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술읽혀요 | 과불화합물
세계적인 화학기업인 미국 듀폰(DuPont)은 1938년 테플론(Teflon)을 처음 선보였다. 당시에는 전차 표면을 코팅하기 위해 개발됐지만, 뛰어난 방수성과 화학적 안정성이 알려지면서 프라이팬 코팅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후 음식 포장 용기, 기능성 의류까지 활용범위가 넓어졌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테플론 합성에 사용된 과불화옥탄산(PFOA·Perfluorooctanoic acid)의 독성이었다. 이런 사실을 처음 밝혀낸 이는 과학자가 아니라 변호사였다.
3월 11일 개봉한 영화 ‘다크 워터스(Dark Waters)’는 1998년부터 2017년까지 19년에 걸쳐 실제 미국에서 벌어진 웨스트버지니아주 주민과 듀폰 간의 오랜 소송전을 토대로 하고 있다. 듀폰의 테플론 공장이 있던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유독성 물질인 PFOA가 무단으로 폐기됐고, 주변 가축이 폐사하고 주민들이 암에 걸리거나 기형아가 태어나면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다.
영화는 듀폰이라는 거대 기업에 맞선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의 소송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화학물질이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과학자들도 밝히지 못한 PFOA의 유해성을 입증하기 위한 롭의 고군분투가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그의 집요한 추적 덕분에 현재는 대부분 분야에서 PFOA의 사용이 금지된 상태다.
과불화화합물이 가축의 공격성 높인다?
미국의 대형 로펌 태프트에서 근무하는 변호사 롭은 성실함을 인정받아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한다. 같은 날 그에게는 남루한 행색의 농부 윌버 테넌트가 찾아온다. 윌버는 듀폰이 오염물질을 방류해 자신의 농장에서 키우던 소가 죽었다며 증거자료를 가져왔으니 듀폰과 소송을 진행해달라고 요청한다.
롭은 일단 윌버를 돌려보내지만, 자신의 할머니와 아는 사이라는 말에 다음날 그의 농장을 찾는다. 실제로 롭은 2016년 뉴욕타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할머니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며 “그들(마을 주민)과 연대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윌버는 롭에게 농장에 남아있는 소의 치아와 발굽 변형을 직접 보여주며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호소한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롭은 수차례 농장을 방문하면서 소의 이상행동을 목격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결국 소송을 맡기로 결심한다.
영화에서 롭이 목격한 소는 외형이 심하게 변형됐고, 폐사한 소의 장기는 크게 부풀었다. 소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치아도 검정색으로 변색했다.
실제로 불소는 충치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 치약의 핵심성분으로 사용되지만, 치아에 축적되는 특징이 있어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이가 갈색으로 변할 수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PFOA를 과도하게 섭취해 치아가 검정색으로 변색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얘기한다.
고영림 을지대 보건환경안전학과 교수는 “불소에 의해 치아가 변색되려면 불소가 이온 상태여야 한다”며 “PFOA에 포함된 불소 성분은 탄소와 단단하게 결합한 만큼 불소만 이온으로 분리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롭이 듀폰과의 소송을 결심한 데는 소의 비정상적인 공격성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PFOA에 중독된 소는 농장 주인인 윌버를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동물이 PFOA에 중독되면 실제로 공격성이 증가하는 것일까.
케시 쿠퍼 미국 뉴저지주립대 환경과학과 교수팀은 제브라피시를 수정 후 5일간 2μM(마이크로몰·1μM은 100만분의 1M)의 과불화화합물에 노출하고 6개월 뒤 거울 속 자신을 공격하려고 시도하는 빈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암컷은 과불화화합물에 노출된 경우 공격성에 차이가 없었고, 수컷은 과불화노난산(PFNA)에 노출된 경우에만 공격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PFNA를 제외한 다른 과불화합물에서는 공격성에 유의미한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doi: 10.1016/j.aquatox.2016.09.011
고 교수는 “PFOA를 비롯한 과불화화합물은 신장과 간에서 독성을 일으키는 물질”이라며 “PFOA에 중독되면 영화와 달리 오히려 가축의 활동력이 감소하고 쉽게 지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PFOA, 발암물질로 분류돼
본격적으로 듀폰과의 소송을 준비하던 롭은 화학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듀폰에 계속해서 관련 자료를 요구한다. 듀폰은 끈질기게 자료를 요구하는 롭에게 도저히 검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자료를 주며 시간을 끌려 한다.
하지만 평소 성실함으로 인정받던 롭은 다른 업무는 물론이고 가족과의 관계까지 팽개친 채 자료 분석에 몰두한다. 그중 폐기물과 관련된 의심스러운 문서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화학물질인 PFOA를 발견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PFOA는 화학적 성질 등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었고, 당연히 관련 자료도 찾을 수 없었다. 롭은 평소 친분이 있던 화학업체 관계자를 통해 한 화학자를 소개받는다. 그 화학자는 “PFOA는 들어본 적 없지만 과불화옥탄술폰산(PFOS·Perfluorooctanoic Sulfonate)은 알고 있다”며 PFOS의 위험성에 관해 설명한다.
PFOS는 PFOA와 함께 대표적인 과불화화합물의 한 종류로 방수용 코팅제와 계면활성제 등으로 많이 쓰인다. 이 둘의 공통점은 8개의 탄소를 기본 골격으로 각 탄소에 불소가 결합한 형태라는 점이다. 다만 PFOA의 경우 작용기로 카르복시기(-COOH)를 갖지만, PFOS는 술폰산기(-SO3H)를 갖고 있다.
PFOS는 PFOA보다 일찍이 그 유해성이 밝혀져 2009년 스톡홀름 협약에서 인체 내에서 분해되지 않고 계속해서 축적되는 잔류성유기오염물질(POP)로 분류됐다. 잔류성오염물질로 분류되면 생산과 사용, 폐기까지 규정에 따라 관리돼야 하며 허가된 일부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다. PFOA는 지난해에야 잔류성유기오염물질로 등록됐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는 현재 PFOA를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PFOA는 정소암과 신장암을 유발할 수 있는 발암물질 2B 등급으로 분류돼 있다. 2B 등급은 동물실험과 임상시험 자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발암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휘발유, 나프탈렌도 발암물질 2B 등급에 해당한다.
PFOS는 아직 IARC의 발암물질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 유해성을 경고하는 연구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규제 독성학 및 약물학’ 2016년 11월 18일자에는 지금까지 발표된 PFOS의 유해성을 다룬 논문들을 메타분석한 결과 PFOS가 암 유발 가능성이 있는 만큼 발암물질로 분류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논문에서는 세포실험과 동물실험 결과 PFOS가 인간을 포함해 대부분의 종에서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doi: 10.1016/j.yrtph.2016.11.021
롭의 끝나지 않은 소송
영화에서 롭은 PFOA의 인체 유해성과 듀폰이 이런 유해성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송이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듀폰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암에 걸리거나 기형아를 출산한 사례도 확인됐다.
하지만 듀폰은 PFOA가 위험한 것은 맞지만 수돗물에 포함된 PFOA가 인체에 악영향을 줄 만큼 충분한 양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설상가상으로 듀폰은 막대한 자본력을 동원해 과학자들을 매수했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를 만들어냈다.
긴 공방 끝에 롭과 듀폰은 외부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는 중립 연구단체에 PFOA의 유해성 검토를 의뢰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PFOA의 축적 정도를 확인하고 PFOA와 질병과의 관련성을 조사하기 위해 주민들의 혈액 채취가 진행된다. 롭은 연구가 금방 끝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가 연구결과를 받아본 건 7년이나 지난 뒤였다. 결론은 PFOA와 주민들의 암 발병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에서 PFOA의 인체 유해성을 조사한 연구 중 가장 큰 규모는 2008~2011년 4년간 오하이오주 거주자 3만225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 결과 PFOA에 노출된 농도와 기간이 길수록 당뇨병, 관상동맥질환 등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가 많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환경 건강 전망’ 2013년 8월 1일자에 발표됐다. doi: 10.1289/ehp.1206450
당시 연구에 참여한 신형무 미국 알링턴 택사스대(UT알링턴)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당시 어바인 캘리포니아대(UC어바인) 연구원)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화학물질의 인체 유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화학물질 자체의 특성뿐만 아니라 사람의 병력, 생활습관 등 조사해야 할 변수가 매우 많다”며 “모든 변수를 확인할 수 없는 만큼 대규모 표본조사 방법이 신뢰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롭과 듀폰의 소송은 2017년 미국 법정이 듀폰에 6억7100만 달러(약 8400억 원) 배상을 선고하면서 사실상 롭의 승리로 일단락났다. 하지만 과불화화합물의 인체 유해성을 둘러싼 롭의 소송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듀폰과 쓰리엠(3M)을 상대로 PFOA 이외의 다른 과불화화합물의 유해성에 대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영화에서 롭은 이렇게 말한다. “PFOA의 유해성은 증명됐지만, 여전히 다른 과불화화합물에 대한 유해성은 미지수다.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독성 물질에 중독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