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대는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 데다가, 쿼터제(1년 4학기)로 운영되기 때문에 방학도 독특하다. 우선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의 기간 차이가 꽤 크다. 겨울방학은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 첫째 주까지 약 3주로 짧지만, 여름방학은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약 석 달이나 된다.
겨울방학이 훨씬 짧지만, 유학생인 내게는 겨울방학이 여름방학보다 더 좋다. 겨울방학에는 학교 시설이 모두 문을 닫는 만큼 기숙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인 친구들도 대부분 일주일 정도는 집에 가거나 근처 친척 집에서 지낸다. 한국인 유학생도 대부분 한국에 온다. 내게 겨울방학은 해야 할 일이 전혀 없고, 한국에서 엄마의 집밥을 먹으면서 3주간 푹 쉴 수 있는 꿈 같은 기간이다. 가을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집에 갈 생각에 이미 마음이 붕 떠 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은 그동안 못 먹은 음식을 먹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해산물을 먹기가 힘들어 조개구이를 먹으러 가거나, 집 근처 단골집에서 낙지철판볶음을 먹는다. 오랜만에 먹는 음식, 그리고 복잡하지만 익숙한 서울의 분위기에 취해 있다 보면 3주는 금방 지나간다.
겨울방학이 쉬는 시간이라면, 여름방학은 가장 생산적일 수 있는 시간이다. 석 달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많은 학생이 인턴십을 하거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특히 실리콘밸리에는 이 기간동안 인턴을 채용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많아 경력을 쌓기 위해 대부분 학교 주변 회사에서 일하곤 한다.
다른 도시나 심지어 다른 국가에서 인턴을 하기도 한다. 미국 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서 워싱턴DC에서 인턴을 한 친구도 있고, 중동과 미국의 관계에 관심이 많아 요르단에서 일을 한 친구도 있다.
나는 매년 여름, 학교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화학 관련 연구를 하기로 결심한 만큼 기업보다는 연구실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다른 친구들이 세계 여러 도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부러웠지만, 올해 초 이탈리아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인턴십을 하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생활이 천차만별이다. 일반 회사원처럼 오전 9~10시에 출근해서 오후 5~6시에 퇴근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마치 대학원생처럼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한 뒤 이튿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친구도 있다.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연구하는 유기합성 분야는 시간을 많이 투자할수록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여름방학마다 일주일에 50시간 이상 연구실에서 일했다. 특히 2, 3학년 여름방학의 경우 하루에 실험을 두세 개씩 해서 정말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실험은 많이 실패할수록 더 잘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렇다고 연구실에서만 사는 건 아니다. 사실 방학 때는 수업이나 숙제가 없기 때문에 학기 중에 하지 못하는 재미있는 활동도 많이 할 수 있다. 1학년 여름에는 매일 일찍 퇴근해 댄스 동아리에서 춤을 연습했고, 2학년 여름에는 주변에 있는 해변과 도시들을 놀러 다녔다.
3학년 여름방학에는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열심히 놀았다. 주중에는 연구실에서 하루에 9~10시간 실험하고, 주말에는 2주에 한 번씩 로스앤젤레스에 놀러 가거나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요세미티국립공원 등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갔다. 연구 결과도 내고 좋은 추억도 쌓을 수 있었던 행복한 여름방학이었다.
또 3학년 여름방학에는 3주 동안 1학년 학생들이 듣는 집중 수업의 조교를 맡는 색다른 경험도 했다. 화학과 미술 재료의 융합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수업이었는데, 두 학년 아래 학생들과 미술 작품을 만들면서 3주간 캠프처럼 함께 생활해 즐거웠다.
방학은 정말 보내기 나름이다. 여름방학이면 늘 연구에 매진했지만, 틈틈이 다른 사람들과 여가를 보내면서 매년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느꼈다. 올해 여름방학이 학부 생활의 마지막 여름방학이었다는 사실이 아쉽고, 또 곧 졸업이라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돌아보면 방학마다 매번 알차게 잘 보낸 것 같아 뿌듯하다.
(굿바이! 또 만나요! ‘나의 미국 유학 일기’는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2020년 1월호에 ‘유학 일기’ 시즌 2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