Guide for Society)’를 만들고 있다. 김 교수는 “분야별로 AI를 활용할 때 생기는 문제를 점검하고 시민과 전문가, 정책결정자가 주의할 사항들을 분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교수는 2007년 KAIST에 교수로 부임했을 때부터 꾸준히 여성 과학기술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부임 당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출장을 갔다가 KAIST에 여학생이 현저히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여성 과학기술인 백서 발간, 여성 과학기술인을 위한 중장기정책 로드맵 구축, 여성과학기술인 초기 학계 경력 구축 및 개선 방안 연구, 여성 과학기술인력 비정규직 해법 모색 등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사회 속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학자로서 대학원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박 교수는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좋은 인재를 길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원 구성원들은 세월호 참사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에 참여하고,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대선 주자들의 과학기술정책을 비교하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8년에는 전 세계 최초로 인류세연구센터를 만들었다. ‘재난’ ‘참사’ ‘변화’ ‘위기’와 같이 인류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대학원이 앞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김 교수는 “지금까지 ‘살 만한’ 나라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면 앞으로는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며 “모두가 모두를 챙기는 사회를 꿈꾼다”고 답했다.
● 젊은 과학기술인의 목소리가 돼 준 박대인·정한별
1월 4일 화상으로 만난 박대인 비플렉스 이사, 정한별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 과정 연구원은 2014년부터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과정남)’을 운영하고 있다. 박 이사는 팟캐스트를 시쳇말로 ‘빡센 취미’라고 소개했다. 6년간 매주 콘텐츠를 올리는 꾸준함만 봐도 ‘빡센’이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과정남은 과학기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와 과학기술정책을 주로 다룬다. 정 연구원은 “기계공학을 전공했는데 과학이나 공학을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에 관심을 갖게 돼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 가게 됐고 팟캐스트까지 시작했다”고 말했다. 시작은 가벼웠지만, 두 사람의 꾸준함이 더해지면서 점점 대체할 수 없는 콘텐츠가 쌓여갔다. “얼마간은 ‘낯선 취미’라 새로웠고 그 다음엔 관성에 이끌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저희가 ‘인터뷰 아카이브’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각 에피소드에는 20XX년 어떤 분야의 과학자가 한 고민들, 직접 겪은 애로사항들, 뿌듯한 순간들이 담겨있지요. 미래의 과학기술인들을 위해,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될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박 이사).” 인터뷰이를 선정 할 때에도 해당 목표를 위해 성비나 분야 등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정 연구원은 “이미 유명해서 본인의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있는 분은 섭외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청취층 넓히기’ ‘음성 인터뷰 텍스트화’ 등 두 사람에겐 몇년 째 숙원사업처럼 남아 있는 과제들이 있다고 했지만 여력이 안 되는 상황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박 이사는 “우리는 본업도 있는 만큼 가볍게 생각해야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유튜브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닌데 마음만 먹은 상태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며 웃었다.
그들은 이번 기사와 어울리는 과정남 에피소드도 소개해줬다. 2015년 3월 27일 ‘우리들은 새싹들이다!’와 2018년 12월 21일 ‘어떤 헌내기와의 대화’다. 같은 KAIST 학생을 입학생 때 한 번, 졸업을 앞뒀을 때 한 번 인터뷰한 에피소드다. 정 연구원은 “KAIST 학생이 겪는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다”며 “꼭 2015년 입학생 시절 인터뷰를 먼저 듣길 권한다”고 말했다.
입학생과 졸업생 시절 비교라니, 한 호로 마치는 이번 특집 기사에선 결코 담지 못한 내용이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 아카이브가 왜 필요한지 벌써 알 것 같았다.
[KAIST인 과학으로 사회와 소통하다]
● 과학 소통의 길을 닦은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제가 하는 일은 대중화가 아닌 소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1월 7일 대전 자택에서 만난 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는 기자가 건넨 첫 질문인 ‘왜 과학 대중화 활동을 하는가’에 대해 “과학은 누구에게나 어렵지만,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게 내 목표는 아니다”라며 이렇게 답했다.
그는 “아주 재밌는 영화를 국내에서, 아니 세계에서 처음으로 본 사람은 아마 이 영화가 얼마나 재밌는지, 어떤 내용인지 공유하고 싶을 것”이라며 “제겐 과학이 아주 재밌는 영화인 셈이다. 특별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재밌어서 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KAIST 대학원 재직 시절 과학동아에 영화에 관한 기사를 쓰며 대중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이후 저서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열두 발자국’ 등을 냈고 다양한 방송과 강연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다.
최근엔 방송이나 강연 등에 이전만큼 참여하지 않고 있다. 정 교수는 “과학 소통을 하는 과학자들이 많아져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돼서 한동안 연구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2019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의 메커니즘을 밝힌 논문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출판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친한 지인에게 국내에서 네이처 논문과 베스트셀러 책을 동시에 출판한 과학자는 드물다고 자랑했다”며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연구와 소통 둘 다 놓치지 않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최종 꿈”이라고 말했다.
세계에서는 그 분야에 가장 앞선 과학자가 책을 출판하는 일이 흔하지만, 아직 국내에는 그런 과학자가 많지 않다.
정 교수는 “외국에서는 교수의 정년보장(테뉴어) 심사 등에 저서나 강연 활동을 일정 점수로 인정해주는데, 아직 한국은 그런 제도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앞서 정 교수는 과학이 아주 재밌는 영화라 비유했지만, 과학은 ‘어려운 학문’이라는 편견에 쉽게 흥미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는 “과학자들은 ‘그래핀이 어떤 구조인지, 인공지능은 어떤 코드로 만들어지는지, 양자 세계를 정의하는 수식은 무엇인지’ 같은 과학스러운 지식보다, ‘그래핀이 만들어지는 아주 작은 세계에는 그 세계만의 또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는 본질적인 지식을 전해야 한다”며 “새로운 규칙이 통용되는 세상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달리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 소통을 해오고, 앞으로도 꾸준히 하고 싶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KAIST는 어떻게 변했으면 좋겠는지 물었다. 정 교수는 “대학이 파격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사람들이 30대, 40대, 50대, 그 이상에서도 끊임없이 다양한 지식을 양질의 수업으로 배울 수 있도록 대학의 문을 활짝 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KAIST에 신설된 ‘융합인재학부’를 통해 올해부터 새로운 교육 실험을 시작할 계획이다. 희망에만 머물지 않고자 도전한 새 시도를, 다시 50년 뒤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