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술읽혀요 | 나는 과학동아 키즈
치과의사, 돌연 변호사가 되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부모님이 사준 과학동아에서 실험복을 입은 연구자의 모습을 봤다. 당장 시내에 있는 실험도구 가게에서 책에서 본 물품을 사면서 과학자가 되는 미래를 꿈꿨다. 그때는 실험실에서 흰색 실험복을 입고 보안경을 낀 채 각종 실험을 진행하는 과학자의 모습이 누구보다 멋져 보였다.
과학자의 꿈을 간직한 채 1996년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공주 한일고에 입학했다. 당시 한일고에는 ‘우리 사회의 큰 일꾼이 돼야 한다’는 특유의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경찰대에 진학해 경찰 간부가 되는 미래를 잠시 꿈꾼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경찰대 서류심사에서 탈락했지만. 덕분에 과학, 특히 생물학에도 큰 흥미가 있었던 나는 2000년 연세대 치대에 입학했다.
치대 교과 과정에선 유전학과 생물학, 생화학, 유기화학 등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약리학, 면역학, 병리학과 같은 기초의학을 두루 배웠다. 하지만 이런 지식이 내 인생에서 언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는 당시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공부는 재밌었으나, 진료실에서 환자만 치료하는 치과의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지 5년 뒤인 2011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서 법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인지 의료법이나 과학, 공학 등과 관련한 분쟁 사건에 더 많은 관심이 갔다. 특히 특허 관련 판례를 공부할 때 특허나 기술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면 과학동아를 찾아보곤 했다.
201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당시 국내 최대 제약사인 동아제약(현재 동아쏘시오홀딩스)에 입사했다. 그리고 이어서 의료기기 회사인 메가젠임플란트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의료·제약·바이오 산업에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는 시간이었다.
의료·바이오 전문 변호사를 택한 이유
2017년에 출간된 책 ‘호모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미래사회로 갈수록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더욱 강화되고, 이러한 미래사회의 혁신적 산업혁명은 인간중심으로 구축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 중심의 혁신적 산업혁명이 결국은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기 위한 기술’로 진행될 것이라 부연한다.
의료·바이오 분야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길의 초입에 섰을 때 나는 저자의 예측이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고 느꼈다. 그의 말처럼 오늘날의 혁신기술은 대부분 의료와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바이오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세포치료제, 유전자치료제, 조직공학제제, 첨단바이오융복합제제와 같은 첨단바이오의약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진보하는 속도에 비해 기술의 도입을 돕거나 최소한의 안전성을 담보하는 관련 법률과 제도의 발전은 더뎠다. 때로는 법이 기술의 진보를 막는 장벽이 되기도 했다. 첨단 기술과 기존 규제 사이에 괴리가 커지는 경우 산업의 혁신을 저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시장에 도입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더 확고해졌다. 현재 나는 유전자치료제, 줄기세포치료제, 디지털 테라퓨틱스, 정밀의료 등을 도입하기 위한 법률자문을 수행하고, 그밖에 국내 바이오 벤처 회사와 제약사가 가진 바이오‧의약 기술을 특허화하거나 외국 기업에 기술 이전하는 계약을 자문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미궁에 빠진 사건을 푸는 융합적 사고의 힘
나는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로 의료 관련 사건사고에도 관심이 많다. 허위성분 의혹을 일으켜 화제가 된 코오롱생명과학의 골관절염 세포유전자 치료제 ‘인보사’ 사건, ‘역형성 대세포 림프종’이라는 희귀암을 유발한다고 해서 논란이 된 미국 제약회사 엘러간의 유방 보형물 사건에서 해당 제품으로 피해를 본 의료 소비자를 대리해 소송을 진행하는 중이다.
의료소송은 의학과 법학이 심도 있게 융합되는 분야다. 우선 사건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의학 지식이 필수적이다. 여기에 증거를 수집하고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은 마치 미국 드라마 ‘하우스’에서 주인공인 의사 그레고리 하우스가 질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를 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진료기록을 하나씩 꼼꼼하게 분석해서 문제의 원인을 추적한다. 의료사건을 진행하다 보면 내가 마치 셜록 홈즈와 같은 탐정이 돼 미궁에 빠진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의학, 생명공학, 과학이 어우러진 의료·바이오 분야의 전문 변호사로서, 미래에 내가 선택할 결정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어릴 적 과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과학자 같은 사회 운동가’ ‘의사 같은 변호사’로서 융합과학자의 길을 열심히 걷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