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과학동아 편집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연간 프로젝트, 만능 스포츠 로봇 만들기. 몸통을 만들고, 팔다리를 만들어 붙이고, 머리를 붙이고…. 일단 1년간 개념설계에 돌입하기로 했다. 설계 책임은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슬로프에 꽂힌 깃발을 피해 S자를 그리며 스키를 타던 로봇 ‘다이애나(Diana)’가 있었다. 다이애나의 아버지, 한재권 한양대 로봇공학과 교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로봇의 이름은 한국의 영원한 로봇 ‘로보트 태권V’를 따라 ‘로보트 재권V’라고 하자.
12월 초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제5공학관에서 로보트 재권V의 아버지, 한 교수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선반과 밀링
“I’m just not the hero type, clearly. The truth is, I am Ironman.(나는 분명히 영웅 스타일은 아닙니다. 진실은, 내가 아이언맨이라는 것이죠)”
영화 ‘아이언맨’에서처럼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대형 사고를 막아 세상을 구하는 로봇(또는 로봇 슈트)이 탄생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한 교수는 실제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로봇공학자가 됐다. 그는 사람을 닮은 인간형 로봇(휴머노이드)을 개발하고 있다. 두 발로 걷고, 대부분의 일을 두 팔로 수행하며, 표정이나 음성으로 사람과 의사소통도 한다.
“로봇공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아주 오래 전이었어요. 우리 집은 장애를 겪는 동생이 있어서 온 가족이 종일 보살펴야 했지요. 그런데 만화영화에서 커다란 로봇이 사람을 번쩍 들고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거나, 로봇 형사(‘형사 가제트’라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 가제트)가 머리에서 갖가지 팔을 꺼내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본 거예요. 그래서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저런 로봇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런 로봇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그래서 로봇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을 도와주고 사람을 살리면서도 절친한 친구 같은.”
하지만 절절한 소망만으로 로봇공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쉴 새 없이 뭔가 만드는 아이’이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는 ‘과학상자’처럼 간단한 물건을 만드는 키트를 품에 끼고 다녔다.
과학상자가 지루해지자 일명 ‘하드’, 즉 막대형 아이스크림의 막대 등 생활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나무나 쇠를 깎고 모터 등을 달아 배와 비행기를 만들었다. 그는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로봇을 만든 것처럼 성취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중학생 시절에는 아예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선반(재료를 회전시키면서 깎는 기계)과 밀링(기계를 회전시키면서 재료를 깎는 기계)의 사용법을 배웠다. 아버지가 설계한대로 쇠를 깎아 부품을 만들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한 교수는 “그 전까지는 손으로 힘들게 깎아야 했던 것들을 이 기계로는 뚝딱 만들 수 있었다”며 “단단한 쇳덩어리를 사과껍질 깎듯 쉽게 깎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이후 한 대기업 연구소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설계했다. 하지만 로봇을 만들겠다던 어린 시절 꿈이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꿈을 이루러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유학을 준비하면서 국내 로봇 벤처인 로보티즈에 들어가 동료들과 함께 30cm 크기의 교육용 휴머노이드 ‘바이올로이드’를 만들었다.
“바이올로이드를 개발한 이후 제주에서 열린 로봇학회에서 데니스 홍 당시 버지니아공대 교수(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를 만났어요. 그리고 큰 영감을 얻었죠. 사람을 돕는 로봇을 만들겠다는 신념이 같았고, 홍 교수의 무한 긍정에너지에 매료됐거든요. 그래서 버지니아공대로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한 교수는 홍 교수와 함께 2010년 축구하는 로봇 ‘찰리(CHARLI)’를 만들었다. 그리고 국제로봇월드컵인 ‘로보컵’에 출전해 키즈 사이즈(60cm)와 어덜트 사이즈(130cm) 두 종목에서 모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찰리는 현재 미국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에 ‘미국 최초의 휴머노이드’로 전시돼 있다.
스키 타는 ‘다이애나’, 축구공 차는 ‘앨리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 교수는 2012년 귀국해 다시 로보티즈로 돌아왔다. 동료들과 함께라면 진짜 로봇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네 차례에 걸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160cm 다목적 휴머노이드 ‘똘망(Thormang)’을 완성했다.
똘망은 2015년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주관하는 세계 재난구조로봇 경진대회인 ‘로보틱스 챌린지’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이 대회에서는 원자력발전소 사고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로봇이 사람 대신 사고를 수습할 수 있도록 자동차 운전, 밸브 잠그기, 드릴로 벽 뚫기 등 다양한 미션을 겨뤘다. 한 교수는 “(사람이 타는) 자동차를 타거나 내리고 운전할 수 있어야 하므로 사람 크기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2018년 2월 스키 타는 로봇 다이애나를 완성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깃발과 깃발 사이를 뚫고 경로를 따라 빠르게 내려오는 알파인 스키대회에도 나갔다. 다이애나는 키 120cm, 몸무게 25kg로 초등학생과 몸집이 비슷하며, 스테레오 카메라와 시각센서 라이다로 눈을 만들어 장애물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2018년 여름도 한 교수에게 잊을 수 없는 시기다. 제자들과 함께 축구하는 로봇 ‘앨리스(Alice)’를 만들어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로보컵 대회’에 한국 최초로 어덜트 사이즈 종목으로 출전한 것이다.
앨리스는 키 130cm, 몸무게 20kg으로 시속 약 0.5km로 걷는다(사람은 시속 3~4km). 앨리스 역시 눈에 스테레오 카메라가 달려 있는 양안시다. 조별 예선에서 2승 1패의 성적으로 8강까지 진출했지만, 8강에서 이란 팀에 1대 0으로 아깝게 패했다. 한 교수는 “이미 과거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던 대회였지만,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제자들과 함께 만들어 도전했다는 점에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앨리스와 다이애나는 (일반인의 눈으로) 겉보기에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주특기가 각각 축구와 스키로 다른 만큼, 골격이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스피드와 골 결정력이 중요한 앨리스는 무게중심이 일반적인 휴머노이드처럼 단전(배꼽으로부터 약 9cm 아래) 부위에 있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경우 슬로프를 하강할 때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관성을 이용해 가속하는 게 중요해 무게중심을 단전보다 더 아래로 가게 만들었다.
로봇을 만들어 계속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는 이유는 뭘까. 한 교수는 “대회를 여러 번 나갈 때마다 기술적인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으면서 로봇이 차츰 진화한다”며 “언젠가는 사람을 구하고, 사람에게 영원한 친구인 로봇을 만들겠다는 내 꿈도 점차 진화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로보트 재권V’의 개념설계는 몸통부터 시작할 것”이라며 “내 꿈이 한 단계씩 이뤄지는 기쁨을 과학동아 독자들과도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