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발로 걷는 척추동물은 지구상에 언제 처음 나타난 걸까. 그중 일부는 어떻게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두 발로 뛸 수 있게 됐을까. 화석에만 의존했던 진화 연구에 로봇 기술이 접목되고 있다. 화석을 토대로 고생물 로봇을 설계하고 제작한 뒤 로봇을 통해 고생물의 행동을 유추하는 ‘역공학(Reverse-engineering)’이 최근 각광받고 있다.
‘고대 악어’ 오로베이츠
도마뱀, 이구아나, 카멜레온, 악어는 모두 네 다리로 걷거나 뛰는 파충류다. 네 다리 파충류는 두 다리로 걷는 인간과 달리 앞으로 이동하기 위해 노를 젓듯 다리를 옆으로 휘감으며 내디딘다. 그런데 이들의 움직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다리의 생김새뿐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인도네시아 남부 코모도 섬에 주로 서식하는 코모도왕도마뱀은 육지에 완전히 적응해 단단한 땅을 걷는 일이 일상이다. 코모도왕도마뱀의 다리는 네 개 모두 90도로 꺾여 있고, 발이 바깥쪽을 향한 상태로 땅에 닿아 있다. 발목에서 무릎까지는 곧게 펴져 있어 몸은 바닥에서 10cm 이상 떨어져 있다.
반면 늪지에 적응한 악어의 경우 네 다리 중 앞다리 두 개는 앞을 향해 더 굽어 있고, 뒷다리 두 개는 상대적으로 뒤쪽으로 더 굽어 있다. 몸을 땅에 붙인 채 생활하거나 물속에서 헤엄치는 일이 많아서다.
그렇다면 네 다리 파충류의 조상은 도마뱀과 악어 중 어떤 생물과 더 닮은 모습이었을까. 지구상에 살다 간 무수한 생물 종이 화석조차 남기지 못하고 멸종했다. 또 전체 몸의 골격이 온전히 남아있는 화석이 발견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네 다리 동물의 조상을 찾는 연구도 이런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그런데 2004년 독일 중부에서 네 다리 동물의 기원을 밝힐 화석이 나왔다. 약 2억9000만 년 전 고생대 페름기에 살았던 네 다리 동물 ‘오로베이츠 팝스티(Orobates Pabsti·이하 오로베이츠)’의 화석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이다. 3년 뒤인 2007년에는 같은 지역에서 오로베이츠의 발자국 화석도 확인됐다.
고생물학자들은 이 두 화석을 비교분석해 오로베이츠에 대해 네 다리 동물의 원시 조상격인 생물로 걸음걸이가 효율적이지 못하고 움직임도 느렸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오로베이츠는 ‘고대 악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바다에서 뭍으로 막 올라와 늪지 인근에서 생활한 초기 육상생물로, 도마뱀보다는 악어와 더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오로베이츠가 도마뱀과 더 닮았다?
그런데 최근 이 연구에 상반되는 주장이 제기됐다. 오로베이츠가 초기 육상 동물이었지만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였을 것이라는 연구가 나온 것이다.
독일 훔볼트대와 함부르크미대,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은 오로베이츠의 행동 방식을 로봇을 통해 추적하는 역공학 기법을 이용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1월 17일자에 발표했다. 고생물학에 역공학이 접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oi:10.1038/s41586-018-0851-2
연구팀은 오로베이츠의 뼈와 발자국 화석을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스캔해 3차원 데이터를 수집했다. 이를 토대로 동역학적 모델을 구성한 뒤 여기에 현존 파충류의 행동 방식을 결합했다. 그리고 최대한 화석의 모양과 각도에 맞아 떨어지게 움직이는 오로베이츠의 로봇 모델 ‘오로봇(Orobot)’을 제작했다.
연구팀은 경사도를 높이거나 수분 함유율을 조정하는 등 지형 조건을 달리하면서 오로봇의 행동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와 수차례 비교분석했다. 연구를 이끈 존 니야카투라 훔볼트대 생물학연구소 교수는 “오로봇으로 실험한 결과 기존에 화석으로만 추정했을 때보다 오로베이츠가 더 곧은 다리를 가졌고, 허리는 더 굽었으며, 몸은 더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동 속도도 예상보다 빨라 악어보다는 도마뱀에 더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오로봇이 지형에 따라 다양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오로베이츠로부터 파충류뿐 아니라 양서류 등으로 폭넓게 진화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니야카투라 교수는 “로봇공학과 생물학을 융합해 고생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분석한 이번 연구를 확대하면 향후 좀 더 정교하게 생물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융합연구의 결과를 고고학적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한반도 공룡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이융남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이번 연구가 좋은 시도인 것은 맞지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로봇을 만드는 과정에서 무수한 예측값들이 들어간 만큼 이번 연구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오로베이츠의 이동 속도 등에 대한 기존 고생물학계의 입장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더 많은 오로베이츠 화석과 그와 비슷한 종의 화석을 찾고, 그들의 비교 연구를 진행해야 학문적으로 더 타당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미스소니언, 화석 표본 4000만 개 스캔
고생물학 연구를 위해 화석을 원하는 만큼 찾는 것은 의지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고생물학계에서는 고생물과 당시 환경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그간 발굴한 화석 자료를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 교수는 “로봇공학을 통한 융합연구도 좋지만, 우선 기존에 발견된 화석 정보를 누구나 연구에 적용할 수 있는 길부터 마련해야 한다”며 “CT로 스캔한 화석 데이터를 3D 프린팅을 이용해 인쇄하면 화석을 보기 위해 특정 박물관을 찾지 않더라도 연구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찰스 마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통합생물학과 교수팀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에서 발굴된 화석 등 고고학 정보 중 디지털화되지 않은 정보가 이미 디지털화를 완료한 것보다 23배나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국제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 지난해 9월 5일자에 발표했다. doi:10.1098/rsbl.2018.0431
마셜 교수는 논문에서 “이는 전 세계로 확대하면 실제 가지고 있는 화석 정보의 오직 3~4%만 디지털 자료로 바꿔 활용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박물관 등에 사장된 고생물학 정보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완수하는 것을 고생물학 연구의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12월 9일 미국 스미스소니언자연사박물관과 영국 런던자연사박물관은 자체적으로 보유한 생물 화석 표본을 CT로 스캔해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는 작업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모든 연구자가 활용할 수 있도록 화석 자료를 온라인에 올리겠다는 것이다.
캐시 홀리스 스미스소니언자연사박물관 컬렉션 매니저는 이 날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스미스소니언자연사박물관에는 약 4000만 개의 화석 표본이 있다”며 “박물관에 갇혀있던 화석 표본들을 디지털화해 이들이 속속 빛을 보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속도라면 이를 완수하기까지 약 50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