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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토종 박사의 美 퀄컴 입사기

#UNIST #퀄컴 #반도체 #회로 설계 #적성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올해 2월 말, 전 세계 모바일 통신 칩 기술을 선도하는 퀄컴(Qualcomm)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얘기를 들었던 그때가 말이다. 처음 반도체 회로 설계 연구를 시작할 때 막연히 IBM, 인텔, 퀄컴 같은 세계적인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되다니. 지금도 가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필자(맨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속했던 UNIST 전기전자컴퓨터 공학부 연구실 친구들과 함께


학부 2학년에 전공 결정


필자가 퀄컴 엔지니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새겨보면, 시작은 중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시절, 평범하게 살아가기보다는 무언가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후 고등학생이 됐고, 울산과학기술원(UNIST)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당시에는 다소 낯선 이름의 대학이었지만, 학교 시설과 연구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영어로만 강의가 이뤄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인류의 삶에 공헌한다’는 UNIST의 비전이 필자의 근본적인 바람과 꼭 들어맞는 점에 끌려 UNIST로 진학을 결심했고, 2011년에 입학했다.


UNIST는 입학할 때 전공을 정하지 않는다. 덕분에 1학년을 보내면서 나중에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많이 고민하고 탐색할 수 있었다. 전공 선택을 위해 교수님들과 선배들에게 상담도 수차례 받았다. 그 결과 1트랙(전공)으로 전기전자, 2트랙으로 컴퓨터공학을 선택했다.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는 반도체를 비롯해 무선전력전송, 컴퓨터 비전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반도체 연구를 선택했는데, 이는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이기도 한 최재혁 교수님의 영향이 지대했다.


막 학부 2학년이 됐을 때 최 교수님이 가르치는 미분방정식 수업을 들었다. 그 당시 필자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수업 시간 외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수님은 그런 성실함을 눈여겨본 건지 학기가 끝난 후 자신의 연구실에 들어와서 함께 연구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일을 계기로 학부생 신분이었지만 교수님과 함께 아날로그 집적 회로 설계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회로 설계 분야는 연구할수록 재미도 있었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회로 설계에는 직관이 중요하다.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회로를 설계한 뒤 그것이 이론이나 수식에도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지만, 수식보다는 직관적인 접근을 더 좋아하는 필자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지도교수님은 연구 지도에 열정적이었고, 늘 학생들의 연구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줬다. 학부를 졸업한 뒤 고민 없이 바로 대학원에 진학해 최 교수님이 이끄는 연구실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컸다. 그리고 연구실에서 선후배들과 밤늦게까지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연구라는 것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 더욱 커졌다. 이렇게 보면 어떤 지도교수님을 만나는지가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직관적 사고 필요한 반도체 회로 설계


대학원에 진학해 반도체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시스템반도체 칩 설계에 본격적으로 매진했다. 반도체는 매우 작지만 반도체 칩 하나를 만드는 데는 수많은 엔지니어가 필요하다. 칩 하나에 수백만~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가고 각각이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데, 각 분야의 전문 엔지니어들이 최적의 회로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 중 필자와 같은 반도체 회로 설계자가 하는 일은 건축가와 비슷하다. 건물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필요하듯, 반도체 연구도 설계도를 만드는 분야가 따로 있다. 반도체 회로 설계자는 손톱보다 작은 면적에 전기신호를 주고받으며 전자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회로를 설계한다. 똑같은 땅이라도 설계도가 다르면 다른 형태의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처럼 목적에 따라 반도체 회로를 다르게 설계할 수 있다.


대학원 시절부터 필자는 최근 떠오르는 5세대(5G) 통신 연구에 집중했다. 특히 주파수 합성기(Frequency Synthesizer)라고 불리는 반도체 회로가 연구 대상이었다. 이 회로는 5G 통신의 품질과 속도를 좌우하는 아날로그 신호인 반송주파수(carrier frequency)를 생성한다.

 


반도체 회로 설계 분야는 산업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다른 분야와 달리 실험하고 논문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학 연구실에서 개발한 기술이 바로 산업에 쓰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도체 회로 설계 과정을 간단히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회로의 성능과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것이 실제로 구현될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검증한다. 검증이 완료된 회로는 설계 작업에 들어간다. 이를 바탕으로 회로 설계도를 만들어 반도체 공정 업체에 의뢰하면 2~3개월 뒤 완성된 칩의 형태로 설계자에게 돌아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회로 설계자는 여러 장비들로 제작된 칩의 작동 여부와 성능을 측정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처럼 반도체 회로 설계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대부분 1년 이상의 긴 시간이 소요되고, 비용 또한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 이상 든다. 따라서 매우 신중하고 꼼꼼하게 검증하면서 설계해야 한다.


만약 설계가 잘못된 채로 칩이 만들어진다면 다시 칩을 제작하지 않는 이상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간과 돈을 둘 다 버리게 된다. 그만큼 회로 설계를 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전부 난관이다. 하지만 이런 칩들이 일상생활 곳곳에 적용돼 삶을 편리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반도체 회로 설계에 계속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고민보단 Go


2017년 3월 박사과정을 밟던 중 운이 좋게도 퀄컴 인턴십을 위한 인터뷰 기회가 생겼다. 당시 우리 연구실에서 발표한 논문들이 저명한 국제 학회와 저널들에 발표되면서 퀄컴이 관심을 갖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전화로 두 명의 면접관과 두 시간 정도 인터뷰를 했는데, 면접관들은 회로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직관적으로 회로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연구들을 진행했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했다. 다행히 인터뷰 결과가 좋아서 인턴십 제안을 받게 됐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퀄컴에서 약 7개월간 인턴으로 회로를 설계했다.


인턴 기간 중 가장 신선했던 부분은 인턴이라는 신분에 불과한 필자를 2020년 출시할 칩 설계에 참여시킨 사실이었다. 모든 미팅에 정규직인 회로 설계자들과 동등한 지위로 참여했다. 그 누구도 내가 인턴이라는 것을 묻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단지 내가 어떤 회로를 설계 중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진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묻고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약 7개월간의 인턴십이 마무리될 때쯤, 퀄컴에서 앞으로 칩 설계를 계속 같이 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왔다. 반도체 연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꿈꿔온 퀄컴의 입사 제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 교수님과 연구실 식구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축하해 줬다.


연봉계약을 하고 인턴십을 마무리한 후, 지난해 3월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올해 5월 말까지 연구실에서 진행하던 연구들을 마무리하고 다시 퀄컴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반도체 회로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 퀄컴에 입사한 지 3개월 정도밖에 안 됐지만, 이곳에서 여러 우수한 엔지니어들과 함께 실제 제품에 들어가는 회로를 설계하고 토론하는 순간순간이 필자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경험이다.


퀄컴의 회사 분위기는 한국 기업들보다는 자유분방한 편이다. 회의에서는 직급이 높든 낮든 상관없이 본인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다. 동료들은 다들 경청하고 함께 토론하며 회의를 진행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현재 필자의 꿈은 퀄컴에서 더 많이 배우고 실력을 쌓아 훌륭한 반도체 엔지니어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엔지니어로서 조금이라도 기술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


필자처럼 퀄컴에서 엔지니어로 일해보고 싶은 후배나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작은 조언을 하자면, 단순히 성적에 맞춰서 자신이 갈 수 있는 최고의 대학, 최고의 학과를 고르는 것보다는 자신이 재미있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무슨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딪쳐보고 많은 것을 경험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필자 역시 대학에서 학부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할지,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뭔가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거나,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을 믿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나중에 스스로에게 후회가 없을 것이다.

 

 

윤희인
울산과학기술원(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에서 아날로그 반도체 회로 설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퀄컴 RFIC팀 시니어 엔지니어로 5G 통신에 필요한 반도체 회로 설계를 하고 있다.

yoon@qti.qualcomm.com

201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윤희인
  • 에디터

    서동준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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