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를 키우는 병들입니다. 연구실에서 개발 중인 신소재의 세포 독성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세포가 필요하거든요. 우리 몸에 적용할 생체 소재는 독성을 띄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홍선기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신물질과학전공 교수가 연구실에 늘어선 알록달록한 색깔의 액체가 담긴 병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2017년 DGIST에 부임한 홍 교수는 생체재료 및 생체계면공학 연구실을 이끌고 있다. 연구실의 관심 분야는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카테콜 기반 소재다.
홍 교수는 “전혀 다른 소재처럼 보이는 홍합의 접착 단백질과 피부색을 좌우하는 멜라닌은 공통적으로 카테콜 작용기라는 화학 구조를 갖고 있다”며 “카테콜 작용기의 작동 원리를 알아내고 이를 이용해 자연모사 유기 신소재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접착력과 발색 모두 갖춘 신소재 개발
지혈제나 수술용 봉합실은 체내 세포나 분자들과 잘 결합해야 한다. 특히 이들은 혈액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체내 수중 환경에서도 접착력을 유지하는 게 필수다. 홍합의 접착 단백질은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후보로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홍 교수는 “홍합은 바다 연안에 있는 암초에 붙어 성장하는데, 이 부위를 확대해보면 얇은 실이 엉켜있다”며 “실에 포함된 단백질에 있는 화학 구조 중 카테콜 작용기가 가진 접착력 덕분에 단단히 붙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테콜 작용기는 6개의 탄소 원자가 결합한 벤젠고리 말단에 하이드록시기(-OH) 2개가 인접해 있는 구조다. 카테콜 작용기는 이웃 분자들과 공유결합을 할 뿐만 아니라 수소결합이나 *파이-파이 상호작용과 같은 다양한 비공유결합도 할 수 있다. 홍합은 이런 카테콜 작용기를 이용해 바위 표면뿐만 아니라 배의 바닥이나 표면이 흐물흐물한 수초 등 다양한 표면에 달라붙어 자란다.
사람의 체내에도 카테콜 작용기를 가진 천연 소재가 존재한다. 눈동자와 머리카락, 피부 등의 색을 결정하는 멜라닌과 뇌에서 흥분을 전달하는 신경활성물질인 도파민 등이 카테콜 작용기를 갖고 있다.
이 중 멜라닌은 카테콜 작용기를 갖는 전구체 물질이 단일 분자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서로 결합하면서 생성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홍 교수팀은 기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양이온-파이 결합이 멜라닌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2018년 9월호에 발표했다. doi: 10.1126/sciadv.aat7457
양이온-파이 결합은 벤젠고리에 있는 파이 전자가 주변 양이온과 정전기적으로 결합하는 현상이다. 홍 교수팀은 멜라닌에 존재하는 암모늄이온(NH4+) 작용기가 탈수소화 되는 조건인 수소이온농도(pH) 10 이상의 강염기 환경에서는 멜라닌이 형성되지 않으며, 이미 형성된 멜라닌도 분해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파이 전자와 강하게 결합하는 칼륨이온(K+)이나 암모늄이온(NH4+)을 넣으면 새로운 양이온-파이 결합이 유도돼 멜라닌 분해가 억제되는 현상도 확인했다.
홍 교수는 “양이온-파이 결합이 멜라닌의 고분자화와 발색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확인했다”면서도 “단일 분자로 존재하던 멜라닌 전구체가 어떤 화학 반응을 통해 고분자가 되고, 양이온-파이 결합과 같은 분자 간 비공유 결합을 이용해 서로 엉겨 붙는지 그 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홍 교수팀은 홍합의 접착성과 멜라닌의 발색 과정에 공통적으로 관여하는 카테콜 작용기를 이용해 유기 신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접착성과 발색을 동시에 가진 신소재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 체외 진단에 사용되는 발색 소재는 접착력이 없어 검출하려는 인자가 있을 때 검사액 전체의 색을 변하게 만든다”며 “검사액이 담긴 용기의 어느 위치에 질병 인자가 존재하는지, 또 얼마나 존재하는지 구체적인 정보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접착성을 띤 발색 신소재를 개발하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같은 유해 인자가 붙어있는 특정 공간만 색이 변하게 할 수 있다. 홍 교수는 “발색에 접착성까지 갖춘 유기 신소재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새로운 체외 진단기술 개발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용어정리
파이-파이 상호작용
음전하와 양전하의 정전기적 상호작용처럼, 원자핵 주변에 구름형태로 존재하는 파이 전자는 양이온이나 다른 파이 전자 등과 비공유결합을 한다. 일례로 생체 내 단백질이 세포 표면의 수용체와 결합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