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죽은 지 4시간 뒤
인공 혈액인 ‘벡스’를 주입하자
놀랍게도 혈관이 재생되고
뇌세포도 다시 부활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수정란(배아)이 생성된다. 이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되고, 약 60일이 지나면 비로소 호흡을 관장하는 뇌간을 비롯해 뇌 조직이 성장한다.
이때부터 뇌는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생명을 유지시키는 핵심 장기로 임무를 시작한다. 몸길이 수mm인 선충류와 같이 일부 단순한 동물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모든 고등 생명체에서 뇌의 작동 여부는 생명 유지 여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지표다. 그간 의학계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뇌의 생사로 구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연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간과 가장 닮은 장기를 지닌 동물인 돼지의 뇌세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심지어 이렇게 ‘부활’한 돼지의 뇌세포는 약 6시간 동안 활성 상태를 유지했다.
4시간 만에 부활한 돼지 뇌세포
육류 가공 공장에 실려 온 6~8개월된 돼지 32마리는 도살처분 되는 중이었다. 머리에서는 피가 다 빠져나가 뇌의 형태는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인간 뇌 크기의 약 8분의 1, 부피로는 180cc 정도인 돼지의 뇌는 몸에서 잘려 나간 뒤 산소와 영양 공급이 안 돼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었다.
오원종 한국뇌연구원 뇌신경망연구부 책임연구원은 “몸 전체에서 동물의 뇌가 차지하는 부피는 약 2% 수준이지만, 산소 소모량은 20%가 넘는다”며 “모세혈관을 통한 산소 공급이 끊어지면 뇌는 금세 형태를 잃고 허물어진다”고 설명했다.
이제 돼지는 죽은 지 4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네나드 세스탄 미국 예일대 의대 교수팀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돼지의 뇌세포에 특수 장치를 이용해 각종 물질을 공급하자 일부 뇌세포가 살아 있을 때와 동일한 생리 활동을 재개했다.
연구팀이 사용한 특수 장치는 자체 개발한 ‘브레인엑스(BrainEx)’다. 브레인엑스는 분당 40~180회의 심장 박동과 같은 효과를 내며 물질을 순환시키는 시스템이다. 20~140mmHg의 정상 혈압을 생성하며, 3~42도 범위에서 동물의 체온에 따라 물질의 온도를 유지시킨다.
연구팀은 죽은 돼지의 뇌 32개를 브레인엑스에 하나씩 넣은 뒤 뇌동맥 부위와 연결했다. 연결된 장치를 통해 뇌 조직에는 ‘벡스(BEx)’라는 인공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벡스는 보존제, 안정제, 조영제, 산소 등을 혼합한 특수 물질이다. 벡스는 사람과 비슷한 돼지의 체온에 이르도록 25~37도로 조절해 공급됐고, 살아있는 돼지 심장의 적정 혈압(수축기 때 최대 80mmHg, 이완기 때 최대 65mmHg)을 유지하도록 죽은 뇌세포 내부를 순환했다.
그 결과 뇌세포의 파괴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뇌의 해부학적인 형태와 세포 구조도 생전과 유사하게 유지됐다. 뇌의 모세혈관도 제 모습을 되찾았고, 면역세포인 글리아 세포도 본래의 면역 기능을 회복했다.
무엇보다도 우측 뇌의 중심에 위치한 신경세포 사이의 접합 부위인 시냅스에서 신호 반응이 포착됐다. 죽은 뇌세포가 다시 살아나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이런 상태는 사후 10시간째인 실험 6시간 뒤까지 지속됐다. 뇌세포가 부활한 것이다.
오 책임연구원은 “일반적으로 신경세포가 망가지면 재생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부 사지마비 환자에서도 간혹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재생력을 가진 경우가 발견된다”며 “이번 연구는 이 같은 일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재현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뇌세포는 살아났지만, 뇌 기능은 못해
세스탄 교수팀은 이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4월 17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doi: 10.1038/s41586-019-1099-1 이후 과학계에서는 뇌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찬사와 함께 생명윤리 논란이 일었다.
세스탄 교수는 이번 연구에 대해 “되살린 돼지 뇌세포와 조직에서 일반적인 정신 활동으로 부를 수 있을 만한 의식이나 지각의 징후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뇌세포는 살아났지만, 뇌 기능은 여전히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감각을 통해 생각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도출하는 뇌 기능은 다양한 신경세포간의 상호 연결로 이뤄진다. 학계에서는 이를 뇌 신경망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세스탄 교수는 “비록 뇌 신경망을 재건하지는 못했지만, 뇌세포의 회복을 유도해 유지시킨 만큼 향후 고차원적인 뇌 활동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뇌 기능 활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장담하기 이르다. 오 책임연구원은 “고도의 뇌 기능을 만드는 신경망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며 “브레인엑스와 같은 장치를 개발해 다양한 연구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에 대해 생명윤리 관점에서 죽은 동물의 뇌세포를 활성화 시키는 브레인엑스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크리스틴 그레이디 미국국립보건원 임상센터 생명윤리학과장은 “뇌 손상이나 병의 비밀을 풀기 위해 만든 브레인엑스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라면서도 “뇌를 온전히 재생시킬 미래를 대비해 윤리적인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 이식 줄어들 수도
생명의 기본 조건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현재 많은 나라에서 뇌 기능 상실과 신체 장기의 순환능력 상실 등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인간의 죽음을 판단하고 있다.
생명윤리학자인 현인수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는 4월 17일자 ‘네이처’ 기고문을 통해 “뇌 기능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된 경우나 순환기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된 경우 법적으로 죽음을 선고한다”며 “생물학적인 죽음에 대해 정책결정자, 신경과학자, 환자 등이 모여 새로운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뇌를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 만큼 죽음을 결정하는 기존의 방식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뇌를 살리는 기술이 개발되면 뇌사 기증자를 통해 이뤄지는 지금의 장기이식 시스템에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뇌사자는 대뇌와 소뇌는 물론 생명 중추인 뇌간까지 모두 망가져 삶을 이어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경우를 말한다.
질병관리본부 장기이식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9~2018년 국내에서는 매년 250~500명의 뇌사 기증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들의 장기 기증을 통해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삶을 얻고 있다.
현 교수는 “수십 년 동안 환자들은 뇌사 선고 환자로부터 장기를 이식 받아왔고, 최근에는 심장과 폐 기능이 중단된 환자로부터도 장기를 이식 받고 있다”며 “예일대 연구팀의 연구 결과처럼 뇌에는 회복 능력이 없다는 생물학적 가정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가 계속 축적되면 이 같은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뇌를 살리려는 환자는 늘고 이식용 장기 기증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다.
오 책임연구원은 “기술적으로 뇌 기능을 살려낼 수 있게 되기 전에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라면서도 “뇌세포를 활성화시키고 기능을 되찾게 하는 연구는 다양한 뇌질환을 치료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만큼 뇌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