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로봇과 마주치면 어떤 기분일까요. 지능형로봇법 개정안이 2023년 11월 17일 시행되면서 한국에서도 ‘실외 이동로봇’을 활용해 물건을 배달하고 거리를 순찰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운행안전인증을 받은 자율주행 로봇에는 ‘보행자’ 지위가 부여돼요. 로봇과 나란히 신호등을 기다리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상이 펼쳐지는 겁니다. 로봇과 함께 할 미래를 과학동아가 조금 먼저 만나봤습니다.
로봇과 함께 걷는 미래를 과학동아가 조금 먼저 만나봤습니다.
“주문이 접수됐습니다. 픽업 장소로 출발합니다.”
애플리케이션에서 ‘아메리카노 4잔’ ‘주문’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개미’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개미는 자율주행로봇 전문기업 로보티즈가 개발한 실외 이동로봇으로, 흰색 직사각형 몸체에 더듬이 모형이 달려 있어 실제 곤충 개미를 연상시킵니다. 개미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있는 로보티즈 본사를 출발해 마곡중앙로 사거리의 카페까지 인도 위를 약 150m 이동했습니다. 개미는 보도블록의 턱과 경사를 넘었고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개미가 이동하는 속도는 시속 10~15km. 사람 걸음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로봇이 도착했습니다. 배송물을 넣어주세요!” 개미가 도착하자 카페 직원은 익숙하게 개미의 뚜껑을 열고, 커피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틀에 커피를 한 잔씩 넣었습니다. 개미는 카페 직원이 나와 커피를 싣는 내내 기다리고 있었죠. 의젓한(?) 그 모습에 지나가는 시민들도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커피를 싣고 다시 최종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개미를 보고 있으니 왠지 그 앞을 막아서 보고 싶은 음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을 막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로보티즈에서 IR/PR 업무를 담당하는 이승현 프로는 “우선 스피커로 안내 음성을 내보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안내가 나오는지 궁금해져 개미의 앞길을 가로막아봤습니다. 그러자 개미는 가던 길을 멈추곤 “물품을 배송 중입니다. 조심히 지나갈게요!”라는 안내 음성을 전했죠.
“외출하려면 면허 따고 오세요”
16가지 운행안전인증 심사
12월 1일 찾아간 로보티즈 사옥에서는 개미처럼 자율주행을 하는 이동로봇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 일대와 로보티즈 사옥이 위치한 마곡동 일대는 ‘규제샌드박스’ 지역으로 지정돼 현재도 실외에서 이동로봇을 운행하는 게 가능합니다.
규제샌드박스란 국토교통부에서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량 등 신기술을 활용한 혁신사업을 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현행 규제의 전부나 일부를 유예해 주는 제도입니다. 자율주행 실외 이동로봇은 그동안 ‘차’에 해당해 보도를 통행할 수 없었습니다. 로보티즈는 2019년 12월 산업융합 규제샌드박스를 통과해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마곡 일대에서 보도를 통행하며 시범 배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실외 이동로봇은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2023년 10월 19일, 실외 이동로봇을 ‘차’로 규제하다가 ‘보행자’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으로 개정된 도로교통법이 시행됐고, 이어 11월 17일에는 실외 이동로봇의 정의와 보험가입 의무 등 실외 이동로봇의 외출 허용을 위한 조항을 신설한 지능형로봇법이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실외 이동로봇은 이제 규제샌드박스 지역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보도블록 등 공공도로를 다닐 수 있는 보행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단,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가 지정한 16가지 항목의 운행안전인증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운행안전인증 시험은 실외 이동로봇이 사람과 함께 안전하게 도보를 걷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사항입니다.
한 예로 16가지 항목 중에는 횡단보도 통행이 있습니다. 로봇이 신호등의 신호를 정확히 인지하고, 보행신호가 종료되기 전에 횡단을 완료하는지 등을 확인하는 시험입니다. 이날 기자와 동행한 개미는 횡단보도를 마치 사람처럼 건넜습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였는데, 우선 정지했다가 차량이 오지 않는 틈에 잽싸게 건너는 모습이 제법 능숙해 보였습니다.
신호, 경사, 날씨변화무쌍 외부 환경
딥러닝으로 학습
이처럼 로봇이 현장의 실시간 상황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주행 환경을 인식하는 기술 덕분입니다. 실외 이동로봇은 변화무쌍한 환경을 시시각각 인식해야 합니다. 정해진 위치에 사물들이 존재하고 길도 반듯한 실내 환경과 달리, 실외에서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부터 보도블록의 턱, 움직이는 사람들, 눈비가 내리는 날씨까지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외 이동로봇을 설계할 때는 동적인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지도를 이용합니다. 지도에서 로봇이 주행 가능한 영역과 아닌 영역을 미리 설정한 다음, 주행 가능한 구역에서 시험 운행을 반복하면서 로봇이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AI 딥러닝 과정을 추가로 거칩니다. 이 프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로봇도 태어나서 적어도 한 계절, 1년 정도는 경험을 통해 학습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로봇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예상치 못한 사고로 제한 시간 내에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김홍호 로보티즈 모바일로봇사업부 부사장은 “횡단 도중에 주변이 혼잡해서 보행시간을 준수하지 못하면 관제 센터로 제어권을 넘긴다”며 “이후 관제 담당자 판단에 따라 로봇을 원격으로 조작한다”고 답했습니다. 16가지 운행안전인증 시험에도 관제장치의 작동을 평가하는 항목이 있습니다. 로보티즈 사옥 5층 시험동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를 통해 실외 이동로봇의 위치와 현 상황을 알 수 있는 관제센터가 있었습니다. 책상에는 실외 이동로봇을 수동으로 제어할 수 있는 자동차 핸들이 구비돼 있었습니다.
실외 이동로봇이 물품을 파손 없이 안전하게 배송할 수 있을지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를 위해 실외 이동로봇의 바퀴 부근에는 흔들림을 줄여주는 서스펜션이 들어갑니다. 또한 16개 운행안전인증 시험 항목 중에는 실외 이동로봇이 경사가 5도 이상인 길을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박형태 산업부 기계로봇항공과 사무관은 “실외 이동로봇 안전요구사항 및 시험방법 표준인 KS B 7320 표준인증에서 착안해 2023년 3월에 5도 기준을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언덕길이나 보도의 턱 등을 잘 지나가려면 최소한 경사 5도는 올라가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김 부사장은 “개미는 최대 30kg을 탑재한 상태에서 10도 경사로까지 오를 수 있다”며 “계단은 오를 수 없지만 단차가 10cm인 보도블록 턱은 충분히 넘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외에도 실외 이동로봇을 일상에서 활용하려면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로봇과 부딪혀 사고가 날 가능성은 없는지, 로봇이 도난당할 염려는 없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로보티즈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해 뒀습니다. 김 부사장은 “자동차 운전자 시각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로봇이 보일 수 있도록 로봇에 반사율이 높은 깃발과 LED 조명을 높게 달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충돌 방지를 위해 실외 이동로봇에 비전 및 적외선 등 다수의 카메라와 라이다 센서, 초음파 센서 등도 부착했습니다. 누군가 실외 이동로봇을 훔쳐 가려고 하는 것에 대비해선 여러 센서를 달아놨습니다. 도난을 당하더라도 위치 정보를 확인 할 수 있다는 게 회사의 설명입니다.
집 앞까지 배달 완수하려면
관건은 엘리베이터
모든 항목을 무사히 통과한 실외 이동로봇의 최종 꿈은 ‘라스트 마일’입니다. 쉽게 말해 고객이 원하는 물품을 집 현관까지 가져다주는 것이죠. 현재 국내에서 운행하는 실외 이동로봇들은 캠핑장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라스트 마일을 아직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엘리베이터입니다. 대부분의 실외 이동로봇은 버튼을 누르지 못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봇 회사들은 실외 이동로봇이 엘리베이터와 연동돼 로봇이 다가가면 엘리베이터가 자동으로 작동하게 하거나, 실외 이동로봇에 엘리베이터를 누를 수 있는 ‘팔’을 붙이는 방법을 고안 중입니다.
로보티즈 사옥 내에서는 ‘팔’이 달린 실내 이동로봇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실내 이동로봇은 카메라로 엘리베이터 숫자를 인지하고 팔로 목적층의 버튼을 누른 뒤, 해당 층에 내려 사무실 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이 프로는 “이러한 실내 이동로봇과 실외 이동로봇을 통합한 로봇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실외 이동로봇을 취재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로봇과 사람이 공존하는 미래를 기대했습니다. 이 프로는 “실외 이동로봇의 이름을 개미라고 지은 건 사람과 친숙하게 공존하길 바라기 때문”이라며 “로봇이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 게 아니라 사람의 편의를 더 높여주는 데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길을 걷다 마주한 실외 이동로봇을 방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동아사이언스 뉴미디어 채널 ‘씨즈’에서 로봇을 개발한 로보티즈와 함께 시험해 봤습니다. ☞바로가기 https://youtu.be/83T5H_7ffgQ?si=yd0joXXn-QQ9SM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