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도나 스트리클런드 캐나다 워털루대 교수는 지난해 ‘위키백과 무명인’으로 화제가 됐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업적을 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집단지성의 성채’로 불리는 위키백과에서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공동 수상자들의 인물 정보가 줄줄이 이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018년 10월 3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에 대해 몇 달 전 위키백과 사용자가 스트리클런드 교수의 인물정보 문서를 만들려고 했지만 ‘저명성’ 등재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리자에 의해 거부됐다며 위키백과의 젠더 편향을 꼬집었다.
위키백과의 젠더 편향은 이전에도 꾸준히 제기된 문제였다. 사용 언어와 무관하게 위키백과에 등재된 인물 정보 중 여성은 20%를 대체로 못 넘는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건 위키백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편집자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이다. 2018년 위키미디어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위키백과 편집자 중 여성은 9%에 불과하다. 성별에 더해 위키백과가 서구 중심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참여자의 지역 분포를 보면 서유럽이 50%, 아시아가 20%, 아프리카는 5%에도 못 미친다.
위키백과, ‘불신 시스템’이 정확도 유지 비결
2001년 미국의 사업가 지미 웨일스에 의해 처음 문을 연 뒤로 위키백과는 인터넷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90여 개의 언어로 쓰인 세계 위키백과의 월평균 페이지 조회 수는 150억 건, 전체 페이지는 약 5000만 개에 이른다. 방문자 수로 볼 때도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과 함께 몇 년째 상위권에 오른다.
신뢰도 면에서도 우수하다. 정확도를 가장 우선시하는 구글 검색 결과에서 위키백과는 언제나 가장 위에 뜨는 콘텐츠 중 하나다. 2017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컴퓨터과학및인공지능연구실과 피츠버그대 경제학과 공동연구팀이 인공지능(AI)을 이용해 화학 분야의 논문을 조사한 결과, 논문에 쓰인 830개 단어마다 1번꼴로 위키백과 내용이 반영됐다. doi: 10.2139/ssrn.3039505
위키백과의 성장 배경에는 ‘모든 사용자가 동등한 편집권을 갖는다’는 아이디어가 있다. 실제로 위키백과는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문서를 만들고 고칠 수 있다. 수정 사항이 반영되기 전 승인이나 검토 과정이 없다.
누구나 아무 때나 고칠 수 있는데도 위키백과의 정확도가 유지되는 비결이 뭘까. 역설적이게도,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제도적인 ‘불신(不信) 시스템’ 덕분이다.
2007년부터 위키백과 편집자로 활동해온 구은애 한국위키미디어협회 이사는 “누군가 위키백과의 페이지에 들어가 글을 수정하면 다른 편집자들이 수정사항을 자세히 뜯어보고 출처와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며 “잘못된 정보를 쓰거나 문서를 삭제해도 이를 빠르게 복구하는 장치가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고의로 가짜 정보를 입력한 편집자는 활동이 정지된다.
원형감옥 ‘파놉티콘’처럼 위키백과의 사용자들 모두가 다 함께 눈을 부릅뜨고 위키백과의 지식을 지키는 경찰이 되는 셈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위키백과가 불평등하다?
위키백과와 함께 그 안의 커뮤니티도 성장해왔다. 사회는 저마다의 규칙이 있는 법. 위키백과에도 지식 생산을 관리하는 정책과 지침이 있다. 이러한 원칙은 모두 투표와 토론을 거쳐 결정된다.
역설적인 것은 이렇게 ‘민주적으로’ 만들어진 위키백과의 규율이 새로운 사용자의 유입을 막고 위키백과를 ‘독점적’ 공간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최근 윤진혁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미래기술분석센터 선임연구원, 이상훈 경남과기대 교양학부 교수,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은 복잡계를 도입해 위키미디어의 2억7000만여 건의 정보와 4000만 건의 논문, 9000만 건의 특허를 비교 분석했다.
그다음 연구팀은 각각의 불평등지수를 ‘지니계수’로 정량화했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균형을 나타내는 수치로, 0이 완전 평등, 1이 완전 불평등을 의미한다. 연구 결과, 위키백과와 논문, 특허 모두에서 축적된 지식의 양이 많아질수록 소수 저자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지식의 독점화 현상이 나타났다. doi: 10.1038/s41562-018-0488-z
흥미롭게도 위키백과의 불평등지수는 0.9 이상으로, 논문이나 특허의 불평등지수(0.8 이하)보다 높았다. 윤 선임연구원은 “위키백과는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세한 규칙이 많아 진입장벽이 높다”며 “새로운 사용자가 성장할 기회를 주는 보호 장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윤 선임연구원은 또 “위키백과가 좋은 집단지성의 사례라는 점은 확실하다”면서도 “위키백과의 편집자 중 상당수가 백인, 20~40대, 교육받은 중산층인 만큼 의도치 않은 편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구 이사는 스트리클런드 교수 사례도 출처의 편향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는 스트리클런드 교수의 인물 정보로 올라왔던 초안을 꼼꼼히 살펴봤다(위키백과는 모든 수정내용을 ‘역사보기’ 탭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구 이사는 “위키백과의 등재 기준은 내용보다는 형식으로 결정되는데, 이때 출처를 명확히 표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초안에 적힌 출처는 등재 기준에 미흡해 보이고, 이 때문에 스트리클런드 교수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뢰할 만한 출처는 어디일까. 2019년 1월 19일 현재 스트리클런드 교수의 위키백과 페이지에 올라온 출처는 2018년 10월 노벨상 수상 이후 보도된 언론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구 이사는 “위키백과와 언론 보도는 서로를 참조하는 관계”라며 “노벨상 수상 이전에 스트리클런드 교수가 미디어에 많이 노출됐다면 등재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주목한 ‘다양성 챔피언’ Jess Wade(제스 웨이드)
하루에 한 명씩, 과학계의 숨은 영웅을 매일 발굴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영국 임페리얼칼리지의 젊은 물리학자 제스 웨이드다. 그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유색인종 과학자를 소개하는 위키백과 페이지를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쓴 과학자만 400명이 훌쩍 넘는다. 이 같은 공로가 인정돼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그를 2018년 가장 주목할 만한 과학자 10인으로 선정했다. 과학동아는 1월 14일 화제의 인물 웨이드와 직접 e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Q 위키백과에 꾸준히 여성 과학자 전기를 쓰는 이유가 뭔가?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여성과 과학에 대한 고정 관념을 막아야 여성이 과학에 이바지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 올라온 인물 정보의 80%가 남성이다.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여기는 온라인 자료인 위키백과를 참조하면 할수록 역사에서 과소대표(under-representation)된 사람들을 지우는 셈이 된다.
Q 과소대표된 집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과학에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는?
당연히 글래디스 웨스트다. 1931년에 태어난 흑인 여성 수학자로, 초기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개발에 기여했다. 내가 그의 위키백과 페이지를 만든 뒤 웨스트는 BBC 선정 100대 여성에 뽑혔고, 미국 공군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와우! 또 ‘내셔널 지오그래픽’ 최초의 여성 편집장이었던 수잔 골드버그도 기억에 남는다.
Q 과학 분야에서 여성의 수가 적은 이유가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과학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과학계에는 여성의 참여를 막는 다양한 문제가 있다. 부모나 교사가 갖는 무의식적인 편견은 어린 여자아이가 자신에 대해 갖는 믿음에 영향을 끼친다. 남녀 모두 쓸 수 없는 육아 휴직, 성폭력, 불확실한 커리어패스 등 대학에 진학하면 또 다른 문제들이 기다린다. 동료 평가나 보조금 할당에 있어서도 여성과 비(非)서구인에 작용하는 편견이 있다.
나는 남성과 여성의 과학적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때가 아직 아니라고 본다. 동일한 기반에서 시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00년대 중반이 돼서야 여성들은 옥스퍼드대나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했다. 세상은 그들에게 기회를 넘겨준 여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Q 위키백과의 불균질한 지식을 고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젊은 세대가 직면할 편견을 고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믿는다. 내가 교육 정책이나 다국적 기업의 광고를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보는 것들을 더 평등하게 만들 수는 있다. 우리 모두 위키백과를 편집할 수 있다. 무엇이 역사가 될지는 우리가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