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문명하셨습니다’라는 유행어를 만든 게임 ‘문명’은 한 나라를 태초의 시기부터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타며 미래까지 이끌어 가는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도시에 대학을 지으면 능력치 중 ‘과학력’이 올라간다.
교육력이 아닌 과학력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나는 유럽의 대학 현실이 떠올랐다. 실제로 유럽의 대학은 교육기관보다는 연구기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독일 대학은 연구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대학생들에게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독일 대학은 늘상 대학생들에게 ‘너희들이 들어오고 싶다니까 받아는 줄게’라는 느낌을 강하게 내뿜는다. 입학 전부터 학생들은 스스로 모든 학과 일정이나 프로그램 등을 스스로 챙겨야한다. 문제는 이런 설명도 잘 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대학처럼 과대표가 공지를 해주는 것도 아니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중 가장 불편했던 건 학교 홈페이지다. 독일 대학은 교과목 정보나 등록절차 등 필요한 정보를 한 사이트에 모아 놓지 않는다. 오죽하면 홈페이지보다 구글에 검색해서 정보를 찾는 게 빠를 정도다. 처음에는 나도 필요한 링크를 모아두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제는 다 포기하고 구글에서 검색한다.
독일 대학의 학사 시스템은 한국 대학과 크게 다른점이 있다. 한국은 일반적으로 8학기 이수 후, 즉 4년 만에 졸업한다. 반면 독일은 전공마다 최대 학기수를 정해놓고 최대 학기 안에 필요한 학점을 채운다. 이 말은 공부하는 양에 따라 더 일찍 졸업할 수도, 동기들보다 몇 년 더 늦게 졸업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대개 독일에서는 학년이 아니라 이수 중인 학기로 말을 하는데, 6학기 재학 중인 나는 글에서 편의상 3학년이라고 밝혔다.).
이수 학점을 계산해보면 이론적으로 독일 대학은 6학기, 즉 3년 만에 졸업이 가능하다. 한국과 달리 필수로 들어야 하는 교양과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제수학과의 경우 졸업 전까지 전공 이외에 들어야 할 교양과목은 단 두 과목뿐이다.
그렇지만 최대 학기 시스템을 둔 이유가 있다. 6학기에 졸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다. 보통 7~8학기 만에 졸업하면 ‘선방’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사 과정 중에 필수로 인턴십을 해야 하고, 전공과목 수업을 다 소화하지 못해 빨리 졸업하지 못한다.
내가 전공 중인 경제수학과는 학점을 이수하는 게 특히 힘들다. 내가 전공해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독일에서 의대와 자연계열 학과는 수업이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다. 나도 처음 대학 진학할 땐 의대와 자연대는 일찌감치 선택에서 제외하기도 했었다(물론 그렇다고 의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아헨공대 기계공학과 자퇴 후 카를스루에공대에 입학할 때 산업공학과나 경영경제학과에 진학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카를스루에공대에 경영경제학과가 없어 비슷해 보이는(착각이었다) 경제수학과와 산업공학과를 지원했고, 경제수학과에 합격해 입학했다.
경제수학과는 수학을 살짝 이용해서 경제 현상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학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육과정을 듣고 크게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제수학과는 수학과에 경제학을 부전공으로 곁들인 학과였다. 그토록 피하려던 학문을 전공하게 된 셈이다.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며 대학생활을 여유롭게 하려던 나의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났다.
엄살이 아니다. 자연계열 학과 중에서도 수학과는 악명이 자자하다. 수강 과목 평균 합격률이 절반도 되지 않고, 교수들도 그만큼 문제를 어렵게 출제한다. 경제수학과와 수학과의 차이는 부전공이 미리 정해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뿐이다. 잘 알아보지 않은 내 탓이었다(물론 후회한다는 말은 아니다).
독일의 수학과는 수업이 4종류로 구성돼 있다. 교수가 이론을 설명하는 강의(Vorlesung), 박사과정중인 조교가 과제를 풀이해주는 연습(Übung), 학과 선배들이 조교가 내준 문제를 채점하고 실용적인 팁을 알려주는 소규모 수업인 튜터(Tutorium), 그리고 학생들이 교수 지도하에 한 주제를 심도 있게 파고드는 세미나(Seminar)다. 이처럼 수학과 학생들은 강의 외에도 해야 할 게 참 많다.
물론 출석체크도 안 하고, 시험도 1년에 한 번만 보니 수업에 들어오지 않고 시험만 보는 학생들도 있다. 그래서 한 학기 중에 3개월 동안 놀고 3개월 동안 공부하는 일명 ‘3-3 전략’을 쓰는 친구들도 많다. 시쳇말로 ‘될 놈은 뭘 해도 된다’고 이런 식으로도 합격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전 학교에서 실패했던 것처럼, 합격을 하지 못하는 사례가 훨씬 더 많으니 괜한 도박을 하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