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읽혀요
도쿄대는 6개의 학류(이과 1, 2, 3류, 문과 1, 2, 3류)별로 모집한다. 이과와 문과로 나뉘긴 하지만, 신입생 전원은 교양학부에 소속돼 2년간 필수수업 몇 개를 제외하고는 교양과목 위주로 수업을 듣는다. 이후 2학년 여름방학 때 전공을 선택한다.
학류 시스템은 우리나라 대학의 자유 전공과 비슷해 학류별로 진학 가능한 학부가 대략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이과 1류로 입학한 학생들은 수학과, 물리학과 등 이학부나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등 공학부에 지망할 수 있는데, 전공은 교양학부 때의 성적순으로 정해진다.
이런 이유로 일본인 학생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학부로 진학하기 위해 1, 2학년 때 피 튀기는 경쟁을 한다. 한편 유학생들은 전공이 정해진 상태로 입학하므로 성적 경쟁에서 자유롭다. 유학생인 나는 전공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1, 2학년 때는 성적을 잘 주든 말든 재밌어 보이는 수업들로 시간표를 꽉꽉 채웠다.
그중 고대 일본어로 쓰인 시집인 ‘백인일수’를 해독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고전일본어 수업이 있었다. 백인일수에 소개된 시는 1000년 전에 지어진 게 대부분이라 일본인 중에서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은 유학생인 내게 이 수업에 관심을 가진 배경을 물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치하야후루’에 백인일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배워보고 싶었다고 말하자, 교수님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근대적 트레이닝 방법과 몸이 움직이는 원리를 근육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는 ‘근육론’이라는 강의를 수강했다. 럭비부나 라크로스부 등 운동부 학생들이 잔뜩 이 수업을 들어서 수업 분위기부터 특이했다. 무엇보다 기말고사 문제가 재밌었다. 이를테면 ‘축구선수가 페널티 킥을 잘 찰 수 있기 위해서 단련해야 하는 근육과 훈련법을 서술하시오’와 같은 문제였다. 운동부는 아니지만 나도 나름대로 뭔가 열심히 적어냈던 기억이 있다.
일본 대학 중에는 ‘애니메이션론’ 등 오타쿠용 수업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도쿄대에는 애니메이션 관련 수업은 없었다. 대신 ‘보컬로이드(사람의 음성을 합성해 만든 가상의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장르) 음악론’이 있어 수강했다. 이 수업은 실제로 하츠네 미쿠(보컬로이드)로 작곡 활동을 하는 분이 강사로 초빙됐다. 덕분에 음향설비가 빵빵한 강의실에서 명곡을 감상하거나 토론을 하며 재밌게 수업을 들었다.
물론 외국어, 미적분학, 열역학 등 반드시 수강해야 하는 필수수업도 있다. 외국어는 입학할 때 2개를 선택하는데 일반적으로 영어와 배우고 싶은 언어를 1개 선택한다. 모국어인 한국어는 규정상 수강할 수 없으니 선배들은 영어와 일본어를 수강할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나는 입학 전에 일본어는 질리도록 공부해본 터라 이번 기회에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고자 했고, 가장 인기 있는 영어와 중국어를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일본어를 비교적 쉽고 빠르게 배워 ‘나는 어학에도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제4외국어를 제3외국어로(중국어를 일본어로) 배우는 것은 상상 초월로 어려웠다. 이 잘못된 선택으로 1학년 내내 중국어에 시달리며 내가 어학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도쿄대 수업은 판서가 무지막지하게 많다. 그중에서도 트위터에 검색하면 뜰 정도로(일본에서는 학생들 사이에서 트위터가 인기가 높다) 무자비한 판서로 악명높은 수학과 교수님이 한 분 있다. 내가 교양학부 교수님 중 가장 존경하는 미적분학 담당 아스케 타로 교수님이시다.
아스케 교수님은 수업시간이 되면 인사 한마디도 없이 칠판으로 다가가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판서를 시작한다. 수업시간 105분 동안 쉬지 않고 판서한 뒤, 수업시간이 끝나면 또 인사 한마디 없이 교실에서 나가는 기인이었다.
처음에는 판서에 허덕였으나 수업에 익숙해진 뒤 교수님이 미적분학의 간단한 계산법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적분학을 넘어 해석학까지 연결된 방대한 내용을 강의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진지하게 수학과로 전공을 바꿀 고민을 할 정도로 아스케 교수님 수업에 푹 빠졌다.
결과적으로는 전자정보학과에 진학했지만, 이때 익힌 수학적 감각들은 전공공부를 하는 데 기본기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2년간의 교양학부 과정으로 나에게도 교양이라는 것이 쌓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국어에 도전해본 것과 수학에 빠져본 것은 한번 해볼 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