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식품나노공학연구실에서 클로렐라를 원료로 안상수체의 과학동아 쿠키를 출력하고 있다.
검은 코뿔소 스테이크와 브로콜리 그리고 감자가 영국의 유명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의 레시피로 출력됩니다.
한 끼의 근사한 식사를 위해 스테이크를 굽고 감자를 오븐에 넣는 일은 없습니다. 3차원(3D) 프린터 버튼만 누르면 되죠. 아마존의 OTT 서비스인 ‘프라임 비디오’의 SF드라마 ‘업로드’가 그리는 2033년의 한 주방입니다. 푸드 프린팅은
3D 프린터로 음식을 인쇄하는 기술입니다. 식품 고유의 식감과 맛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 더 풍부한 영양소를 담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10년이 지나면 정말 우리집 주방에 가스레인지나 오븐 대신 3D 프린터가 자리잡고 있을까요?
4월 24일, 이화여대 식품나노공학연구실에 들어서자 전자레인지를 세 대 정도 쌓은 크기의 3차원(3D) 프린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프린터 노즐에서는 노란 재료가 뽑혀 나오고 있었습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얼핏 쿠키 반죽처럼 보였습니다. 노란 재료는 한 층 한 층 쌓여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과.학.동.아. 1986년 창간 이후 38년 동안 과학동아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안상수체 ‘과학동아 쿠키’였습니다.
“한 번 먹어봐도 될까요?” 연구실을 이끄는 이진규 식품생명공학과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교수는 웃으며 “식품의 재료가 녹조류 클로렐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먹을 수 있지만, 특정한 맛을 첨가하지 않고 출력한 식품이라 아무 맛도 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클로렐라는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체내 항산화 작용에 도움을 주는 ‘건강한’ 식재료라고 알려져 있어 식품 보조제로 많이 쓰입니다. 그런데 그 맛은 악평이 자자합니다. 실제로 이날 만든 과학동아 쿠키도 눅눅하고 질겅질겅한 것이, 고무를 씹는 느낌이 났습니다.
퓌레, 무스케이크, 피자반죽류 음식에 특화돼
노즐을 통해 나오는 재료를 한 층 한 층 쌓아 만드는 방식은 3D 프린터의 가장 대중적인 출력 방식인 용융 적층 모델링(FDM・fused deposition modeling) 기법입니다. 푸드 프린팅 분야에서는 퓌레나 반죽 등 점성이 있는 원료를 출력할 때 FDM 방식을 많이 사용합니다. 반죽류를 출력해 사탕이나 초콜릿, 무스케이크와 같은 과자류나 피자, 파스타 같은 가공식품류을 만들 수 있습니다.
FDM 방식이 지금처럼 널리 쓰이게 된 데는 에이드리언 보이어 당시 영국 바스대 기계공학과 교수 공이 컸습니다. 보이어 교수는 3D 프린터의 설계도와 조작 기술을 누구나 접근해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렙랩(RepRap) 프로젝트를 주도했습니다. 특히 2009년 FDM 기술의 특허가 만료되자, 3D 프린터의 설계도와 조작 기술을 오픈 소스로 공개했습니다. 렙랩 프로젝트는 4만 달러(약 5340만 원)나 하던 3D 프린터 가격을 3D 프린터기 제작 실비 수준인 400달러(약 53만 원)로 낮췄습니다.
저렴해진 3D 프린터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재료를 사용해 3차원 출력을 시도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초창기 3D 프린터의 주요 재료는 플라스틱이었지만 이후 고무, 콘트리트, 금속으로 다양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추세에서 3D 프린터로 음식을 출력하는 푸드 프린팅도 시작됐습니다.
2006년 호드 립슨 당시 미국 코넬대 공대 교수팀은 3D 프린터에 초콜릿과 치즈를 원료로 넣어 과자를 출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립슨 교수는 세포와 생체 물질을 활용한 ‘바이오 잉크’를 원료로 생체 조직 및 기관을 만드는 3D 바이오 프린팅을 연구하다가 푸드 프린팅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는 일반 레스토랑이나 다양한 체험 학습장에서도 푸드 프린팅 식품들을 맛 볼 수 있습니다.
3D 프린터로 재현한 ‘마블링’ 그 맛은?
클로렐라 쿠키를 먹고 표정이 어두워진 기자를 이 교수는 연구실 안쪽, 더 깊숙이 자리한 두 번째 3D 프린터로 안내했습니다. 첫 번째 3D 프린터보다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1.5배 더 큰 3D 프린터에는 실린더와 노즐이 두 개씩 부착돼 있었습니다. 한 쪽에는 빨간 원료가 다른 쪽에는 하얀 원료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각각 살코기와 지방”이라 설명했습니다. 대체육을 연구하는 3D 프린터였습니다.
“한 번 드셔 보시죠.” 이 교수는 연구실에서 개발한 한 입 크기의 정육면체 대체육 덩어리를 버터와 함께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렸습니다. 기자의 인생 최초 배양육 스테이크 시식이었습니다. 향을 입히지 않아 고기 맛은 나지 않았지만, 입 안에 씹히는 식감이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와 매우 비슷했습니다. 육즙을 가두기 위해 스테이크 겉면을 태우듯 구워낸 바로 그 식감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대체육을 3D 프린터로 만드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식감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기후변화가 심각해지고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육류를 대신할 대체육 연구는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푸드 프린팅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동물성 대체육이라 불리는 배양육은 푸드 프린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배양육은 동물 세포로 만든 단백질을 원료로 사용합니다. 과거 식품을 재가공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푸드 프린팅이 원료의 범위를 넓힌 겁니다.
고기의 식감은 지방의 분포, 즉 ‘마블링’을 구현해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동물 세포는 성장하며 분화하는데, 일부는 근육세포(근섬유)로 일부는 지방세포로 자랍니다. 우리는 근섬유와 지방세포가 적절하게 배치된 조직을 씹을 때 맛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일반 배양육으로는 이런 마블링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이 교수는 “동물 세포를 키워 원하는 단백질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동물이 성체가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조직을 구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라 설명했습니다. 배양육으로는 씹을 때 탄력을 주는 근섬유, 혀끝에서 녹는 지방층 대신 세포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퍽퍽한 햄버거 패티와 비슷한 고기가 만들어진다는 거죠. 반면 두 개의 노즐이 달린 3D 프린터는 단백질과 지방층을 각각 압출해 둘을 균형 있게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고기 스테이크와 훨씬 비슷한 식감의 대체육을 만들 수 있습니다.
푸드 프린팅 연구자들이 식감 구현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식감에 따라 느끼는 만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2020년 스테파니 뮬러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팀은 사람들이 많이 씹을 수록 음식을 적게 먹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3D 프린터로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연구팀은 다양한 구조와 밀도의 쿠키를 3D 프린터로 출력해 실험 참가자들에게 제공했고, 동일한 열량임에도 쿠키 밀도를 줄여 전체적인 크기를 키울수록 포만감을 높인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doi: 10.1145/3313831.3376421
3D 프린터는 동물세포가 근섬유와 지방으로 분화되는 ‘집’을 짓는 데도 사용됩니다. 효율적인 배양육 연구를 위해선 동물세포는 붙어 자랄 수 있는 구조물인 ‘지지체’가 필수적입니다. 이 교수팀은 3D 프린터로 식품소재로 만든 지지체를 출력하는 기술을 홍익대와 공동으로 개발했습니다. 식품소재로 만든 3차원 지지체는 기존 지지체보다 동물세포가 효율적으로 분화하는 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폐플라스틱 원료로 닭가슴살 만든다?
오늘날 3D 프린터가 출력할 수 있는 스테이크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4월 24일 이스라엘 바이오기업 ‘스테이크홀더 푸드’는 세포를 배양해 만든 능성어 필레를 개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필레는 능성어의 근육과 지방세포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배양어’가 개발된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참치, 새우, 연어 등 주요 어종을 출력해 이를 판매하려는 연구가 전세계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배양육 및 배양어 출력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급진적인 연구도 있습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분사한 3D 프린팅 스타트업, ‘비헥스’는 올해 4월, 폐플라스틱을 인공 식품으로 만드는 ‘바이오 반응기’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특정 박테리아는 플라스틱을 먹고 바이오매스를 생성하는데, 이 바이오매스에 포함된 단백질을 확보해 푸드 프린터로 닭가슴살이나 스테이크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입니다.
비헥스는 3~4년 뒤에 바이오 반응기와 푸드 프린터를 국제우주정거장(ISS)과 아르테미스 계획의 일부인 달 유인기지에 설치할 계획입니다. 2012년 NASA가 푸드 프린팅으로 미래의 우주 식량을 개발하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연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식재료를 가루로 만든 뒤 3D 프린터로 출력하는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식재료를 가루로 보관하면 최장 30년까지도 상하지 않아 수십 년이 넘는 긴 우주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베이컨’ , 식품 패러다임 바뀔까
“앞으로 유기농 식품 대 건강을 위한 가공식품의 경쟁이 펼쳐질 것이다.” 3D 푸드 프린팅 기술이 개발되던 초창기, 초콜릿으로 과자를 출력했던 립슨 교수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하며 최근 이 같이 선언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 지금은 가장 좋은 식품으로 여겨지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는 얘깁니다. 교수팀은 푸드 프린터가 영양분과 열량을 보정한 식품을 출력한다면 건강한 식습관과 지속 가능한 환경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doi: 10.1038/s41538-023-00182-6
SF드라마 ‘업로드’가 그리는 2033년처럼 언젠가는 모두의 주방에 푸드 프린터가 설치될 날이 올까요? 기자의 질문에 이진규 교수는 “꼭 그럴 필요는 없다”며 의외의 대답을 내놨습니다. 그는 “푸드 프린팅 기술이 그리는 미래는, 주방에서의 노동을 대신하기보다 식품에 대한 전환을 끌어내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어 이 교수는 먹음직스러운 베이컨을 예로 들었습니다.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구운 베이컨은 천상의 기름맛을 선물하지만, 몸속에 들어가 동맥경화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 교수는 “3D 프린터를 이용하면 먹음직스럽지만, 포화지방은 없는 베이컨을 만들 수도 있다”며 “이처럼 필요한 재료로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한다면, 음식의 기존 패러다임이 전복될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바뀔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물론 푸드 프린팅 기술이 넘어야 하는 산은 많습니다. 아직은 연구하는 곳이 많지 않고, 기술도 정밀한 조리가 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출력할 수 있는 재료가 한정적이라는 한계도 있죠. 하지만 과자에서 배양육으로, 지구에서 우주로 푸드 프린팅 기술의 저변은 넓어지고 있습니다. 맛있지만 건강한 베이컨을 구워 먹는 아침이 언제 올지 기대됩니다.
용어 설명
퓌레 : 야채나 고기를 갈아서 체로 걸러 걸쭉하게 만든 음식. 주로 요리의 재료로 쓴다.
필레 : 고기나 생선의 뼈 없는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