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을 이뤄 함께 일하는 능력을 최대한 기르세요. 국제우주정거장에 올라간 우주인은 5명의 동료 우주인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수백 명의 동료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_우주인을 꿈꾸는 한국 청소년들에게
2014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국제우주대학(ISU) 교육프로그램에 교수진으로 참가할 때였다. 우연히 5달러짜리 지폐를 보는데 웬 기계가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로봇팔 ‘캐나담(Canadarm) 2’였다. 캐나다 국민들이 자국의 우주 활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캐나다는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협력하며 굉장히 일찍 우주 개발에 뛰어들었다. 1962년 러시아와 미국 다음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1980년대 초에 로봇팔을 개발해 우주왕복선에 장착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우주로 보낸 사람도 9명이나 된다. 이번 호에서는 그중에서 캐나다 최초의 우주팀 중 한 명으로 선발된 로버트 써스크 박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와는 2009년 학생과 교수 사이로 처음 만났다. ISU 교육프로그램에 학생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ISS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그가 화상 수업을 진행했다. 그 이후로는 필자가 ISU의 교수진으로 참여하면서 선후배 사이로 그와 몇 차례 더 마주쳤다.
하지만 길게 이야기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함께 강연을 하며 질의응답을 받을 때 만나는 수준으로 만남의 시간 자체가 짧기도 했지만, 더 솔직하게는 의학박사 출신으로 우주의학을 강의하는 그와 공학도인 나는 거리감이 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MIT 졸업하고 의대 다시 간 이유
그런데 2017년 좋은 기회가 생겼다. 그해 아일랜드 코크(Cork) 지역에서 개최된 ISU 교육프로그램에 교수진으로 참여하며 그와 함께 아일랜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대화로 채워졌다.
써스크 박사는 당시 캐나다우주국(CSA)에서 은퇴한 뒤 캘거리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은퇴 전 1996년과 2009년 두 차례 우주비행을 하며 캐나다 우주인 가운데 우주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문 기록(204일 18시간 29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1996년 그의 첫 번째 비행은 미국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를 타고 이뤄졌다. 17일 동안 비행하면서 생명과학, 재료과학 실험을 43개나 수행했다. 우주비행 조건에서 식물이나 동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미세중력 환경에서 물질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실험들이었다. .
▲ 써스크 박사는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다시 의대로 진출한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우주에서 의사와 공학자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사진은 2009년 국제우주정거장(ISS) 20번째 임무(Expedition 20)에서 비행 엔지니어로 일하는 모습이다.
2009년 두 번째 임무에서는 소유스 TMA-15의 비행 엔지니어를 맡아 약 6개월간 ISS에 머무르며 무중력이 장기적으로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의사와 공학자의 역할을 넘나드는 이런 활약은 그의 배경과도 관계가 깊었다. 처음에는 그가 의사 출신 우주인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학부와 석사과정은 나와 같은 기계공학과였다.
그는 여덟살 때 학교 수업 시간에 미국 우주인 존 글렌이 지상 통제센터와 통신하는 것을 듣고 우주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하늘보다도 더 높은 곳에 우주가 있는데, 그곳은 공기가 없고 온도가 급격하게 변하며, 모든 물건이 무중력으로 붕 뜨는 탓에 끈으로 묶거나 벨크로로 붙여놔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우주라는 곳에 푹 빠져버렸다고 했다. 그는 그때가 1962년 2월이라는 것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기계공학을 선택했을까. 유체의 흐름이나 로켓 기술을 배우는 기계공학이 우주비행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 분야에서 널리 쓰일 것 같아 선택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설적인 우주인인 그도 어렸을 때는 우주인이 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고 하니 인간미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왜 기계공학도에서 다시 의사가 됐을까. 물론 내 주변에도 공학을 공부하다가 치의학대학원이나 의학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써스크 박사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기계공학으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와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계기가 궁금했다. 기계공학 전공을 살려도 충분히 우주 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는 캐나다에서 학부 공부를 하던 시절 한 교수님의 조언 덕분이라고 했다. 우주인이 꿈이라는 그에게 당시 교수님은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여기에 의학까지 공부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고 조언했다고. 유인 우주비행 분야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우주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생리의학적 문제임을 생각하면 아주 현명한 조언을 해주신 셈이다.
" 우주인으로 선발되고 첫 비행을 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첫 비행이 결정됐다는 연락을 받은 날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 ISS에서 바라본 캐나다의 모습. 빨간 점으로 표시한 부분이 캐나다 동쪽 끝부분에 있는 퀘벡이다. 캐나다는 북극과 인접해 ISS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지역이 제한적이다.
ISS에서 캐나다를 바라보는 게 소원
1983년 몬트리올에 있는 퀸 엘리자베스 병원 가정의학과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던 써스크 박사는 우주인을 선발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당장 지원했다. 캐나다가 우주왕복선의 원격 조작 시스템인 로봇팔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NASA가 감사의 표시로 유인 우주비행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써스크 박사를 포함해 총 4400여 명이 우주인 선발 과정에 몰렸고, 단 6명만이 최종 우주인 후보로 선발됐다. 써스크 박사는 그 대단한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하지만 그의 첫 비행은 그로부터 12년이나 지난 1996년에야 이뤄졌다. 캐나다 우주인의 비행이 자주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첫 우주왕복선 비행이 결정돼 캐나다우주국 상관에게 전화를 받은 날이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96년, 2009년 두 번의 비행이 각각 특별했다고 말했다. 1996년은 첫 비행이라서, 2009년은 우주에서 가족이 있는 캐나다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였다.
과거의 나는 우주비행 궤도에 대해 무지했던 탓에 ISS에 도착해 우리나라를 내려다보는 일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반도가 북위 33~43도에 위치해 운이 좋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ISS에서 볼 수 있는 지구 면적은 전체의 약 75%뿐이다. ISS의 비행 궤도면이 지구 적도면에서 약 52도 기울어져 있어 남극과 북극 접경 지역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써스크 박사가 첫 비행에 탑승한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는 비행 궤도가 약 39도 기울어져 북위 39도까지만 볼 수 있었다. 캐나다의 최남단이 북위 42도임을 고려하면 캐나다 대부분의 지역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아쉬움은 두 번째 비행에서 완전히 날릴 수 있었다. 그는 2009년 6개월간 ISS에 체류하며 캐나다를 마음껏 내려다볼 수 있었고 사진도 수십 장 찍었다. “조국을 내려다보는 일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건 내가 만난 모든 우주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비행은 6개월 동안이나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했기에 그는 과학 임무 외에도 가족들과 추억을 만드는 특별한 계획을 실천했다. 자녀들의 탄생석을 넣은 특별한 반지에 우주 미션을 새겨 우주로 가져간 것이다. 6개월간 우주에 다녀온 반지를 평생 간직할 아이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빠를 기억할 아주 좋은 선물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아내에게는 “ISS가 집 근처 밤하늘을 지날 때 특별히 불을 켜서 반짝이게 하겠다”는 아주 낭만적인 약속을 했다고. ISS의 경우 다른 별들보다 지구와 엄청나게 가깝고, 커다란 태양전지판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유독 반짝이기 때문에 밤하늘에서 맨눈으로 찾기가 어렵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런 약속을 했을까. ISS에서 작은 손전등이라도 킨 것일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 불을 켰는지 e메일로 물었다.
그러자 “Ha! No!(아이구! 아니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ISS가 밤하늘에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아내와 주고받은 농담이었다고 말이다. 우주인 유머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1 현재 ISS에 설치된 대형 로봇팔 시스템 ‘캐나담 2’. 화물을 운반하는 것은 물론, 우주인의 선외 활동도 지원한다.
2 캐나담 2는 캐나다의 5달러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다. 자국의 우주기술에 대한 자긍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3 써스크 박사가 가족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해 우주로 가져간 반지.
▲ ISS 20, 21번째 임무에 함께 한 동료들. 맨 왼쪽이 써스크 박사이고, 가운데가 유럽우주국 출신 프랭크 위니, 맨 오른쪽이 러시아 우주인 로만 로마넨코다.
“다음 세대 우주인에게 기회 주고파”
써스크 박사는 캐나다우주국을 떠나 2014년 캘거리대 총장으로 부임했다. 그를 만났을 때 나 역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떠나 공부를 하고 있던 터라 그가 왜 캐나다우주국을 떠날 결심을 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회를 다음 세대 우주인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캐나다가 ISS 참여국이긴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에 비하면 참여율이 높지 않아서, 캐나다 우주인의 비행 기회는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던 그였다. “그 친구들도 우리들 못지않게 뛰어나고 열성적인 친구들이잖아”라는 그의 말에서 후배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느껴졌다.
그는 “다시 우주비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캐나다 우주 프로그램에는 언제든 기여할 수 있다”며 “다음 세대 우주인들의 우주탐사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즐기겠다”고 덧붙였다. 그의 다음 행선지가 왜 대학이었는지 이해가 됐다.
그런 그에게 이공계 진로를 고민하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그는 세 가지를 강조했다. 한국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첫째, 교육은 꿈이라는 로켓을 발사시킬 발사대와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둘째, 팀을 이뤄 함께 일하는 능력을 최대한 기르세요. ISS에 올라간 우주인은 5명의 동료 우주인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수백 명의 동료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여러분의 몸을 잘 돌보세요. 발사나 귀환은 물론이고 우주비행이나 무중력 환경에서 생활하는 임무는 우리 몸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신체가 없이는 어렵겠죠.”
이소연
2008년 소유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다녀온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전 세계적으로는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로 우주에 다녀왔다. KAIST에서 기계공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마치고, 동대학 바이오시스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공학도 출신이다. 현재는 미국 실리콘밸리 우주 관련 스타트업 로프트 오비탈(Loft Orbital)에서 전략기획 및 국제협력 담당으로, 미국 워싱턴대 공대에서 자문위원 및 겸직교수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우주인으로서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우주산업 시대에 맞춰 과학 대중화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mcax1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