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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키즈] 네이처, 사이언스 표지도 제 손에서 탄생했어요

◇술술 읽혀요

 

“무슨 일 하세요?”


나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고, 구구절절 설명을 해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답변 대신 직접 표지 작업을 한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를 건네곤 한다.


“이런 그림 만드는 사람입니다.”

 

국제학술지 표지 만드는 디자이너

 


굳이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 직업은 ‘과학 분야 시각디자이너’, 영어로는 ‘Scientific Graphic Designer’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단어조차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가까운 친구들, 가족들도 나의 직업을 이해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연구자들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연구를 하고 있다. 실험을 거쳐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연구자는 그 내용을 논문으로 작성해 세상에 발표한다. 복잡한 실험과정과 증명된 내용들을 논리적인 문장으로 서술하고, 연구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각종 그래프와 기호, 그림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때 만들어진 그림은 연구 내용을 표현하는 자료로 논문과 함께 국제학술지에 실리는데, 그중 시각적으로 세련되면서 예술적으로 디자인된 그림은 학술지의 표지로 선정된다.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는 디자이너다.


멋진 표지 그림을 만들려면 수년간의 노력이 담긴 연구 결과를 정확하면서도 함축적으로 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고 어려운 부분이다. 연구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회의를 한다.


물론 시각적 아름다움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림’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모호한 디자인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학술지의 특성상 다른 저작물을 모방하거나 재가공하는 것에 민감해 다른 작업보다 제약이 많다.


간혹 비유나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기법은 그림을 친근하고 재치 있게 보이도록 하지만 자칫하면 정작 중요한 연구 내용이 묻힐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 디자이너의 창작품으로는 가치를 인정받아도, 논문 그림이라는 본래 목적과 멀어질 수 있다. 표지 작업은 과학과 예술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인 셈이다.

 

 

온종일 그림만 그리던 아이


나에게 ‘과학자’는 대부분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지금은 그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의 어린 시절 성적은 과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과 동물을 관찰하는 것 등 다른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교과서의 빈 공간, 노트 뒷장, 심지어 시험지 모퉁이까지 늘 무언가를 쉬지 않고 그리는 학생이었다. 머릿속에는 항상 궁금한 것들이 가득했지만 교과서에는 그런 내용들이 적혀 있지 않았다. 시험기간 중에도 문제를 푸는 일보다 등굣길에서 우연히 봤던 이름 모를 곤충의 요상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는 일에 더 집중했으니 성적은 늘 바닥이었다.


창밖을 보면서 ‘우주는 검은데 왜 하늘은 파란색일까’, 책장을 넘기면서도 ‘종이를 접었다 펴면 왜 접힌 자국이 사라지지 않을까’, 글씨를 쓰다가도 ‘볼펜 글씨는 왜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을까’ 따위의 물음으로 가득했다. 궁금증이 한번 생기면 그것을 끄적이며 하루 종일 고민하곤 했다. 포털사이트나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었다. 누구도 속시원히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끼리끼리 통한다는 말이 있듯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만화를 기막히게 잘 그리는 친구를 만났다.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공유하며 금세 ‘절친’이 됐다. 학교가 끝나면 그 친구 집으로 매일같이 놀러가 원 없이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친구는 매일 다양한 만화책을 펼쳐놓고 따라 그리는 것에 열중했고 만화를 그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던 나는 책장을 뒤적이다 한쪽에 수북이 쌓인 ‘과학동아’를 발견했다. 학교에서 온종일 재미없는 책들과 지겹게 보내던 나에게 이 또한 종이뭉치에 불과했다. 애초에 읽을 마음도 없었고, 단지 그 잡지의 그림이 재미있어 비슷하게 그려보기 위한 목적으로 펼쳤다. 


그런데 그렇게 몇 권을 훑어보다 보니 내가 평소 궁금해 하던 문제들과 비슷한 내용들이 과학동아에 담겨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야말로 ‘대발견’이었다.


과학동아를 읽을수록 머릿속 많은 물음표들은 하나하나 느낌표로 바뀌어갔는데 내용은 내용대로 읽으면서, 멋있게 표현된 삽화를 직접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과학동아는 아주 큰 즐거움이었다.

 

 

연구 결과 이해하려고 비행기 타고 날아가기도


2020년 5월 현재까지 나는 미국, 영국, 독일 등의 국제학술지 표지 950점, 크고 작은 삽화까지 포함하면 약 1000점이 넘는 그림을 만들어왔다.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연구 내용을 파악하는 과정에 가장 공을 들인다.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연구 결과를 표현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 보는 식재료로 지금껏 없던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요리사의 심정이다. 심지어 보기 좋고 맛있어야 한다.


연구자로부터 논문과 스케치를 받으면, 어떤 장면을 표지로 구현해야할지 디자인 구상이 머릿속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종종 연구자가 제시한 것보다 더욱 기발한 장면이 떠올라 역으로 연구자에게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작업에는 어릴 적부터 과학동아에 수록된 기사를 읽으며 과학과 연관된 그림 그리기를 취미처럼 해온 것이 큰 도움이 되는 듯하다. 과학동아가 그림을 통해 어떻게 과학을 표현하는지 오랫동안 봐온 것이 지금 하는 일에 큰 동력을 준다. 

 


논문 저자들의 대부분은 논문 투고 단계에서 그림 작업을 의뢰한다. 하지만 간혹 연구 과정부터 함께 하는 일도 생긴다. 한 예로 3년 전, 오명환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 박사로부터 다결정소재 나노입자를 연구하다가 의미 있는 발견을 했다며 이 입자의 패턴규칙을 3차원으로 시뮬레이션 해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몇 번의 화상회의를 거쳤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에 나는 곧장 미국으로 날아갔다.


3차원 모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수없이 반복해 시도했지만 나노입자의 기하학적 패턴을 완벽하게 구현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연구자도 나도 점점 지쳐갔지만, 사흘 뒤 마침내 나노입자가 균일하게 반복되는 각도와 규칙을 찾았다. 연구자의 가설이 그림으로도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연구 결과는 올해 1월 16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렸고, 그때 만든 시뮬레이션 그래픽이 표지로 채택됐다(102쪽 배경사진).


‘네이처’와 ‘사이언스’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만큼, 논문을 싣기도 어렵고 논문에 실린 그림이 표지로 채택될 가능성은 더욱 낮다. 그런데 올해 1월의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 연구단장과 작업한 결과물이 ‘사이언스’ 4월 3일자 표지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처럼 과학 분야 시각디자이너로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뿌듯함의 연속이다. 간혹 내가 그린 표지 그림에서 연구의 영감을 얻었다는 얘기를 연구자로부터 듣기도 한다. 앞으로도 단순히 주문받은 그림을 만들어내는 작업자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통해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널리 알리고, 대중들이 흥미를 갖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오래 전 이탈리아의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비례도’ ‘헬리콥터 스케치’ 등 자신의 연구 내용을 그림으로 남겼다. 나도 과학이 시각적 기술을 통해 다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2020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이영희 큐브3D그래픽 대표
  • 에디터

    이영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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