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2년마다 발표하는 ‘기술수준평가’라는 보고서가 있다. 가장 최근 보고서는 올해 4월 공개된 ‘2018년 기술수준평가’다. 문재인 정부의 120개 중점과학기술에 대해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등 네 나라와 한국의 기술격차를 분석했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기술격차는 어떻게 조사할까. 기술격차 조사의 핵심은 과학자들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묻고 수차례 피드백을 거쳐 결론을 얻는다. 설문조사에서 많이 사용되는 ‘델파이 기법’이 기술격차 조사에도 쓰인다. 2018년 기술수준평가에는 120개 중점과학기술별로 10명씩 총 1200명의 전문가 의견이 담겼다.
최근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로 한국과 일본의 이른바 ‘경제전쟁’이 촉발되면서 반도체 소재에 관한 한일 양국의 기술격차가 궁금했다. 보고서에서 ‘초고집적 반도체 공정 및 장비·소재기술’ 부분을 펼쳤다.
한국은 메모리 제조 기술은 최고 수준이지만, 기반기술에 해당하는 장비기술이 낙후됐다. 대학, 출연연 등 반도체 연구 인프라가 열악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반면 일본은 메모리 제조 기술이 한국에 비해 다소 뒤지지만,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는 한국을 앞서가고 있으며, 국내 반도체 회사들이 일본의 소재와 장비에 일부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일본은 이 분야 최고 기술을 보유한 미국과 비교해도 증착, 식각 등 반도체 주요 공정 장비와 부품, 소재기술은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과학기술 전 분야로 확대하면 한국은 미국과 3.8년의 기술격차가 있고, 일본은 미국과 1.9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긴 시간과 대규모 과학자를 동원하는 기술수준평가는 향후 정부가 연구개발(R&D) 전략을 수립하고 예산 투자 방향을 설정할 때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 작성한다. 이미 과학자들은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의 제조 기술은 세계 최고이지만 이를 떠받치는 소재와 장비기술은 낙후됐다고 지적했다.
이는 소재와 장비 분야의 기초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2016년 기술수준평가’ 보고서에는 초고집적 반도체 공정 및 장비기술에서 기초 연구와 응용·개발 연구의 수준 차가 10.2%p(퍼센트포인트)로 2014년(6.4%p)보다 더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과학계는 꾸준히 기초 연구의 필요성을 지적해왔고, 일본도 그 약점을 정확히 알고 짚었다.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기초 체력이 중요하듯, 과학 역시 외부 충격을 버티기 위해 기초가 중요하다. 아파야 건강 챙기듯, 어쩌면 지금이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