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이소연이 만난 우주인] 우주로 간 심장외과 의사, 무카이 치아키(向井 千秋)

 

“교육은 우리가 꿈을 마음속에 그리도록, 
그리고 그 꿈을 추구하도록 만든다고 믿습니다.
(I strongly believe that education enables us to envision and to pursue our dreams)”

_무카이 치아키 

 

벌써 2019년 마지막 달 과학동아에 실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이소연 박사가 이제껏 만났던 우주인에 대해서 써보면 어때요?”라는 제안을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년 여의 시간이 지나 마지막 글이라니…. 특별히 이번 글은 올해 10월 14~18일 우주탐험가협회(ASE) 모임에 오랜만에 참석해 많은 선배 우주인들을 만난 뒤에 쓰는 것이라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1년 전 이맘때 누구에 대한 글을 쓸지 고민하며 떠올린 우주인들과 실제 소개한 우주인들은 얼마나 일치했을까? 최대한 다양한 우주인들을 소개하며 우주인에 대한 편견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을지도 궁금하다. 11번의 연재 중 6번이 여성 우주인이었고, 미국과 러시아 외에도 중국, 일본,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등 다양한 국가의 우주인을 소개하려고 애썼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80세 이상인 우주인에 대해 쓰지 못한 점이다. 우주탐험가협회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던, 세계 최초로 선외비행(EVA)에 성공한 러시아 우주인 알렉세이 레오노프(Alexey Leonov)가 지난 10월 11일 세상을 떠난 터라 더욱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번 연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연재 덕분에 내가 만난 우주인 중 최소 11명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선후배 우주인들과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소홀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요즘이다. 

 

 

심장외과 교수 시절 찾아온 두 번째 꿈, 우주인


올해 1월호에 첫 번째로 소개한 우주인이 그랬듯, 12월호에 마지막으로 소개할 주인공도 나와 가장 최근에 함께 이야기를 나눈 선배 우주인으로 결정했다. 심지어 이 분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를 “내 여동생(My sister)”이라고 소개해 주는 분이다. 바로, 일본 최초의 여성 우주인 무카이 치아키(向井 千秋) 박사다. 


무카이 박사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우주비행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10년경이었다.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우주생명의학연구소 책임자이자 국제우주대학(ISU)의 방문교수였던 그와 ISU 교육프로그램에서 함께 강의를 한 것이 계기였다.  


그는 첫 만남부터 친근했다. 겉으로는 성격이 나와 반대인 것 같았지만(항상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웃기 때문에 어디서든 찾기 쉽다는 말을 듣는 나와 달리, 무카이 박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격조 높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딘가 닮은 부분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예로 그와 나는 우주인을 꿈꿔본 적이 없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주인은 감히 꿈꿀 수 없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 우주 관련 정부 기관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동생을 보며 키운 꿈이었다. 그의 동생은 뼈에 공급되는 피가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줄어드는 골괴사라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서 불편한 시선을 받는 동생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다”며 “그래서 열 살도 되기 전인 어린 나이에 의사가 돼야겠다는 꿈을 마음 깊이 새겼다”고 회상했다. 


무카이 박사는 1977년 일본 게이오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결국 어린 시절 꿈을 이뤘다. 그는 게이오대 의대 심장외과 수석 레지던트를 거쳐 심장외과 교수로 일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두 번째 꿈이 찾아왔다. 


1983년 12월, 여느 때와 같이 중환자실에서 야간근무를 마치고 보던 신문에서 ‘NASDA(National Space Development Agency·JAXA의 전신)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왕복선으로 우주 비행을 하며 실험을 할 우주인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알게된 것이다. 

 

 

‘일본인도 우주에 갈 수 있다고? 에이, 설마.’ 


그는 별 기대 없이 우주인 선발에 지원했다. 선발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조종사가 아니라 실험을 수행할 과학자를 선발한다는 말이 왠지 그의 마음을 이끌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여성이 우주인 후보로 선발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성별, 나이, 피부색, 종교와 상관없이 수백 명의 지원자들이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그리고 1985년 보란 듯이 최종 우주인 후보 3인에 선발됐다. 

 

 

우주인 4개월 차에 맞닥뜨린 시련, 챌린저호 폭발


그는 1988년에 예정된 NASA의 우주왕복선 SL-J (Spacelab-J) 임무에 참여하기 위해 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그의 우주인 경력에서 가장 힘든 시련이 찾아왔다. 1986년 1월 28일 NASA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하는 사고가 난 것이다. 


‘우주 비행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할까?’ 그는 실제로 다시 병원에서 진료하는 의사로 돌아오는 것까지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했다. 당시는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를 막 시작한 때라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어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두 번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계획은 3년 이상 미뤄졌고, 심지어 1992년 9월 12일 우주왕복선 엔데버호를 타고 우주 비행을 한 최초의 일본인은 그가 아닌 모리 마모루 박사였지만, 그는 ‘백업 우주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당시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2007년 한국 최초 우주인 후보 2명 중 백업 우주인으로 선발됐기 때문이다. 서운한 마음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백업 우주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무카이 박사는 백업 우주인으로서의 장점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대표적인 예로 백업 우주인은 비행 우주인과 동일한 비행 훈련을 받으면서 거기에 더해 탑재체 제어센터의 지상팀들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대중에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우주인의 임무 성공을 위해 함께 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역시나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백업 우주인이라 구조될 일이 없을 테니 미리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귀환 후 우주인들을 구조하러 출동하는 러시아 수색구조팀까지 소개받았다. 백업 우주인이라 훈련 분위기도 훨씬 좋았다. 다른 백업 우주인들과 함께 훈련을 받다 보니,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백업 크루, 러시아 선배 우주인들이 농담까지 곁들여가며 친절하게 내용을 설명해줬다. 모든 것이 백업 우주인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소중한 경험들이다. 

 

 

우주에서 ‘꿀잠’ 자려면? 


무카이 박사는 1994년 7월 8~23일, 1998년 10월 29일~11월 7일 두 차례 우주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 첫 번째 임무(STS-65)는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에 탑승해 탑재체 전문가로서 우주생물 분야와 마이크로중력 분야의 과학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의학을 전공한 우주인이 탑재체 전문가로 비행한 덕분인지 무중력에서의 자율신경계, 골격과 근육대사, 심혈관계에 관련된 실험들이 많았다. 


두 번째 임무(STS-95)는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수행했다. 두 번째 비행에서는 무중력 상태에서 인체와 재료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좀 더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두 번째 비행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우주왕복선 임무보다 특별했다. 우선 1998년 11월 국제우주정거장(ISS) 첫 모듈 발사를 앞두고 진행된 사전 시험 성격의 비행이었다. 때문에 무중력과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 단백질 전환, 근육 손상에 관한 연구와, 골격 세포 배양 연구, 단백질 결정 성장 실험 등 우주인이 무중력 환경에 장기적으로 노출될 경우를 대비한 실험들이 많았다. 


우주인의 ‘꿀잠’에 대한 연구도 이뤄졌다. 보통 무중력 환경에서는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는데, 무중력 환경에서의 수면이 지상과 어떻게 다른지, 멜라토닌 복용이 수면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되는지 연구했다. 이 연구는 2008년 내가 우주 비행 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NASA의 요청에 따라 실험에 참여했을 만큼 장기 연구로 진행됐다. 


두 번째 비행의 또 다른 특징은 당시 77세였던, 미국 유인 우주 역사의 산 증인인 존 글렌이 함께 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우주인들의 연령 분포가 확대됐고, 무중력 환경에서 신체변화가 나이에 따라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무카이 박사는 그 후로도 우주왕복선 비행 중 수행할 과학 실험을 지원하는 과학자로 일했다. 그는 2003년 사고가 난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준비팀이기도 했다. 함께 임무를 준비했던 우주인이 사고를 당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을 그가 새삼 존경스럽다. 

 

“미래 세대 위한 ‘씨앗’ 심고파” 


무카이 박사는 2015년 우주인으로서는 은퇴했지만, JAXA의 우주생명의학연구소의 책임자로, 나와 같은 국제우주대학의 교수진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마르지 않는 열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힌트는 그가 2003년 한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얻을 수 있었다. “당신의 (지금과 같은 일을 하는) 개인적인 목표는 무엇인가”라고 기자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주 분야에서 일하면서 많은 연구소와 그곳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과 함께 새로운 연구 분야를 발굴하고, 그 연구 분야가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다음 세대 연구자들에게 넘겨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씨앗을 심는 일’에 비유했다. 그의 이런 뜻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멋진 우주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과 맞닿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직업으로 또는 봉사로 이공계 교육 분야에서 활약하며, 항상 다음 세대 우주 분야 전문가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무카이 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육은 우리가 꿈을 마음속에 그리게 만들고, 그 꿈을 추구하도록 만든다고 믿습니다(I strongly believe that education enables us to envision and to pursue our dreams).”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말에서 미래 세대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소연. 2008년 소유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다녀온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전 세계적으로는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로 우주에 다녀왔다. KAIST에서 기계공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마치고, 동대학 바이오시스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공학도 출신이다. 현재는 미국 실리콘밸리 우주 관련 스타트업 로프트 오비탈(Loft Orbital)에서 전략기획 및 국제협력 담당으로, 미국 워싱턴대 공대에서 자문위원 및 겸직교수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우주인으로서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우주산업 시대에 맞춰 과학 대중화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mcax17@gmail.com

 

(굿바이! 또 만나요! ‘이소연이 만난 우주인’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201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글 이소연 로프트 오비탈(Loft Orbital) 전략기획 및 국제협력 담당
  • 에디터

    이영혜 기자 기자

🎓️ 진로 추천

  • 항공·우주공학
  • 의학
  • 교육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