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자들을 괴롭히는 시차증과 함께 정력강화와 노화방지에도 효험이 있다고 선전되는 멜라토닌. 그러나 현재까지 불면증 치료 외에는 입증된 사례가 많지 않다.
지난 수년 간 미국과 유럽에서 멜라토닌이 시차증을 줄이고 수면을 촉진시킨다는 광고가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다. 이에 발맞춰 인공적으로 합성된 멜라토닌 약물이 의사의 처방 없이 구할 수 있는 시차증 치료제로 등장했다. 게다가 멜라토닌이 노화방지와 암 발생 억제에 효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보도되자 이 호르몬제는 건강보조식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멜라토닌이란 과연 무엇인가. 또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밝혀진 효과는 무엇인가.
비행기를 타고 여러 시간대를 가로질러 급속하게 이동하면 자야 될 시간인데 밖은 훤한 대낮인 경우를 흔히 겪는다. 그러면 몸은 피곤한데 잠은 안오는 이상한 상태를 경험한다. 이때 소화불량, 두통, 현기증 등 여러 가지 불쾌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 집중력이나 판단력, 단기 기억력도 떨어진다. 이처럼 비행기 여행 결과 발생하는 신체나 정신 기능의 변화를 시차증(jet lag symptoms)이라 부른다.
시차 치료제로 등장
시차증이 생기는 까닭은 수면-각성 주기(sleep-wake cycle)를 비롯한 신체의 생활 리듬이 현지의 밤-낮 주기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성인의 경우 시차증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1시간대 당 하루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7시간대를 여행한 후 현지 적응을 하려면 약 1주일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얼마 전까지 시차증을 줄이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현지에 도착한 날 강한 햇빛을 5시간 가량 쬐는 방법과 자기 전에 수면진정제를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햇빛을 그렇게 오랫동안 쬘 수 있는 여유가 없을 뿐더러 수면진정제의 각종 부작용 때문에 이 방법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새로운 시차증 치료책으로 멜라토닌(melatonin)이라는 약물(정확하게는 건강보조식품)이 미국과 유럽 시장에 등장했다. 여행 목적지에 도착한 후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3-5mg의 멜라토닌을 복용하면 3-4일 후에 시차증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1986년 영국 서레이 대학의 애랜트 박사가 처음 제시했는데, 간편하고 약물성 부작용이 없다는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고 있다.
멜라토닌은 원래 인공합성물이 아니라 뇌의 송과선(pineal gland)에서 세로토닌이라는 전구물질로부터 만들어지는 호르몬이다(그림). 멜라토닌은 밤에 잘 분비되며, 낮에는 빛 때문에 분비가 중단된다. 따라서 낮의 혈중 농도는 밤의 10분의 1 정도다.
조류나 파충류의 경우 송과선은 수면-각성 리듬과 같은 생활 리듬을 만들어내는 생체시계로 작용한다. 그러나 사람을 포함한 포유류에서 송과선이 그런 기능을 하는지는 명확치 않다. 포유류의 생체시계는 시상하부의 시교차상핵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곳을 파괴하면 수많은 생활 리듬이 사라진다. 그러나 송과선을 파괴한다고 생활 리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어떤 과학자들은 송과선이 편도선이나 맹장 같은 퇴화기관이라고 설명했다.
노인 불면증 없앤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송과선이 포유류의 생활 리듬을 조절할지도 모른다는 여러 가지 실험적 증거를 제시했다. 먼저 시교차상핵에 수많은 멜라토닌 수용체(receptor)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적절한 시각(주로 밤)에 투여된 멜라토닌이 시교차상핵의 대사율과 세포의 전기활동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송과선이 멜라토닌을 분비해 ‘간접적으로’ 생활 리듬을 조절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인공적으로 합성된 멜라토닌 약물이 ‘편하게’ 잠드는 효과, 즉 더 일찍, 더 깊이, 그리고 더 많이 잠들도록 한다는 점이 학계에 보고됐다. 수면 장애로 고생하는 젊은층이나 맹인들에게 효과가 있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진 것이다.
또 노인층이 겪는 전형적인 수면장애, 즉 잠을 청하기 어렵고, 자주 잠에서 깨어나며, 낮에 자주 조는 현상을 치료하는 효과가 입증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나이가 들면 혈액 내 멜라토닌 양이 현격히 떨어진다(사람은 약 45세). 최근 연구에 따르면 수면 장애로 고생하는 노인들의 경우 혈액 내 멜라토닌의 양이 적을수록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 또 멜라토닌 약물이 노인들의 불면증 치료에 도움을 주고 나이 먹은 동물들의 위축된 생활 리듬을 향상시킨다는 사실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멜라토닌이 성(性)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문제도 계속 제기돼 왔다. 1889년 송과선이 사람의 사춘기를 시작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가설이 최초로 제시됐다.
송과선암을 앓는 4살의 사내아이가 신체적으로 사춘기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송과선의 기능이 망가졌다는 것은 멜라토닌의 분비가 억제됐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시 과학자들은 멜라토닌이 사춘기로 성장하는 과정을 막는 물질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춘기가 되면 멜라토닌의 양이 줄어든다는 점이 밝혀지자 이런 생각이 더욱 확산됐다.
이후 과학자들은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성(性) 성숙기에 접어든 동물에서 멜라토닌의 생산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도 사춘기와 멜라토닌 분비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됐지만, 아직 불확실한 점이 많다.
정력제 효과 근거 없어
한편 멜라토닌이 일부 동물의 생식 기능을 증가시킨다는 점은 여러 논문을 통해 보고돼 왔다. 특히 포유류 중 양과 같이 ‘계절 번식’ 을 하는 경우 가을과 겨울에 이르면 멜라토닌이 많이 분비돼 성욕이나 성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된다는 사실이 잘 규명돼 있다. 양의 임신기간은 약 6개월이므로, 새끼는 풀이 풍부하고 날씨도 좋은 계절인 봄이나 여름에 태어난다. 나이가 들면서 고환이나 난소가 위축되거나 성적 활동이 줄어든 동물에게 멜라토닌 약물을 투여해 회복됐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 멜라토닌이 특정한 계절에 성욕을 높인다거나 성호르몬 분비를 증가시킨다는 보고는 아직 없는 상태다. 이는 사람에게 생식 계절이 따로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멜라토닌 약물이 인간의 성적 능력을 강화하시키는 ‘정력제’ 효능이 있다는 임상 연구도 아직 보고된 것이 없다.
멜라토닌 약물은 오히려 사람의 생식 기능을 억제할지 모른다. 최근 네덜란드의 일부 학자들은 멜라토닌 약물을 피임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천여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3년 이상 멜라토닌 약물을 복용시킨 결과 피임 효과가 아주 훌륭하며 성욕 감퇴와 같은 부작용이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자세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방법을 처음 시도한 코헨 박사는 멜라토닌을 먹는 피임약으로 상품화하기 위해 미국의 식품의약국(FDA)에 승인을 받으려고 노력중이다.
멜라토닌이 몸에 해로운 산소 래디칼을 제거시켜 노화와 발암을 억제시킨다는 가설도 제기됐다. 산소는 보통 몸에 섭취된 영양분을 태워 에너지를 만든 뒤 환원돼 화학적으로 안정된 물이 된다. 이때 산소의 일부는 완전히 환원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래디칼)로 남아 몸 속의 다른 조직과 반응, 그 부위를 손상시킨다. 이 과정은 노화나 암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동물을 대상으로 한 몇가지 연구들은 멜라토닌이 암 발생을 억제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1993년 레이터 박사는 노화와 암에 관한 학회에서 멜라토닌이 래디칼과 반응해 그 손상 작용을 차단시킴으로써 강력한 발암 효과를 나타낸다고 보고했다. 1995년 미국 신경과학회에서도 멜라토닌이 래디칼을 없앨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여러 편의 주제가 발표됐다.
그러나 생체 내 멜라토닌이 과연 래디칼을 없애는 장치인지는 의문이다. 또 멜라토닌이 사람에게도 항암 효과나 생명연장효과가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임산부 복용 피해야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동물 실험을 통해 멜라토닌의 새로운 역할이 제안되고 있다. 한 예로 혈관 수축을 조절해 뇌혈류와 체온을 통제한다는 점이 보고됐다. 또 뇌의 해마를 비롯한 여러 중추와 신체 부위에서 멜라토닌 수용체가 발견되고 있다. 아직 새롭게 밝혀질 기능이 남아있음을 암시하는 사례들이다.
멜라토닌의 효능 중 대다수는 아직 임상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은 실정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복용할 때 건강에 해로울지 여부가 충분히 평가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미국 의학계는 멜라토닌을 상습적으로 복용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특히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는 사람이나 임산부는 복용을 삼가라고 경고한다. 멜라토닌이 사람의 정신을 지나치게 가라앉히거나 졸리게 하고, 성호르몬 분비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운전할 때는 당연히 복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 식품의약국은 멜라토닌의 유통을 막지 않고 있다. 아직 사람이나 동물에서 다량의 멜라토닌을 투여해도 특별한 부작용이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을 지배하는 송과선 : 멜라토닌은 '색깔을 변화시킨다' 는 뜻
사람 송과선의 크기는 콩알만하다. 사람 뇌에 송과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기원전 3세기에 확인됐다. 헤로필루스는 송과선이 뇌실을 통해 흐르는 생각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또 데카르트는 송과선을 '영혼의 자리'라고 주장해 오랫동안 과학자들의 생각을 지배했다.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멜라토닌의 기능은 1917년 한 실험에 의해 처음 제시됐다. 소의 송과선에서 추출한 물질을 올챙이에게 발라주자 피부색이 엷게 변했다. 이후 1950년대말 송과선 추출물 중 어느 한 종류의 물질이 개구리의 피부색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때 멜라토닌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이는 '색깔 변화를 유도한다'는 뜻의 그리스어로, '검은색'을 뜻하는 멜라스(melas)와 '일을 한다'는 뜻의 토소스(tosos)의 합성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