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래비티’에 등장하는 모든 위험 요소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우주에 가지 않아야 할 만큼 대처하기 힘든 걸까요? (영화에서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린) 우주쓰레기는 분명 큰 문제이지만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위험 속에서도 우리의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_케이디 콜먼
매달 글을 준비할 때마다 어떤 우주인에 대해 쓸까 적지 않은 고민을 한다. 머릿속에 우르르 떠오르는 사람들 중에 누구를 먼저 쓸까 하는 행복한 고민이지만, 한 달에 한 명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기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함께 훈련을 받거나 잘 알고 지내는 우주인만 해도 수십 명이라, 한 사람을 꼽고 나면 괜스레 다른 이들에게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가능하면 다양한 우주인, 그리고 꽤 늘었지만 여전히 소수인 여성 우주인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에 이번 호에는 2008년 우주비행 전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나의 멘토, 케이디 콜먼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주변을 따뜻하게 챙기던 ‘왕언니’
“네가 그 한국 우주인이구나!”
러시아 즈뵤즈드늬 가라독(스타시티)에서 훈련을 받을 때 처음 만난 케이디는 한 눈에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본인 소개를 하는데 뭐랄까, 친해지고 싶은 ‘왕언니’ 느낌이랄까.
이후 스타시티에서, 비행 후 우주인 모임에서 종종 마주칠 때에도 그는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질문이 있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미국 우주인들은 러시아어를 배워도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편하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편인데, 케이디는 러시아 교관이나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연로한 러시아 관계자들에게 늘 러시아어로 인사를 건넸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우주인 모임이 열렸을 때였다. 문화적인 차이로 여성 청중은 강당 2층 구석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야 했다. 우주인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없는 자리였다. 케이디는 이 사실을 알고는 직접 가서 여성 청중들을 만나보자며 내 손을 이끌었다. 히잡을 쓴 여성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 그가 미 공군에서 20년이나 복무한 공군 대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깜짝 놀랐다. 군인 출신 우주인들에게서 대체적으로 느껴지는 딱딱한 이미지보다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챙기는 이미지가 강해서 공학자나 과학자 출신 우주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디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화학을 공부하면서 공군 ROTC(학생 군사 교육단)에 입단했다. 그 이후로 20여 년간 공군에서 화학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과정까지 마쳤고, 그 과정 중에 우주인에 지원해 선발됐다.
그는 MIT에 지원할 때까지도 이공계 전공에 큰 관심은 없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과학이나 수학을 하는 학교에서는 공부하고 싶지 않다. 그 사람들은 뭔가 평범하지 않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우주인으로 비행을 세 차례나 한 베테랑 우주인이라면 당연히 어릴 때부터 과학이나 수학을 사랑했을 것만 같은 선입견을 완전히 깨는 그였다.
“우주인이 되려면 여성이 유리한가요?”
그는 우주인이 된 계기도 다른 미국 우주인들과는 달랐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선배 우주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은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던 모습이나, 196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계획인 ‘머큐리(Mercury)’ 프로젝트를 보고 우주인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케이디는 TV나 신문을 통해 우주인을 꿈꾸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은 모두 남자였고, 어떤 장면도 나에게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은 대학 시절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샐리 라이드(Sally Ride)의 강연이었다. 케이디는 이 강연을 들으며 ‘나도 우주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케이디는 여성 우주인이나 필자와 같은 아시아 우주인을 위해 활동하고자 노력했다. 러시아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소연. 내 말을 오해하지 않고 들어줘. 너는 지금 꿈꾸고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또 정말 열심히 훈련을 받아서 우주비행을 하고 싶을 거야.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각만큼 이상적이지 않아. 아직도 우주 분야에는 남자들이 훨씬 많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네가 비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더 강해지고 그 이후의 다른 기회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기를 바래.” 그의 조언은 실제로 내가 예비 우주인으로 선정됐을 때 정말 큰 버팀목이 됐다.
케이디는 강연이나 인터뷰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최대한 다양한 배경의 우주인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다. 한 예로 3년 전 그는 내게 e메일을 보내 자신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 학생들과 화상 통화로 우주비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의아했다. 학교가 미국 동북부에 있어 직접 방문할 수 있는 미국 우주인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나일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학생들에게 우주인에 대한 선입견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 만난 우주인이 누구였는가는 학생들에게 꽤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 전 캐나다, 미국, 중국의 우주인들과 함께 캐나다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도 참여한 우주인이 모두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날 질의응답 시간엔 이런 질문이 나왔다. “우주인이 되려면 여성인 것이 유리한가요? 오늘 오신 우주인이 모두 여성이잖아요.” 이제껏 들었던 질문들과는 너무 상반된 내용이라 대답을 하기 전 우리 모두 시원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긴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면 해”
“어느 정도의 학력이나 실력을 갖춘 남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여성인 우리들에게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줘야 할 때가 많습니다.”
‘여성 우주인으로서 힘든 점은 무엇인가’ 하는 강연의 ‘단골’ 질문에 케이디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한 예로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마련된 선외 활동 우주복은 남성 체형에 맞게 제작돼 키가 작은 케이디는 우주복 안에 패딩(충전재)을 여러 개 넣어야만 옷을 입고 움직일 수 있었다. 비행 전 몸에 맞지 않는 큰 우주복으로 임무를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다. 러시아에서 훈련을 받을 때 나는 내가 긴 머리를 가진 여성 우주인인 것이 미안한 순간이 있었다. 소유스 우주선 모형 내에서 비행 훈련을 시작하기 전, 입고 있던 우주복의 압력을 확인할 때였다. 내 우주복의 압력이 점점 낮아져 훈련이 지연됐는데, 머리카락이 헬멧과 우주복 사이에 끼면서 완전히 밀폐되지 않아서였다.
“머리를 자르는 게 좋을까?” 그날 저녁 나는 우주인 숙소에서 긴 곱슬머리를 가진 케이디를 만나 고민을 털어놨다. “아니야! 아니야! 절대로 자르지 마!” 그는 강경했다. 그는 옆에 있던 남자 우주인을 가리키며 “저런 헤어스타일의 우주인이 우주에 가서 얼굴만 TV 화면에 나왔다고 생각해봐. 그가 우주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 그런데 네가 우주에 가면 머리카락 때문에라도 모두가 우주인 것을 알 거야. 한국에 있는 많은 학생들이 무중력이 어떤 것인지 한 순간에 알게 될 거라고.” 정말 설득력 있는 대답이었다(머리카락 문제는 한국에 있는 동생이 머리망을 구해줘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케이디는 그도 한 때 긴 머리 때문에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며, 그래서 머리를 묶으려 했던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함께 비행했던 최초의 여성 우주왕복선 선장이었던 에일린 콜린스가 그의 마음을 돌렸다.
“난 너의 긴 머리가 좋은데, 왜 머리를 묶으려고 하지? 여기서는(우주선 내에서는) 내가 책임자고, 난 괜찮으니까 네가 편하다면 머리는 묶지 않아도 돼.” 덕분에 케이디는 대중 강연을 할 때마다 사방으로 둥둥 떠 있는 곱슬머리 사진으로 무중력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플루트 선율로 우주를 노래하다
지난 호에 소개했던 우주인 니콜 스탓(Nicole Stott)이 그림으로 우주를 가깝게 느끼게 만들었다면(2019년 1월호 참조), 케이디는 이를 음악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와 케이디가 가까워진 계기도 음악이었다.
2009년부터 5년 가까이 거의 해마다 우주인 모임에 참석했는데, 행사가 끝나고 나면 호텔 로비에서 친한 우주인들끼리 모여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당시 그 모임 회장이었던 캐나다 우주인 크리스 해드필드(Chris Hadfield)는 기타를 치고, 케이디는 플루트를 불었다. 나는 주로 피아노 담당이었다.
케이디는 2010년 12월~2011년 5월 국제우주정거장에서 6개월 동안 체류하는 임무에도 플루트를 챙겨갔다. 그리고는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을 한 러시아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비행 50주년 기념일인 2011년 4월 12일, 지구에 있는 플루트 연주자인 이안 앤더슨과 기념 듀엣 연주를 했다. 이안은 모스크바에서, 그 시간 케이디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함께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늘 멀다고만 느끼지만 한편으론 동시에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 우주임을 보여준 것이다.
우주인 케이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그가 바로 영화 ‘그래비티(Gravity)’의 주인공인 라이언 스톤 박사(샌드라 불럭)의 실제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비티는 2011년 케이디가 우주 비행을 하던 중 촬영됐고, 당시 샌드라 불럭은 전화로 우주에 있는 케이디와 통화하면서 우주의 삶이 어떤지, 연기를 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 많은 조언을 구했다.
케이디는 어린 아들을 지상에 두고 우주에 간 엄마로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과 일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고 했다. 틈나는 대로 통화하고,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기 위해 아들이 잠들기 전 전화로 동화책을 읽어준다고 말이다. 케이디가 소유스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향하기 전 러시아연방우주청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엄마의 경례 포즈를 따라하던 열 살짜리 아들은 이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나이가 됐다.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은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에 어두운 우주 공간에 혼자 남아 떠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생각하면 칠흑 같은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고와 위험한 상황부터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케이디는 그래비티가 우주가 어떤 곳인지 너무나 잘 표현한 영화임과 동시에,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휴먼 드라마라고 평가했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위험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가 우주에 가지 못할 이유가 될까?”라고 되묻는 그의 말에선 우주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도전 정신이 묻어났다.
이소연
2008년 소유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다녀온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전 세계적으로는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로 우주에 다녀왔다. KAIST에서 기계공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마치고, 동대학 바이오시스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공학도 출신이다. 현재는 미국 실리콘밸리 우주 관련 스타트업 로프트 오비탈(Loft Orbital)에서 전략기획 및 국제협력 담당으로, 미국 워싱턴대 공대에서 자문위원 및 겸직교수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우주인으로서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우주산업 시대에 맞춰 과학 대중화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mcax1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