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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 내 모든 걸 다 줬는데, 날 미워하면 안 ‘돼지’ 인류를 구원한 돼지

 

"돼지는 8000년이란 세월동안 대표적인 가축으로 인류와 함께했다. 소처럼 농업에 보탬이 되거나, 염소처럼 젖을 제공하지도 않고 오롯이 식량 자원으로만 말이다"

 

 

‘황금돼지의 해’ 2019년이 밝았다. 돼지는 복과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동시에 더럽고 천박하며 게으른, 혐오의 대상으로도 여겨진다. 사실 돼지는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줬다. 그 시작은 가축화였다.

 

 

연간 20~30마리 출산, 식량에 최적화

 

자고로 돼지는 유목이 되지 않는다. 소나 양, 그리고 염소는 특별히 먹이를 주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자란 풀을 뜯어 먹고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돼지는 풀만 먹고는 못산다. 오히려 잡식성인 탓에 인간과 먹이 경쟁을 일삼는다. 게다가 스스로 체온 조절을 못하기 때문에 몸을 담글 물이 꼭 필요하다. 유목 생활을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돼지에게 물을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8000년 전 인간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에 들어서야 돼지는 가축화가 이뤄졌다. 돼지의 조상인 멧돼지는 살코기와 기름을 갖고 있어 인간에게 귀중한 식량 자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돼지의 장점은 다산과 빠른 성장이었다. 

 

박준철 국립축산과학원 축산자원개발부 양돈과 연구관은 “돼지는 (다산종일 경우) 한 번 출산에 10마리, 연간 두 차례 정도 출산해 총 20~30마리를 낳는다”며 “임신 기간도 114일로 굉장히 짧은 편”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가축동물인 소와 염소가 한 번에 1~2마리를 출산하고, 임신 기간도 소가 270일, 염소가 150일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돼지는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수를 늘릴 수 있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지금 흔히 사육되는 돼지는 생후 180일이면 체중이 110kg까지 성장할 뿐만 아니라, 고기 1kg을 얻는 데 사료는 3kg이면 충분하다. 소에서 고기 1kg을 얻기 위해서는 약 6kg의 사료가 필요하다.

 

덕분에 돼지는 오롯이 식량 자원으로만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대표적인 가축으로 자리 잡아 인간을 먹여 살렸다. 소와 같이 농업에 보탬이 되거나, 염소와 같이 젖을 제공하지도 않고 말이다.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에서 야생 멧돼지 일부가 순화돼 사육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가축화는 약 6800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됐다.

 

 

검고 몸무게 80kg인 ‘재래돼지’ 복원

 

우리나라는 약 2000년 전인 고구려 시대에 들여와 조선시대까지 고유한 형태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재래돼지’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마구 들여온 외래종과 무분별한 교배가 이뤄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6·25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재래돼지는 사실상 멸종됐다.

 

 

현재 국내 돼지 농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돼지는 세 개 종이 섞인 ‘삼원교잡종’이다. 암컷으로는 덴마크산 돼지인 랜드레이스(Landrace)와 영국산 돼지인 요크셔(Yorkshire)의 교잡종을 사용하고, 수컷으로는 미국산 돼지인 듀록(Duroc)을 사용한다. 돼지 종마다 맨 앞의 알파벳을 따서 흔히 ‘LYD 종’이라고 부른다. 박 연구관은 “이들 세 개 종은 전 세계 돼지 중에서도 가장 크고, 빨리 자란다”며 “번식력도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나 사육 돼지로는 최적화된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현재 LYD종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돼지를 사들일 때마다 종자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각 개인 농가에 돼지를 보급하는 업체(종돈장)가 외국의 돼지 보급 업체와 계약하면서 로열티를 지불하는 방식과 금액을 정하는데, 이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있다. 더불어 외국에서 사온 돼지는 국내 사육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질병에 걸리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특히 사육 환경이 조금만 나빠져도 폐사율이 급격히 높아진다.

 

국립축산과학원은 1989년부터 ‘한국형 씨돼지’를 개발하기 위해 재래돼지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박 연구관은 “전국에서 재래돼지의 흔적을 갖고 있는 돼지는 모조리 모았다”며 “재래돼지의 외향적 특징이 기록된 문헌을 토대로 20여 년간 돼지를 교배하고 선발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거쳤다”고 말했다. 

 

기록상 재래돼지는 귀가 앞을 향하고 있고, 코가 휘어져 있으며, 배 부위에 주름이 매우 많은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피부는 검정색이며, 280일가량 자라면 몸무게가 80kg에 이르고, 새끼는 한 번에 6~8마리 정도 낳는다. 국립축산과학원은 2008년 재래돼지를 복원해 품종등록을 마쳤다.

 

 

재래돼지 개량해 ‘우리흑돈’ 탄생

 

그런데 재래돼지를 사육 돼지로 쓰기에는 생산성이 떨어진다. 평균적으로 출하되는 체중인 110kg까지 성장하기까지 LYD 종보다 2배 가까이 시간이 걸린다. 한 번에 낳는 새끼 수도 2~3마리가량 적다. 또 다른 문제는 지방의 두께였다. 박 연구관은 “LYD 종의 평균 지방은 2.5cm인데, 재래돼지의 지방 두께는 3.8cm가량으로 훨씬 두껍다”며 “지방이 적은 돼지고기를 선호하는 최근 식문화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래돼지의 활용을 고민하던 국립축산과학원은 다른 종의 돼지와 교배하기로 결정했다. 2007년 국립축산과학원은 이미 외래종인 듀록 종을 국내 환경에 맞도록 개량해 ‘축진듀록’ 종을 개발했는데, 이 품종과 재래돼지를 교배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2009년 시작된 연구는 2015년 결실을 맺었다. 재래돼지 수컷과 축진듀록 암컷을 교배하기 시작해 3세대를 거치면 전체 유전자의 37.5%는 재래돼지, 나머지 62.5%는 축진듀록의 것으로 구성된 개량돼지가 탄생한다. 그 뒤 균일한 크기의 우수 품종을 선발하기 위해 3세대를 더 거쳐 최종적으로 개량돼지를 얻었다. 연구팀은 이 돼지 종에 ‘우리흑돈’이라는 명칭을 붙였고, 2015년 상표 및 특허등록을 마쳤다.

 

 

우리흑돈은 LYD 종과 비교해 체중, 새끼 수, 지방 두께 등에서 차이가 없다. 근내지방(마블링)과 전단력(씹는 식감에 관여)도 듀록 종보다도 오히려 더 우수해 고소하고 부드럽다. 박 연구관은 “국내 환경에 적합한 재래돼지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성을 크게 향상 시켰다”며 “재래돼지를 활용해 국내 돼지의 종자주권을 확립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국립축한과학원은 우리흑돈을 2015년 5마리, 2016년 59마리, 2017년 104마리 전국 농가에 보급했고, 보급 마릿수를 계속 늘리고 있다.

 

 

인슐린부터 장기까지, 다 주는 돼지

 

식량으로만 취급받던 돼지가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시작한 건 1900년대 초부터였다. 자신의 장기나 체내 물질을 인간에게 제공한 것이다. 

 

 

시작은 인슐린이었다. 1930년대 덴마크 제약회사인 노보-노디스크가 돼지와 소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분리한 뒤 각종 첨가제로 개량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돼지 인슐린을 사용할 경우 여러 부작용이 있었지만 딱히 치료 방법이 없었던 당뇨병 환자에게는 그나마 이 약이 최선이었다. 이후 안정적인 인공 인슐린이 개발된 1980년대 전까지는 돼지의 인슐린이 당뇨병의 주된 치료제로 사용됐다.

 

다음은 장기였다. 1960년대부터 돼지를 비롯해 원숭이, 침팬지, 개 등의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식을 받은 사람들은 길어야 몇 개월 생존하고는 이내 사망했다. 정확한 이유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알게 됐다. 바로 면역거부반응 때문이었다.

 

동물의 몸은 외부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물질이 들어오면 침입자로 인식하고 이를 없애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현상이다. 인간과 인간처럼 같은 종끼리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양의 체내 물질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보다 훨씬 더 큰 신체 장기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기 위해서는 사전에 이런 면역거부반응을 억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당연히 면역거부반응은 서로 다른 종, 즉 이종(異種) 간에 이뤄질 때 더 극렬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기 위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국내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을 이끄는 박정규 단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치료 방법이 장기 이식밖에 없어 이를 기다리는 환자들은 너무 많은데 비해 사람의 장기 공급은 이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며 동물의 장기 이식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현재 연구자들은 동물의 장기를 인간의 몸에 이식했을 때 일어나는 면역거부반응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이종간 장기이식의 경우 면역거부반응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항체가 돼지의 장기 표면에 있는 당 성분인 알파-갈락토오스를 공격하면서 일어난다. 

 

이 반응은 수분 내에 일어나고 결국 외부에서 이식된 장기의 세포는 사멸한다. 이렇게 이식 직후 일어나는 면역거부반응을 ‘초급성 거부반응’이라고 부른다. 동물의 장기를 사람 몸에 이식한 뒤 면역거부반응이 나타나는 시간에 따라 ‘초급성-급성-세포성-만성’으로 나누는데, 초급성은 수분 후, 급성은 수일 후, 세포성은 수개월 후, 만성은 수년 후 면역거부반응이 나타난다.  

 

지지부진하던 이종 간 장기이식 연구는 2002년 1월 랜달 프래서 미국 미주리대 농업·식품·천연자원대 교수가 세계 최초로 알파-갈락토오스 유전자를 제거한 형질전환 돼지를 탄생시키면서 급물살을 탔다.

 

이후 미국에서는 2012년 초급성과 급성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한 돼지를, 2014년에는 초급성과 급성 혈관성 거부반응을 제어한 돼지를 개발했다. 2015년에는 형질전환 돼지의 신장을 원숭이에게 이식해 5개월 동안 생존시키는 데 성공했고, 2016년에는 형질전환 돼지의 심장을 개코원숭이에게 이식해 945일간 살아있게 만드는 기록을 세웠다.

 

 

세계 최초 돼지 췌도 이식 임상시험, 규정 마련 시급

 

국내에서는 2009년 국립축산과학원이 초급성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한 형질전환 돼지를 개발했다. 특히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은 2016년 12월 돼지의 췌도를 원숭이에게 직접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이종이식학회는 ‘췌도 이식을 받은 원숭이 8마리 중 5마리가 최소 6개월 이상 생존해야한다’ 등 이종 간 이식에 관한 기술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는데,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은 이를 세계 최초로 충족시켰다. 당시 돼지의 췌도를 이식받은 원숭이 5마리 모두 별도의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고도 170~980일 동안 정상혈당을 유지했다.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은 2019년 1월 돼지의 췌도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임상시험을 계획했지만, 현재 임상시험은 연기된 상태다. 국내에서 아직 이종 간 장기이식을 뒷받침할 법규가 갖춰지기 않았기 때문이다.

 

박 단장은 “WHO는 임상시험을 할 경우 이식받은 환자의 샘플을 50년 동안 보관하고, 이들을 평생 추적 관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며 “이런 가이드라인을 각국 정부가 지원해야하는데, 국내에는 이를 뒷받침할 법규가 없어 임상시험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16년 마련한 법안은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법규 마련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의 연구가 종료되는 2019년 5월까지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지는 미지수다. 현재 미국, 일본, 유럽 등은 법규를 마련했다. 박 단장은 “세계 최초로 국제 기준을 충족하는 이종 간 장기이식 임상시험을 진행할 기회가 왔는데, 이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미흡해 안타까운 시간만 흐르고 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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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글·천안=서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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