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열심히 읽었던 과학동아에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처음에는 긴장도 많이 되고 쑥스럽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과학동아에 다시 글을 쓰려면 연구자로서 대성해야 하겠지만, 다시 과학동아에 등장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일본 도쿄대에는 한 문제만 맞혀도 A+를 받는 어려운 시험과목이 꽤 있다. 그러나 ‘시험대책위원(シケタイ·시케타이)’과 함께라면 문제없다. 시케타이는 어려운 시험을 낙오자 없이 다함께 극복하기 위해 결성된 그룹이다.
시케타이는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이 낙제점을 받지 않도록 시험공부를 도와주는 굉장히 훌륭한 친구들이다. 이들은 먼저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수업을 들었던 선배들로부터 과거 시험 문제를 구해온다. 이를 통해 모범답안을 만들고, 수업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한 노트 ‘시험프린트(シケプリ·시케푸리)’를 작성해 다른 학생들에게 공유한다. 나는 1학년 때부터 시케타이 친구들에게 엄청난 신세를 지고 있다.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시케타이 활동을 굳이 왜 할까?’라는 의문이 있었다. 신입생이라면 더욱 본인 공부하기도 바쁜데, 잠재적 경쟁자인 다른 학생을 위해 추가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이해되기 시작했다. 도쿄대는 일본 전국에서 날고 기는 수재들이 모인 학교인 만큼 시험에는 도가 터서 시험공부 자체를 즐기는 독특한 친구들이 많다. 실제로 시케타이 희망자도 꽤 많다.
시케타이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 중요한 한 가지는 과거 시험 문제를 수집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도쿄대 진학을 많이 하는 명문 고등학교 출신들이 시케타이를 맡기도 한다. 고등학교 동문 선배들에게 과거 시험 문제를 받기 위해서다.
유학생 중에서도 영어, 수학 등에 뛰어난 학생들이 관련 수업에서 시케타이를 맡아 그 역할을 훌륭히 완수한 사례도 간간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1학년 때는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고, 원래부터 수학과 영어에는 자신 있어 ‘영어로 진행하는 수학 수업의 시케타이는 나도 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때 공유받은 시케푸리를 보자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나도 노트 필기는 꽤 잘하는 편이고, 요약 노트도 못 만드는 편은 아닌데, 당시 공유받은 시케푸리는 차원이 달랐다. 웬만한 입시학원 ‘일타강사’의 강의 노트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걸 보고 받은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수업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강의를 시험 일주일 전 그 과목에 대한 시케푸리를 보고 비로소 ‘이런 명강의였구나!’ 깨달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시케타이 문화는 도쿄대만의 전통인데 역사가 꽤 깊다. 나이 지긋한 교수 중에 “내가 학생일 땐 말이야~” 하면서 시케타이 경험을 이야기하는 분도 있고, 특정 문제집을 언급하며 “이 문제집을 굳이 살 필요는 없지만, 시케타이들은 꼭 사서 풀어보세요”라고 시케타이를 의식한 발언을 하는 분도 있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시케타이의 역사가 수십 년은 됐을 거라고 본다.
도쿄대는 1, 2학년 때 기초과목과 교양수업만 듣고, 3학년 때 학과가 정해진다. 3학년 때부터는 학과에 따라 시케타이가 없는 곳도 있다.
다행히 내가 속한 전자과는 시케타이가 있다. 심지어 2000년대 초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놨고, 이는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서 과거 시험 문제와 당시 시케타이들이 작성한 모범답안, 시케푸리 등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과거 시케푸리는 내용이 알찬 것은 물론이고, 굉장히 재밌다. 전자과에는 대대로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가 많았는지, 당시 유행하던 애니메이션을 패러디한 요약 노트를 흔히 볼 수 있다. 요약 노트 맺음 글에 “이번 시험 기간은 ‘코미케(コミケ·1년에 2번 열리는 세계 최대 만화축제)’랑 겹쳐서 힘들다”는 등의 재밌는 조각 글이 많아 시험 기간이 아닐 때도 찾아 읽어 보게 된다.
이렇게 시험공부를 쉽고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처럼 시험공부가 하기 싫은 건 마찬가지다. 공부가 유난히 힘들면 ‘어차피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외운 내용은 시험이 끝나면 다 까먹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외우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마치 체에 걸러지듯 조금씩 잊지 않는 내용이 생긴다. 예전에 한 교수님은 “이렇게 잊지 않은 내용이 쌓이며 지식이 되고, 그 과정이 공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그래도 하기 싫은 마음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김없이 기말고사의 압박이 턱밑까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최근 진행 중인 연구가 있어서 빨리 시험 기간이 지나가고 오롯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