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3년을 지내고 나니,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면 “그런데 왜 이렇게 영어를 잘 해?”라며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외국인은 영어 발음이나 억양에서 대부분 티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를 포함해 주변의 유학생들 대부분은 발음이나 억양이 미국인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미국인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들을 쓰지 않아서다. 처음에는 미국 친구들이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굉장히 어색했다.
가령 친구들을 만났을 때 “How are you?”라고 하는 것부터 들 수 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표현이지만, 처음에는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몰랐다. 막 입학했을 때 누군가 내게 “How are you?”라고 물었고, 그 때 내 기분을 장황하게 얘기하다가 분위기가 어색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말은 “너 지금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도 가벼운 인사의 의미로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마트 계산대의 직원이 “How are you?”라고 하면 “Good, how are you?”라고 답하거나 심지어 대답조차 하지 않고 “Hi”로 대답하는 게 자연스럽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작은 표현들을 기억해 뒀다가 사용하는 연습을 했고, 이후 이런 표현들은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됐다.
표현법 외에도 어려운 것이 있다면 공감대다. 아무래도 자라온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와 관련된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대화가 이어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미국 친구들이 하루 종일 정치나 역사 토론을 하지는 않는다. 어제 본 드라마, 본인이 들은 음악, 혹은 다음 주에 가게 될 축제 같이 소소한 화제들이 대화의 소재가 된다. 이런 화제들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나는 운이 좋게도 K팝 동아리 친구들이 내가 한국에서 좋아하던 가수들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를 함께 봐준 덕분에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친구들과 가까워지려면 내가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매주 열리는 기숙사 행사나 학교 파티에 열심히 참여했고, 팝송을 더 많이 들었다. 넷플릭스로 미국 드라마도 더 많이 봤다.
그리고 한 가지,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음식이다. 밥상 앞에서 가장 많은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은 어딜 가나 똑같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과는 약속을 잡아서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같이 행사에 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대화 거리가 많이 생긴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에 익숙해질 때쯤, 학교 과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어 에세이가 발목을 잡았다. 수업에서 영어를 알아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교수들이 대부분 전공 용어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쉬운 영어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에서 사용하는 구어체가 아닌, 문법과 틀을 갖춘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가끔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미국에서 12년간 학교 다닌 친구들보다 좋은 에세이를 쓸 순 없겠지’라는 생각에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교수들도 모든 학생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수업 초기부터 교수에게 내 상황을 얘기하고 자주 도움을 요청했다. 다만 ‘외국인이니까 봐 주세요’라는 식은 아니었다. 에세이에 필요한 자료 조사와 구상을 정말 열심히 했고, 문장이 좀 어색하더라도 전달하려는 내용은 확실히 써서 갔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그냥 봐달라는 것인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인지 금세 알아보기 때문에 내 노력은 높게 평가 받았다. 글에 두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찾아갔다가, 교수가 내 에세이의 방향을 잡아준 경우도 있었다.
또 스탠퍼드대는 글쓰기가 고민인 학생들을 위해서 무료로 글쓰기 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에세이 마감 기한 직전에 교수가 세세히 봐주지 못한 표현을 교정하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았다. 교수의 도움과 글쓰기 상담 센터 덕분에 영어 에세이 실력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모든 일상을 영어로 생활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매번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서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격언 ‘너 자신을 알라’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