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난이도 | 아로코스의 비밀
‘태양계 행성은 미행성*이 고속으로 충돌해 만들어졌다.’
‘태양계 행성은 미행성이 완만한 속도로 뭉쳐 만들어졌다.’
그간 태양계 행성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이론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전자인 ‘고속 충돌설’이 우세했다. 그런데 지구에서 약 66억km 떨어진, 태양계의 가장 바깥에 있는 작은 행성 하나가 최근 고속 충돌설을 뒤집었다. 머리와 몸통이 결합한 눈사람 모양으로 생겨 ‘눈사람 소행성*’으로 불리는 아로코스(Arrokoth·2014 MU69) 얘기다.
우주에 관심이 있다면 ‘코스모스(cosmos)’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무인 탐사선 보이저 1호를 이용해 1990년 2월 그는 저 먼 우주에서 지구를 촬영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보이저 1호는 2012년 8월 태양권계면을 지나 심우주에 진입했고, 지금도 우주를 항해하고 있다).
먼 우주를 향하고 있던 보이저 1호의 카메라 방향을 지구 쪽으로 돌리는 일은 얼마 남지 않은 자체 전력을 사용해야 하는 등 어찌 보면 불필요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찍은 사진 한 장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진 속에 담긴 것은 먼 우주에 있는 외계 관측자가 볼 때 전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지구의 모습이었다. 마치 우리가 무심코 생활할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빛을 비춰야만 보이는 공기 중의 먼지처럼, 우주에서 본 지구의 존재는 대단하지 않았다.
이를 마주한 많은 사람들은 인간 중심, 지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 사진을 통해 거대한 우주의 존재를 느끼고 우주의 형성 과정에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달과 태양계 행성들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최근까지도 천문학계에서 행성이나 별의 초기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주류 이론은 1944년 러시아의 천문학자 오토 시미트가 처음 제안한 핵 강착(core accretion) 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별이나 행성은 주변의 가스와 먼지 원반에서 작은 알갱이가 정전기작용으로 고속충돌하면서 뭉쳐지고 이 과정에서 먼저 핵이 형성된다. 이후에는 핵의 자체 중력으로 주변 미행성과 빠르게 병합하고, 이런 병합과정이 수차례 진행되면서 최종적으로 행성의 모양을 갖춘다.
최영준 한국천문연구원 행성연구본부장은 “그간 외부 항성계의 관측자료를 종합하면 핵 강착 이론이 태양계를 포함한 항성계의 형성과정을 가장 잘 설명한다”며 “핵 강착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발견하지 못했을 뿐 모든 항성은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로코스, 시속 15km 이하로 부드럽게 조우
그런데 태양계 끝자락인 카이퍼 벨트(Kuiper belt)*에 위치한 소행성 아로코스의 생성과정을 살펴본 결과 핵 강착 이론과 정반대라는 결과가 나왔다.
인류가 아로코스를 직접 관측한 건 2019년 1월 1일이었다. 이날 NASA의 무인 탐사선 뉴허라이즌스호는 아로코스로부터 3500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해 아로코스의 형태와 지형을 촬영하고 표면온도를 측정했다. 아로코스 관측을 마친 뉴허라이즌스호는 소행성의 중력을 이용해 마치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며 속력을 얻는 플라이바이(flyby)로 태양계를 빠져나갔다.
최 본부장은 “카이퍼벨트는 태양계의 냉장고 같은 곳”이라며 “태양과 가까운 지역의 행성과 소천체는 강한 태양풍 등의 영향으로 상태가 변했지만, 이런 영향이 미미한 카이퍼 벨트 지역은 태양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로코스 관측이 주목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뉴허라이즌스호가 촬영한 아로코스의 데이터는 플라이바이 후 약 10시간 뒤 지구에 도착했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2월 28일자에는 이들 데이터를 분석한 논문 세 편이 나란히 실렸다. 윌리엄 매티넌 미국 워싱턴대 지구및행성과학과 교수팀은 아로코스의 표면을 분석한 결과 타원형의 두 미행성이 매우 부드럽고 천천히 조우해 아로코스가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doi: 10.1126/science.aay6620
연구팀은 두 소행성이 맞닿아 있는 접합부를 분석한 결과, 마치 눈사람의 목 부분처럼 편평하고 둥글며 이런 형태는 강한 충돌로는 나올 수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아로코스와 같은 태양계 소행성의 회전과 기울기를 설명하는 야르콥스키 효과(YORP effect)*에 따라 시뮬레이션해보면, 이런 접합부가 형성되려면 수억 년 이상의 궤도 수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니 최고시속 18km 이하로 느리게 결합해야 가능했다.
매티넌 교수는 논문에서 “아로코스는 매우 빠르고 강한 충돌로 생긴 것이 아니다”라며 “두 소행성이 복잡한 궤도로 천천히 돌다가 합체한 것”이라고 밝혔다.
존 스펜서 미국 사우스웨스트연구소 우주연구부 박사팀은 아로코스를 이루는 두 미행성의 최장 길이가 각각 20.6km, 15.4km이며, 극과 적도 부위가 기하학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이 강하게 충돌하지 않고 천천히 결합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아로코스가 지구 형성 시기보다 5억 년 정도 뒤인 약 40억 년 전에 완성됐다고도 덧붙였다. doi: 10.1126/science.aay3999
스펜서 교수는 논문에서 “두 개의 둥근 천체가 만난 지점이 납작한 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과 적도가 나란히 있는 형태는 행성 형성 과정이 긴 시간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이뤄졌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달도 천천히 형성됐을까?
기존의 핵 강착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수백 만~수천 만 년간 이뤄진 미행성의 충돌 결과로 탄생했다. 원시 지구는 약 45억 년 전 지금과 같은 크기로 완성됐다. 바로 이때 반지름이 약 3000km인 화성만 한 천체가 지구에 비스듬하게 충돌했고, 두 천체의 핵이 합쳐지고 남은 부스러기(물질)가 지구 주위를 돌다가 뭉쳐서 달이 만들어졌다는 가설이 지배적이다.
달의 탄생을 설명하는 이런 이론을 ‘거대충돌설(Giant-impact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NASA는 1969년부터 달에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을 통해 월석을 지구로 가져왔다. 연구팀이 월석의 성분 등을 분석한 결과 지구에서 달이 원심력에 의해 분리됐다거나 지나가던 달이 지구 중력에 포획됐다는 가설 등은 모두 힘을 잃었고 거대충돌설이 가장 유력한 가설로 떠올랐다.
거대충돌설에서는 충돌 후 매우 뜨거운 부스러기가 빠르게 이동해 충돌하면서 달이 만들어지고, 이 과정에는 수십~수백 년이 채 안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문학적 시간의 관점에서는 찰나의 순간과도 같다. 2001년에는 화성만 한 천체가 지구에 충돌한 지 약 100년 안에 달이 생겼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doi: 10.1038/35089010
미행성들이 서서히 충돌해 오랜 시간에 걸쳐 행성이 형성됐을 것이라는 아로코스의 사례에 비춰볼 때,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달의 경우 거대충돌설이 계속 유효한 것일까.
사실 아로코스의 최근 연구 결과 발표 이전에도 거대충돌설에는 약점이 있었다. 달의 구성성분이 지구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점은 거대충돌설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산소, 티타늄, 텅스텐 등의 방사성동위원소 비율은 달과 지구가 거의 일치하는데, 단 한 번의 충돌로 떨어져 나간 물질로 빠르게 형성됐다는 거대충돌설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때문에 NASA의 화성 탐사 등 다수의 우주 계획에 참여해온 오데드 아하론슨 이스라엘 와이즈만과학연구소 지구및행성과학과 박사팀은 2017년 원시 지구와 작은 천체들이 여러 차례 충돌하는 과정에서 달이 만들어졌다는 ‘다중 소충돌설(multiple smaller moonlet-forming impacts)’이 달의 현재 모습을 더 잘 설명한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지오사이언스’에 발표하기도 했다. doi: 10.1038/ngeo2866
당시 연구팀은 질량이 달의 100분의 1~10분의 1인 미행성이 원시 지구와 충돌하는 상황을 864회에 걸쳐 시뮬레이션했다. 그 결과 지구에 미행성이 소규모로 750번 충돌했을 때 현재와 비슷한 크기의 달이 만들어 질 수 있는 원반이 지구 주변에 생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백만년에 걸쳐 달이 형성되면, 지구와 달의 동위원소 구성비가 닮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 아로코스의 합병 과정이 달의 다중 소충돌설을 지지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최 본부장은 “태양과 가까운 지구나 달은 서로 충돌이 많았고 물질의 온도가 높아 모든 병합과정이 아로코스처럼 천천히 진행됐다고 볼 수만은 없다”며 “다중 소충돌설은 달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로 아로코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설명했다. 카이퍼 벨트에서 일어나는 소행성의 병합과정과 태양 근처에서 벌어지는 병합과정은 차이가 크다는 뜻이다.
최 본부장은 “지난 수십년간 이뤄진 우주 탐사 중 원시 태양계의 비밀을 가진 천체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관측한 것은 아로코스가 처음”이라며 “향후 크기별로 더 다양하고 체계적인 원시 천체 탐사가 이뤄진다면 소행성과 행성 형성과정의 비밀을 한 꺼풀 더 벗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용어정리
* 미행성(planetesimal)
현재의 우주 행성과 항성을 만든 과거의 소천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 소행성(asteroid)
가스를 분출하는 혜성을 제외하고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소천체를 지칭한다.
* 카이퍼 벨트
태양에서 45억~70억km 떨어진 지역. 태양계 형성 초기에 행성이 되지 못한 채 남은 다양한 크기의 암석이나 얼음 소행성 무리가 있다.
* 야르콥스키 효과 (Yarkovsky-O’Keefe-Radzievskii-Paddack effect)
이반 야르콥스키 등 네 명의 과학자가 만든 소행성의 운동을 기술하는 효과. 태양풍 등의 영향을 계산해 태양계 내 소행성의 궤도나 회전 방향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아로코스처럼 쌍으로 존재하는 소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때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