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술읽혀요 | 나의 일본 유학 일기
일본인들은 칭찬에 후한 편이다. 외국인이 일본어 인사말인 ‘오하이요’ ‘곤니치와’ 정도만 말해도 대개 ‘일본어를 참 잘한다’며 칭찬한다. 물론 일본인들이 이름을 보고 나서야 외국인인 줄 알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향상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한국 유학생들 중에는 이렇게 일본인들이 국적을 헷갈릴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솔직히 나도 유학 온 지 2년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는 처음 보는 일본인들이 내게 혼슈 동북부에 위치한 도호쿠 출신이냐고 묻곤 했다. ‘도호쿠 출신’이라고 한 이유는 여전히 나의 억양이 좀 어색해서다.
애니메이션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인 유학생들이 대개 그렇듯 나는 일본어 듣기와 말하기만큼은 처음부터 문제없었다. 일본의 문자인 ‘히라가나’를 배우기도 전에 원어민들과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했을 정도다. 유학 준비 당시 찾아갔던 일본어 학원에서도 일본어 구사가 자연스럽다면서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어를 애니메이션으로 배운지라, 한 번씩 애니메이션에 자주 나오는 일본 여고생 말투가 나와서 항상 긴장해야 했다. 한 번은 문장의 끝에 붙일 수 있는 표현(한국어로 치면 ‘입니다’나 ‘습니다’ 등)을 배우는 시간에 선생님께 일본인과 대화할 때 어미가 ‘냐(にゃ)’로 끝나는 이른바 ‘냥체’를 써도 되냐고 질문했다. 그때 선생님은 그런 말은 도쿄 아키하바라에 있는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식당에서나 쓰는 거라며 웃으셨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어를 배울 때는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뉴스가 좋고, 애니메이션을 볼 거면 표준어가 많이 나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등을 보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일본어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여러 사람의 말투를 익혀두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실제로 생활하다 보면 독특한 말투로 의사소통하는 경우가 꽤 있어 표준어만 알아들으면 대화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동아리 활동도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는 도쿄대 테니스부에서 1년 정도 활동을 했다. 테니스부는 코미디 애니메이션 ‘그랑블루’의 스쿠버다이빙부만큼 유쾌한 분위기였다.
동아리원들은 다들 입이 거칠고 말이 빨랐다. 처음에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리를 그만둘 때쯤에는 학교 선생님이 ‘그런 일본어는 도대체 어디서 배웠냐’고 물을 정도로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는 수다쟁이가 돼 있었다.
한 번은 혼자 후지산 근방으로 배낭여행을 갔는데, 돌아오는 신칸센(일본 고속철도)에서 동아리에서 배운 실력을 살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랑 수다를 떤 적이 있다. 처음 본 아저씨였지만 기차에서 내내 수다를 떨다 보니 금세 친해졌다. 덕분에 아저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초대를 받아 공짜로 밥도 얻어먹었다.
이렇게 회화는 날고 기었지만 그런 나에게도 큰 벽은 있었다. 한자였다. 일본어는 크게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등 3가지 문자를 섞어 사용한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각각 46종류로, 2주 정도 열심히 공부하면 금방 외워진다.
하지만 한자는 자주 안 쓰는 것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아 전부 외우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2136자를 ‘상용한자’로 정해두고 일본어능력시험(JLPT) 등에서 테스트한다. 또 일본어에 쓰이는 한자는 같은 글자라도 그 뜻과 읽는 방법이 여러 개라 까다롭다. 익숙해지면 자주 쓰이는 용법만 기억하면 되지만 나는 아직 헷갈려서 친구들에게 종종 지적을 당한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은 JLPT 최고 등급인 1급을 딸 때 외에는 이렇게 많은 한자를 읽고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글자의 음을 입력하면 한자로 자동변환해주는 기능이 잘 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인 중에서도 상용한자를 전부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최근 입시문제에 ‘이 대학의 이름을 한자로 쓰시오’가 나왔을까(참고로 정답은 ‘慶應義塾大学’다).
나도 평소에는 한자를 쓸 일이 많지 않지만 학교 시험 답안은 전부 한자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늘 전공 공부에 한자 공부까지 병행한다. 답을 쓸 때 도저히 한자가 생각이 안 나면 히라가나로 음만 적거나 아예 그 문장만 영어로 적기도 했다. 성적을 보니 교수님들이 대체로 너그럽게 봐주신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일본어가 서툰 나를 성의껏 교정해주고 격려해준 일본어 선생님과 테니스부 동아리 친구들 덕분에 일본에서도 언어의 장벽을 신경 쓰지 않고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말이 어눌해 곤란을 겪으면 위축돼 말을 더 안 하게 되고, 회화도 잘 안 는다. 나는 그럴 때 오히려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참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